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리스본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보는 리스본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눈부신 햇살, 그림 같은 집들, 드넓은 푸른 바다까지 모두 다. 몇 주 동안 우중충한 독일의 겨울 하늘만 보다가 이곳으로 오니 거의 지상 낙원에 온 기분이다. 한 겨울에 이런 햇살을 만끽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리라.

리스본

리스본, 햇살 좋은 날

 내 몸의 반만한 캐리어를 끌고 미리 예약해 둔 호스텔을 찾아 갔다. 여권을 받아 체크 인을 하던 카운터의 직원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나를 쳐다 본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야, 믿을 수 없는 걸? 생일 축하해!"
 "헤헤, 고마워."

 이국에서 보내는 생일. 집에서 생일을 보내 본 적이 언제였던지 가물가물하다. 몇 년 전에는 폼페이를 다녀 오는 기차 안에서 생일을 맞았고, 또 강원도에서, 다시 대륙의 서쪽 끝에 와서 생일을 맞이하고 있다. 이날 밤은 호스텔의 친구들과 가볍게 와인으로 생일을 축하했다. 일행과 기타는 하루, 이틀 정도가 더 지나야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리스본

골목길 산책

 크리스마스에는 리스본 구시가 이곳, 저곳을 거닐었다. 아마 우리 나라였다면 정신 없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곳은 한적하기 그지 없다. 이브에는 조용히 예배를 드리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크리스마스 날은 조용히 집에서 휴식을 갖는 것이 유럽의 대체적인 풍경이었다. 물론 밤새 술을 마시고 밖에서 시끄럽게 노는 젊은이들도 있긴 하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언덕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 리스본을 산책하는 것은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내 안에 들어 오는 모든 것들과 시선을 마주하며 거리를 걸었다. 해변을 따라 햇살을 받고 서 있는 파스텔 톤의 집들, 골목 중앙에 얼기설기 얽혀 있는 트램 라인들, 석양을 뒤로 한 채 어둠 속으로 가라 앉는 다리들.

리스본

동화 같은 파스텔톤의 집들

리스본

트램 라인

 숙소로 돌아 오니 일행과 기타가 도착해 있다. 이게 얼마 만인가. 기타와는 헤어진 지 한 달만에 만나는 것 같았다. 모두 무사했구나. 깁스한 손을 들고 기타와 인사를 나눴다. 왠지 멋쩍고도 반가운 웃음. 간만에 회포를 푸는 우리는 다들 이야기들이 한 가득이었다.
 
로카곶, 여정의 끝

 미리 와서 기다리기를 한 시간여쯤 지났을까? 위쪽에 일행과 기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끝이구나. 길었던 시간이었다.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 오는 일행들을 보며 "나도 저기에 함께 있었어야 했는데."라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잘했다. 스스로에게 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부끄럽지 않은 끝을 보았다.

로카곶

로카곶에 간 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

 로카곶 표지판을 지나치면서부터 울기 시작했다는 기타는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다. 그간의 시간이 스쳐 지나가는 모양이다. 다들 대륙의 서쪽 끝을 상징하는 비석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 보는 동안, 난 가만히 서서 바람을 맞아 보았다. 날씨도 좋았고, 하늘은 푸르르고, 바다는 적당히 고요했다. 오늘의 로카곶은 확실히 우리를 반겨 주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 바람이 만나고 싶어 그 먼 길을 달려 왔던 건가 보다. 대륙의 동에서 서까지 참 멀고도 험했던 그 길을......

로카곶

대륙의 서쪽 끝, 로카곶

 한동안 말 없이 바다를 바라 보았다. 때로는 분명히 힘들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즐거웠던 시간들이다. 새벽까지 계속되던 라이딩은 고요한 추억이 되었으며, 몇 겹을 껴 입고 달리던 발칸의 추위는 하얀 설경 속에 포근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언제 또 한 번 이런 시간, 이런 기회를 갖게 될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이 느낌만은 잊지 않고 내 가슴 속에 담아둘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와 같은 시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다시 만나게 되는 시간을 놓치진 않을 것이다.

기타

질질 짜던 기타도 사진 찍을 땐 멋진 포즈를 취했다

나

나도 한 컷,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가 완전 엉망이었다

연재를 마치며...

 많은 사람들이 이 여행에 대해 질문을 한다. "어땠어요?",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무엇을 얻었나요?"

 "좋았어요. 한 번쯤 해 볼만한 경험이었지요."
 "에이, 그게 다예요? 좀 더 길게 얘기 좀 해 봐요."

 그런데 막상 길게 얘기를 할까 하면 또 더 짧게 듣기를 바란다. 한마디로 어땠다라던지 라는 식으로. 하지만 길 위에서의 8개월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마주 했고 많은 생각들을 했다. 무언가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단정 지을 수 없는 경험과 시간들. 이곳에서의 소중한 기억만큼 저곳에서의 추억과 인연도 소중했다.

 시안의 유스호스텔, 파키스탄의 라시드와 소장님,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풍경들, 미로 같던 이란의 야즈드, 터키의 케난과 바키 할아버지, 기대만큼 사랑스러웠던 류블랴나...... 그 속내 하나하나까지 전부 말로는 적지 못한다. 아마 이 여행기는 사람들의 그런 질문에 대한 작은 대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남겨 두는 추억과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청장님이 처음 연재를 해 보자고 했을 때 사실 적잖이 놀랐다. 어디다 내 놓을 생각도 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일기들이었다. 처음 약속 드렸던 것처럼 끝까지 같은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해 죄송스럽다. 더불어 이런 지면을 할애하고 기회를 주신 청장님께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늘 시간에 맞추고자 노력했지만 가끔씩 원고를 늦게 보냈던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말씀 없이 잘 정리해 주시고 업데이트 해 주신 신영주님, 송정아님께도 감사 드린다.

 아울러 부족한 글 읽어 주신, 이곳을 찾아 오는 모든 분들께도 감사 드린다. 언젠가, 어디선가 또 다른 인연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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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damasworld.tistory.com BlogIcon 다마 2008.04.14 23:4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와우~ 직접 작성하신 기사인 모양이네요~ 힘은 좀 들겠지만, 진정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2. Favicon of http://raycat.net BlogIcon Raycat 2008.04.16 21:0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흐 멋진곳을 다녀오셨군여... 언제나 한번 가볼려나...

  3. TomCat 2008.04.18 00:5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수고 하셨어요~

  4. Favicon of http://blog.daum.net/punky_insun BlogIcon 낭만원숭 2012.06.08 08:3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우연히 들어와 여행기를 읽고 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했어요. 멋진 글 덕분에 기분 좋은 밤이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