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공동 묘지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기타도 하루 일찍 떠나고, 일행도 무릎 상태 때문에 차량으로 이동을 하기로 결정해서 류블랴나부터 베네치아까지는 혼자서 라이딩을 해야 했다. 여기서부터 베네치아까지의 거리는 대략 300km가 조금 안됐으므로 넉넉히 잡아 3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틀이면 충분히 도착할 것 같았다. 일행과 베네치아에서 만날 호스텔을 정하고 아침 8시 길을 떠났다.
 
 류블랴나를 떠나 슬로베니아를 빠져 나가는 길은 예상 외로 힘들었다. 지도를 보면서 높은 언덕을 하나 정도 지나겠거니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래에서 시작해 꼭대기의 마을과는 고도 차이가 거의 1,000m 정도는 나지 않나 싶었다. 거기에 오르막길의 중간 지점부터 슬슬 끼기 시작한 안개가 정점을 찍은 이후에 굉장히 짙어져서 내리막길은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라이딩을 해야 했다. 마주 오는 차가 거의 5m 안에 들었을 때에야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형광색 조끼를 걸쳐 입고 후미등을 켠 후에 시속을 10km 안팎으로 유지하면서 천천히 내려 왔다.

안개

안개 낀 산길

 높은 고도와 안개 탓에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슬로베니아의 국경 도시에 도착했다. 이미 주변은 어둠이 잦아 들고 있었다. 이 곳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 지는데 내가 가야 하는 곳은 몬팔코네 방향이었다. 다른 쪽으로 가면 해안선을 타고 가 언덕은 없었지만 베네치아까지의 거리가 더 멀었다.

 몬팔코네로 가는 길은 왠지 모르게 스산했다. 오가는 차도 드물고 가로등도 거의 없어 내 랜턴 불빛에만 의지해야 했다. 그런데 그 스산함은 다 이유가 있었다.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길 옆 풀섶으로 들어가 볼 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자세히 살펴 보니 내 앞에 펼쳐진 것이 공동 묘지였다. 늘어서 있는 십자가들과 봉분들. 불빛도 없고 인적도 드문 곳에 공동 묘지라니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난 잽싸게 볼 일을 마친 후 얼른 다시 자전거에 올라 타고 페달을 밟았다. 주위를 둘러 보니 제법 많은 십자가들이 눈에 띄었다. 그 다음부터 몬팔코네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정신 없이 달리고 보니 어느 새 몬팔코네였다. 도대체 왜 그런 한적한 곳에 묘지터가 있었던 것 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적한 곳에서, 그것도 변변한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다시 달리고 싶지는 않던 길이었다.

"Venezia 10km"

 오후 6시,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 "Venezia 10km"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만났다. 드디어 도착이구나. 문득 벅찬 기분이 들었다. 3년 전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언젠가 꼭 다시 와야지 라고 다짐했다. 너무도 아름답고 마음에 들어서 꼭 한 번 더 찾아 오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짐처럼 다시 이곳 베네치아에 왔다. 하지만 사실 그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도대체 누가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제 저 앞에 보이는 다리만 건너면 베네치아였다. 일행은 먼저 도착해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약속했던 호스텔로 찾아 갔지만 그곳에 자전거를 끌고 온 한국인 여행객은 없었다. 게다가 빈 방마저 없어 난 결국 다른 숙소를 잡아야 했다. 화장실도 딸려 있지 않은 작은 방. 이틀 동안 장거리를 뛰느라 누적된 피로가 몰려 왔지만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베네치아에서 이 정도의 숙소라도 감지덕지였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근처 피자 가게에 들러 끼니를 때우고 3년 만의 베네치아 입성을 기념할 겸 이곳, 저곳을 거닐었다. 늦은 시간의 산 마르코 광장을 보고 싶어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는데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길을 찾기가 힘들고 인적도 드문 으슥한 골목길들을 혼자 다니기도 뭣해서 다시 숙소에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대운하

대운하의 밤 풍경

 웬만한 곳에 가서도 길을 잃는 다던지 헤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이곳 베네치아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던 곳이었다. 단지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사람 한 명 지나가기 힘든 좁은 골목길들에 그 끝에 불쑥 나타나곤 하는 수로까지 보고 나면 길을 잃고 정말 무슨 일을 당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운하

수로를 연결하는 수백 개의 다리들이 있다

골목

사람 하나 지나가기 힘든 좁은 골목길

 하지만 그러한 두려움은 곧 새로운 골목, 골목을 탐험하는 재미를 내게 안겨 주었다. 졸업하는 친구를 축하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을 만나고,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에 소품으로 쓰였다는 가면 가게를 만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방이라는, 문 밖으로 바로 수로를 바로 마주하고 있는 서점도 만날 수 있었다.

가면 가게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에 소품을 공급했다는 가면 가게.

베네치아 기행, 진정한 물의 도시

 벨기에의 브뤼헤, 중국의 소주 등은 때로 북유럽의 베네치아, 동양의 베네치아라는 칭호를 듣기도 하는 곳들이다. 그 도시들에도 도시 안을 따라 흐르는 운하들이 있었고 제법 물의 도시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진짜 베네치아에 와 본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네치아

베네치아 풍경

산 마르코 성당

사계절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산 마르코 광장과 성당

 좁은 물길을 연결해 주는 수 백 개의 다리들과 백여 개가 넘는 섬들. 대운하를 따라 운행하는 바포레토와 좁은 수로 사이를 누비는 곤돌라. 문을 열면 바로 배를 타고 외출할 수 있도록 수로와 잇닿아 있는 출입문. 모두 이곳이 아니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풍경들이었기에 "물의 도시"라는 칭호는 오직 이곳 베네치아만이 받을 자격이 있었다.

풍경

베네치아 풍경

곤돌라

곤돌라

곤돌라

곤돌라들은 화려한 장식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베네치아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산 마르코 광장과 성당, 매년 2월의 카니발 축제, 유리 공예로 유명한 무라노 섬,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 섬, 오~솔레미오를 부르는 곤돌리오네가 노를 젓는 곤돌라 등 유명한 관광 상품과 명소들이 많다. 모두 아름답고 멋진 풍경들이고 볼만한 가치가 있다.

카니발 가면

카니발 가면. 사람들은 가면을 썼을 때만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한 베네치안이 말했다

카니발 가면

형형색색의 카니발 가면은 이곳의 특산품이다. 종이로 만들어진 가면들은 굉장히 가벼우면서도 단단하다

 그 중에서도 나는 운하의 도시, 미로 같은 물의 도시라는 이곳 베네치아를 제대로 느껴 보고 싶다면 아무런 계획 없이 걷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곳, 저곳을 거닐면서 대운하를 건너는 3개의 다리도 모두 건너 보고 운하 사이사이로 들어 앉아 있는 집들도 구경하고 물과 공존하고 있는 이곳의 풍경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베네치아를 보는 길인 것이다.

흐린 날

흐린 날의 대운하 풍경. 대운하는 베네치아의 중요한 교통로이다

베네치아 풍경

베네치아 풍경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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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2012history.tistory.com BlogIcon 청춘이다 2008.03.09 01:3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베네치아 정말 신기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