이 글은 TeamLog Blue2Sky에 쓴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장미 비파 레몬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에쿠니 가오리 (소담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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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쿠니 가오리. 유명하다. 일본의 3대 여류 작가 중 한명이며 우리나에서도 인기가 좋다. 나도 그녀의 팬이다. 번역되어 나온 그녀의 책은 빼 놓지 않고 다 읽었다. 그녀가 우리나라에서 뜬 계기는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이 때로는 그녀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최신 번역작인 <장미 비파 레몬>의 띠지가 그녀를 아직도 <냉정과 열정 사이 (이후 냉열)>의 작가로 소개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 작품에 경도 되어 있는 것도 같다. <냉열>도 좋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모든 것을 보여 준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에쿠니 가오리는 일상에 대한 세세한 묘사, 참으로 다양한 사랑과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힘이 탁월한데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냉열>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냉열>은 Blu와 Rosso의 시너지 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등의 단편집과 <낙하하는 저녁><반짝반짝 빛나는>, <호텔 선인장> 등이 그녀만의 풍부한 감성이 담긴, 에쿠니 가오리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번 책 <장미 비파 레몬>은 그녀의 느낌이 아주 물씬 배어 나는 책이다. 9명의 여자들과 그들의 남편 혹은 남자 친구들이 얽히고 설켜 있는 이야기는 복잡할 것 같으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모든 것이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흘러간다.

"음악은 치유 효과가 있고 담소에 방해되지 않는 엔야를 선택했다." (53p)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사랑하는 방식 (혹은 살아가는 방식)은 어찌 보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이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냥 즐기는 불륜이거나 아니면 정 때문에? 저런 만남들도 어찌 보면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어떤 정해진 틀의 답변을 구하고자 하면 쉽지 않다. 그저 단지 이런 모습도 있구나라고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분명히 어디의 누군가는 작품 속의 도우코와 동질감을 느낄지도 모르며, 또 누군가는 에미코에게 감정 이입할 수도 있다. 아니면 또 다른 누구는 야마기시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숨 쉬며 살아 가고 있는 이 세상이란, 사실 이 소설 속과 다를 바가 없을테니까. 소설이니까 조금쯤은 과장이며 비현실적이겠지라는 생각은 버리자. 이 세상 최고의 소설과 이야기는 바로 현실 세계이며 모든 소설 작품은 바로 그 현실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도우코, 소우코, 레이코, 에미코, 마리에, 미치코, 에리, 아야, 사쿠라코. 그리고 미즈누마, 야마기시, 츠치야, 곤도. 이렇게 많은 등장 인물들이 나오지만 책의 줄거리에 대한 요약은 따로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줄거리가 단순해서가 아니라 주인공들의 관계를 미리 안다고 해서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단지 초반에 일견 복잡해 보이던 주인공들의 관계는 중반으로 흘러가다 보면 자연스레 머리 속에 그려지게 된다. 거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각 인물들의 에피소드 호흡이 가빠지면서 책을 읽는 독자도 그 가쁜 호흡에 따라 책의 엔딩으로 치닫게 된다.

 엔딩은 요즘 흔히 듣는 말로 하자면 열린 결말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흐름에서 소설도 끝이 난다. 누군가의 불륜의 결말은 어땠을지, 마음 속의 연인을 잊지 못하고 결혼을 택한 누군가의 후는 어떠했을지 혹은 새로운 불륜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누군가의 뒷 이야기는 어떨지도 궁금하지 않다. 그저 책이 처음부터 독자에게 보여 주었던 그런 흐름으로 등장 인물들의 삶도 계속 흘러 가겠지라는 아련한 상상만 든다.

"컴퓨터. 카세트테이프. 메모지 몇 장. 사전. 책상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아직 정리하지 못한 파일 몇 개. 누가 여행을 다녀오면서 사다 준 쿠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받아놓고서 며칠이나 그대로 내버려둔 캔디 바. 파란색 클립. 만년필. 지구 모양 서진. 수정액. 비타민C 정제. IYOU라고 쓰여 있는 머그잔에 절반쯤 남은 채 식어버린 커피. 액자에 넣지 않고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은 사진 두 장(한 장은 작년 홈 파티 때 찍은 시끌벅적한 사진, 다른 한 장은 웨딩 드레스를 입은 도우코와 교회에서 찍은 사진)." (83p)

 더불어 이 책이 마음에 들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바로 김난주씨의 번역이라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번역 되어 나온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크게 김난주씨와 신유희씨가 번역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에는 거의 김난주씨가 번역을 했는데 언젠가부터 신유희씨의 번역작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최근에는 김난주씨의 번역작이 더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사실 두 역자가 같은 작품을 번역한 것이 아니기에 함께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게는 김난주씨의 번역이 조금 더 에쿠니 가오리의 느낌이 아닌가라고 와 닿는다.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닌데다가 원작을 읽어 보지도 않았기에 신유희씨의 번역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번역이라는 것은 단순한 직역이 아닌 또 하나의 창작 과정이라고 난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 김난주씨의 역이 내 마음에 훨씬 더 와 닿는 것 뿐이다.
 
 사실 바로 직전에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에 많이 실망을 했던 터에 이 작품은 달리 기대를 하진 않았다. 책이 나온 줄도 몰랐었고 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충동적으로 산 것이다. 그런데 이번 충동 구매는 아주 200% 만족이다. 정말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 식 감성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에쿠니 가오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올 겨울, 이 책 한 권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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