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일요일 오전 조조 영화를 보고 왔다. 새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좋은 점 중 하나는 극장이 가깝다는 것이다. 9시 50분에 영화가 시작하는데 20분 전에 집을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여유 있게 표를 사고 자리를 잡았다.

 <그린 존>의 국내 홍보 문구는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의 제작진과 맷 데이먼이 다시 만났다는 것이었다. 광고 문구만 본다면 사실적이면서도 현란한 액션의 스릴러물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린 존>은 <본> 시리즈와는 그 방향이 전혀 다르다. <본> 시리즈가 가상의 시나리오에 기초한 (픽션) 액션물이라면 <그린 존>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사실에 기초한 페이크 다큐에 가깝다. 영화 제목 자체가 이라크 내에 실재하고 있는 미군의 '안전 지대'를 지칭하는 것이니 이에 따라 이 영화의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미 알려진 내용들이다.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WMD)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은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결국 그 정보는 거짓이었고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 세계를 기만했다는 팩트! 그렇다면 <그린 존>이 이러한 팩트를 반복해 이야기 하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주인공 로이 밀러(맷 데이먼)가 거듭되는 WMD 수색 작전의 실패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 미국이 주장한 이라크 침공의 원인이 WMD였다고 생각해 볼 때 - 영화 전개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점이지만 현실 속의 관객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주인공의 의심은 곧 이 (추악한) 전쟁 자체에 대한 의문에 다름 아니다. 과연 WMD는 존재했던 것인가? WMD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라크의 민주주의와 이라크인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은 허울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밝혀진 진실은 WMD가 존재한다는 정보 자체가 완전한 허위였고 조작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작 과정에는 미국 - 그리고 이를 위시한 연합국들 - 의 이해 관계뿐만 아니라 이라크 내 권력 세력의 이해 관계도 얽혀 있었다. 영화 속에서는 정보를 허위로 조작한 것이 과연 누구였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물론 중간급 관리였던 파운드스톤 혼자만의 농간은 아닐 것이다. 아마 실제로는 미국 최고 권력자까지의 암묵적인 합의와 승인이 존재했겠지.

 하지만 진실이 밝혀졌다고 해서 이야기가 해피 엔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밝혀낸 진실이 '힘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문제를 확대하면 오히려 사실을 모를 때보다 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현실 속에서) 이미 WMD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정 사실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미국과 연합군이 이라크를 떠났는가? 전쟁 전의 상황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노력만이라도 있었는가? 전 세계가 미국의 거짓을 규탄하고 있다고 하여 변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대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미국은 여전히 이라크를 자신들의 뜻대로 개조하기 위해 설쳐대고 있으며 이를 실제적으로 막을 수 있는 세력은 - 적어도 현재 상태에서 보자면 - 현실 상에서는 아무도 없다. 어찌 보면 '진실의 힘'이라는 것은 약자들을 달래기 위해 - 혹은 기만하기 위해 - 힘 있는 자들이 만들어 낸 수사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밝혀낸 진실은 잠시간 언론의 이슈가 되었을 뿐, 전쟁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했다.

 한 장의 사진이 베트남 전쟁을 끝낸 반전 운동의 계기가 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사람들이 몰랐던 진실과 그에 근거한 언론의 힘이 작동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진실과 언론의 힘, 그리고 그 작동 기제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지구 군주국으로 군림하려 하는 미국도 그렇지만, 최근 몇 년 간은 - MB 당선 이후 - 우리 나라가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언론은 정부의 앵무새 역할만 하고 있고, 사실은 은폐 되거나 축소 되며 묻혀 버리고 있다. 모든 사실들은 정부에게 유리한 형태로만 보여진다.

 <그린 존>은 오직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진실만을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그린 존>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의 내막은 수많은 <그린 존>들에 의해 은폐된 진실 중 하나였을 뿐이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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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10 15:4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10.05.23 20:4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너무 늦었겠죠? 이미 다른 분한테 받으셨으리라 봅니다.

      혹시 아직도 못 받으셨다면 다시 말씀해 주세요.

  2. 2010.05.15 15:3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10.05.23 20:4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너무 늦었겠죠? 이미 다른 분한테 받으셨으리라 봅니다.

      혹시 아직도 못 받으셨다면 다시 말씀해 주세요.

  3. Favicon of http://tood-re.tistory.com BlogIcon 먹튀 검증 2018.07.25 17:3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잘보고갑니다

이 글은 감성미디어 Blue2Sky에 쓴 것을 옮겨온 것입니다.

* 아래에 실린 사진들은 책 속의 사진이 아닌, 내 개인 사진임을 미리 밝혀 둔다. 사진이 나오는 책에 전혀 다른 사진을 넣는다는 것이 혹여 작가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까 싶었으나, 그러한 방식 또한 책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을까 하여 조심스레 포스팅 해 본다.

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임재천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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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인천, 춘천, 보령, 속초, 강릉.동해.태백.삼척, 군산.김제, 남원, 안동, 대구, 경주, 부산, 진주, 통영, 나주, 목포, 순천, 여수 그리고 제주.

 소설가, 시인, 평론가, 인문학자 그리고 의사.

 그리고 다큐멘터라 사진가 임재천의 사진들.

 도시, 기억, 풍경이 함께 하여 펼쳐 놓는 우리네 도시들 풍경에 관한 20개의 글타래.

 이 책 <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은 위의 짧은 글로 요약할 수 있을 듯 하다.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사진가 임재천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드문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는 우리 나라 곳곳의 도시 풍경들을 8년에 걸쳐 담아 내었다. 그리고 <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은 바로 그가 담아 놓은 그 사진들과 각 도시에 관한 기억을 향유하고 있는 필자들이 뭉쳐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그려 놓은 책이다.

 우연히 임재천씨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작업의 거의 모든 비중을 국내에 두고 있다고 했다. 사진, 풍경 사진 특히나 다큐멘터리 사진에 있어서는 피사체에 대한 이해가 아주 중요하다고 난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해외 사진 작업은 언어, 문화 등의 가장 기본적인 피사체 이해의 연결 고리들 중 하나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 위험이 있다. 언어나 문화라는 것이 유일한 이해의 연결 고리는 아닐 수도 있지만 아마 임재천씨가 국내 작업을 중요시하는 데에는 그런 까닭도 있을 것이다. 또 그렇기에 국내에 집중하여 작업하는 그의 우리 나라 사진들이 예사롭지 않을 것임을 미리 짐작해 보기도 한다.

통영

통영. 2008.

 책에 실려 있는 임재천씨의 사진들은 옛 맛이 난다. 아니, '옛' 자를 빼고 '맛이 난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 싶다. 단지 우리가 잊고 있던 풍경이기에 옛 것인듯 느껴질 뿐, 실은 주변에 있는데도 현대에 물든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풍경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 임재천의 사진들은 맛이 난다. 그 맛은 뭐랄까, 조금은 부드러우면서 때로는 개운한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자니 정말로 사진들의 맛이 입 안에 맴도는 것 같다. 그의 시선으로 담아 낸 우리 주변의 풍경은 뒷끝을 남기지 않으면서도 사진을 보는 내내 절로 그 안에 빠져들게 만드는 그러한 맛이 있다.

 도시의 모습을 이루는 것은 풍경뿐만이 아니다. 책 속에는 한 사람의 기억에서 건져 올려 만들어 낸 새로운 도시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한 필자의 말처럼 자신은 그 도시에 관한 기억을 윤색해 내기에 적당한 인물이 아닌데도, 또 그 기억이 우리 앞에 하나의 도시를 그려 낸다. 사람의 기억에서 뽑아내는 도시의 모습.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도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의 기억 속에 있는 기억들도 결국엔 그 도시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렇기에 여러 필자들이 자신의 도시에 대해 뱉어낸 기억들은 그만의 가치가 있으며 또한 기억과 시간이 함께 담긴 운치가 있다.

목포

목포. 2007.

 책에 소개된 도시들 중에는 내가 이미 가 본 곳도 있고, 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도 있다. 이미 가 보았던 곳은 왠지 모를 그리움으로 다가 오고, 처음 보는 풍경들은 호기심과 함께 역시 뭔지 모를 아련함이 마음 속에 떠오른다. 아마 책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처음 보는 모습이든, 혹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풍경이든 책 속의 글과 사진에는 보는 이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힘이 있다.  

제주.

제주. 2007.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사진 설명글에 대한 편집 방식이다. 처음에는 사진들만이 쭉 놓여 있길래 설명이 없는가 보다 생각하고 사진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 페이지 뒤에, 그것도 다시 앞페이지로 넘어가 봐야 하는 사진의 설명을 넣어 두었다. 사진 위에 글을 인쇄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차라리 사진 크기를 좀 줄이더라도 한 페이지에 넣어 두는 것은 어땠을까? 아니면 아예 책 마지막의 촬영 정보 페이지에 사진 설명글도 같이 넣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그래도 사진 위에 글을 섞지 않고 두어 사진만을 온히 감상하기에는 좋았다.

 마지막으로 모쪼록 사진가 임재천의 작업들을 오래오래 만나볼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혹여나 떠도는 발걸음 따라 길을 걷기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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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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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겨울. 내가 정말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접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한동안 나를 먹먹한 기분에 빠져 있게 만들었다. 무언가가 머리를 쿵 친듯 하면서도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던 뜨거움이 있던 그 기분을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다. 단지 코엘료의 연금술이 내 가슴 속에 뜨거움을 불어 넣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요즘 내 삶은 서로 다른 세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과 같다. 각 악장에 제목을 붙이자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 <몇몇 사람과> <아무도 없이>." (17p)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오늘. 지금의 나는 어떤가? 그때 느꼈던, 치밀어 오르던 뜨거움은 어디로 갔는가? 진심으로 원하던 나의 모습과는 많이 멀어져 있는 것 같다. 꿈을 잃은 것과 열정을 잃은 것, 어떤 것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일까? 코엘료의 책도 <연금술사> 이후로는 거의 읽지를 않았다.

 2008년 겨울, 난 다시 코엘료를 만났다. 오랜만에 다시 코엘료의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든 이유는 명료했다.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를 처음 만났을 때, 내 가슴이 느꼈던 것들을 다시 찾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내려 놓은 지금, 책을 읽기로 한 내 결정에 후회는 들지 않는다. 

"우리 각자에게 실현해야 할 신화가 있다는 것, 바로 그겋이었다. 타인이 우리를 믿어주든 말든, 비판하거나 무시하거나 봐주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그것을 수행한다. 그것이 이 땅에 태어난 우리의 소명이고, 모든 기쁨의 원천이므로." (89p)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코엘료가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똑같았다. 그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의 사명, 자아의 신화를 찾아 가는 길,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것. <연금술사>의 초판이 86년도에 나온 걸 생각하면, <흐르는 강물처럼>의 원판이 발간된 2006년까지 기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동안 코엘료는 한결 같았던 것이다. 그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한 자리에 있지 못하고, 한 길을 가지 못한 것은 그의 책을 읽은 나였다. 그러고 말리라고 결심했으면서도 결국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은 나였다.

 코엘료가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얘기하는 것은 사람은 어느 길로 가야한다는 정답이 아니다. 그는 길을 알려 주기보다 길을 갈 수 있다고 우리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을 한다. 끊임 없이 이야기하는 자아의 신화, 사람의 사명과 나아가야 할 길. 그 길이 어떤 모습이고, 어떤 곳이든 간에 코엘료는 우리 스스로만 원한다면 그 길을 나아갈 수 있다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는 작가 스스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 스스로가 산티아고의 순례길에서 겪었던 경험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므로, 나는 매순간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오늘 할 일이나 경험할 수 있는 것 - 기쁨, 직업적 의무, 내가 상처입힌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것 등 - 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111p)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떠한가? 자아의 신화에 대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자아를 찾는 일이라고 해서 지금 내 삶과는 확연히 다른,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런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일상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자아의 신화를 이룩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정말로 내 길이라는 믿음이, 나의 신화를 이룩하는 일이라는 뜨거움이 자신에게 있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 또 깨달은 것은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가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 멀리 내 목표와 방향이 있다면,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수십, 수백가지가 있을 수 있다. 조금 돌아가는 길처럼 보여도 혹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건 잘못된 것이 아닌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무엇보다도 길을 가는 것에 대한, 자아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사는 동안 쓸데없는 일들을 걱정하고, 일을 미루고, 중요한 순간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간다.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고, 늘 푸념하면서도 막상 행동하기는 두려워한다. 모든 것이 달라지길 바라면서도 스스로는 변화하려들지 않는다." (163p)

 사실 전 지구 상의 인구 중 10%, 아니 단 5%라도 그렇게 자신에게 뜨거울까? 난 자신할 수 없다. 주위 환경과 상황이 쉽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놓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전과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어린이가 자아의 신화라는 것이 뭔지 알 기회가 있을까?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고 앞으로 전진하는 일이 과연 쉬울까? 하지만 지금 여기의 우리는 다르다. 자신을 내던져 - 희생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혼신의 힘을 다 하라는 것이다. -  앞으로 나아가고 스스로의 길을 이룩할 기회가 있다. 얘기하기 조심스럽지만 9.11 사태를 보면서 코엘료가 느꼈던 생각 - 다시금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 - 은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여행은 혼자서 가되, 결혼한 사람이라면 배우자와 간다." (200p)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올해 나에게는 몇가지 큰 일들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했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평생의 동반자가 될 사람도 만났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한 가지 부족했던 것, 내가 가야 할 길도 이제 알겠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자신을 찾은 것 같다. 어쩌면 난 그 동안 자아를 성취하는 것은 조금은 뜬 구름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진실은,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나 스스로가 변함으로써 이룩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고맙습니다. 파울로 코엘료. 다시 한 번 나를 깨우쳐줘서.

덧. 작가의 경험과 일화, 우화 등 이 책에 실려 있는 101가지의 이야기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 그 이야기들은 다양하게 받아 들여질테니까. 단지 지금 내 상황에는 이렇게 와 닿았을 뿐이다. 다른 누군가는 이 책에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이란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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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의 여행법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진동선 (북스코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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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부터 우리 나라에는 카메라-사진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길거리를 돌아 다니다 보면 오히려 손에 카메라를 안 든 사람들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이다. 오래된 필름 카메라부터 시작해서 전문가용 중급기 DSLR, 하다 못해 흔히 똑딱이라 불리는 P&S 카메라까지 이런 것 한 번 만져보지 못했거나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이젠 아마 드물 것이다.
 
"짧은 시간, 스쳐 지나가듯 만나는 도시 풍경은 오로지 마음으로 대하고 만나야 한다. 카메라를 앞세워 다가서기보다는 마음으로 먼저 다가서야 하고, 좋은 사진을 찍으려는 생각을 앞세우기보다는 우선 풍경을 마음에 잘 담으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마음을 비우고 그런 마음으로 풍경을 바라보면, 풍경이 내게로 온다. 사진은 온 마음으로 바랄 때 원하는 풍경이 다가오고, 내가 꿈꾸는 위치, 그 장소에 바라던 것들이 마법처럼 자리해준다. 사진은 눈과 마음이 먼저여야 한다. 카메라가 먼저여서는 안 된다. 욕심은 언제나 욕심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140p)

 그리고 이러한 카메라-사진의 인기와 함께 시작된 것이 바로 무수히 쏟아져 나온 사진, 여행 에세이들이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창기에 비교적 적은 수로 정제된 책들이 출간되던 것에 비해, 갈수록 많아지는 책의 양에 반비례해서 떨어진 것은 바로 사진, 여행 에세이집의 질이었다. 마음이 담겨 있지도 않고, 그저 그런 생각 없는 시선으로 셔터를 누른 사진들에 적당히 감성적인 글귀 좀 붙여 놓은 에세이집들은 그런 책들에 대한 내 관심을 저절로 식게 만들었다.

 이때 내 눈에 띈 것이 바로 진동선씨가 쓴 <사진가의 여행법>이었다. 나도 그랬지만 사진의 기술적 이론이나 장비 측면을 벗어나 좀 더 깊게 사진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 공부를 하다 보면 가장 쉽게 만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진동선씨의 이름이다. 이해하기 쉽게 사진의 역사를 집약한 <영화보다 재미있는 사진 이야기>와 <현대 사진가론>, 그 밖에 눈빛 출판사에서 나온 여러 권의 책 등 사진 평론가이자 사진가로 활동하는 진동선씨는 국내 사진계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이름 중에 한 명이다.

"모든 추억은 어떤 시간 속에 사건이 '상처'로 자리했을 때 만들어진다. 모든 경험이 추억으로 남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어떤 기억이 각인될 정도로 깊게 파일 때 훗날 추억이 된다. 같은 의미에서 어떤 도시에 대한 추억이나 기억은 주인공과 도시 사이에서 발생한 각인된 사건의 상처이다. 사건은 저마다 다를 수 있으나 한 가지 공통된 것은 지워지지 않을 강력한 정신적 상처, 즉 트라우마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적 외상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 상처를 푼크툼이라고 표현했는데, 정신적 상처는 예술가나 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사유와 성찰의 요소이다." (171p)

 그리고 <사진가의 여행법>은 그런 진동선씨에 대한 나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 주었다. 새로이 사진가의 길에 들어 서는 딸과 함께 한 열흘 간의 유럽 기행은 사진의 역사를 더듬는 시간과 함께 사진에 대한 그의 자세와 철학을 배울 수 있는 길이었다. 독일의 카셀 도큐멘타부터 시작해서 베니스 비엔날레, 아를의 사진 축제로까지 이어지는 길은 그 자체로 사진과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 보았고 또 가 보고 싶은 행사들이다. 거기에 니엡스가 최초 사진을 찍은 생루드바렌 등 사진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들을 들르는 기행은 참으로 부러움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난 사실 이번 책에서 니엡스가 최초의 사진을 찍었던 곳이 보존 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진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제일 첫 장에 나오는 것이 바로 니엡스의 8시간 장노출 사진인데 그곳이 남아 있다니...나중에 나도 꼭 한 번 가 보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사진 그리고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진동선씨을 글 중에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부분이다. "카메라를 앞세워 다가서기보다는 마음으로 먼저 다가서야 하고, 좋은 사진을 찍으려는 생각을 앞세우기 보다는 우선 풍경을 마음에 잘 담으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내가 여행을 다닐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렌즈에서 눈을 떼고 나의 눈으로, 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진으로 남기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내 가슴에 남겨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만큼 나의 여행을 기억하고 추억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꿈에서 시작된다.
꿈 없이 가능한 일은 없다.
먼저 꿈을 가져라.
오랫동안 꿈을 그린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 앙드레 말로" (359p. 작가의 딸, 영은씨의 기행문 中)

 이 책은 흔한 사진, 여행 에세이들처럼 조금은 가볍고 감각적인 내용들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분명히 실망할 책이다. 적당히 아름다운 풍경 사진, 적당히 애틋한 아이들의 사진 등 즉물적인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 내는 사진이나 그에 덧붙여 놓은 글들은 이 책에서는 만날 수 없다. 그보다는 평생 사진의 길을 걸어 오며 저자가 느꼈던 고민 거리들과 단상들, 그리고 그에 대한 사진적 사유를 만나볼 생각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덧. 책을 읽기 전에 최소한의 사진사적 지식이나 유명한 작가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들이라면 책에 대한 이해와 흡수가 더 빠를 것 같다. 작가 자신이 사진을 전공한 사진 평론가이자 사진가이다 보니 약간은 전문적인 지식들에 바탕한 이야기들이 조금 나오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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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할레드 호세이니 (현대문학,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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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9월의 어느 날 밤. 난 부산에서 제주도로 향하는 여객선의 3등 선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들어간 식당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신문의 1면을 가득 채운 불타는 빌딩 사진이었다. "응? 무슨 엄청난 영화길래 1면에 광고를 하지?"라는 것이 내 머릿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 생각과 함께 자리에 앉아 TV를 틀었을 때, 난 내 눈과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TV 화면을 가득 채운 무너지는 빌딩의 모습. Breaking News라는 외국 방송사의 화면과 함께 끊임 없이 쏟아지는 아나운서의 멘트. 아......그냥 눈물이 났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마 TV를 보지 못했다면 그저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일 줄 알았던 것들이 화면 가득히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9.11이었다. 2001년의 그날 이후로 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말들은 우리 삶을 구속하는 어떤 가치의 하나로 자리 매김했으며 온 세계가 그 단어에 매여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사실 그 끔찍한 테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들 대다수는 아프가니스탄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아니 실존하기는 하는 나라인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탈레반은 무엇이며 오사마 빈 라덴이 누구인지도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9.11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었으며 이제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 대해 쏟아지는 기사들, 특히 죽음과 테러, 전쟁에 관한 기사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아수라한 전쟁 통에, 탈레반의 통치 중에, 여성이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가 겪은 이야기는 결코 소설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두 여자들이 겪은 한 편의 다큐 연대기를 보는 것 같았다."

 전작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로 이름을 알린 할레드 호세이니의 두번째 소설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A thousand splendid Suns)>은 바로 그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작가가 아프가니스탄의 여인들에 관해 쓴 소설이다. 호세이니는 9.11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알지 못했을 아프간의 역사와 현재가 간직한 슬픔들을 두 여인의 지난한 삶을 통해 매우 극명하게 보여 준다. 책을 처음 읽게 된 계기는 한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다. 친구는 여자라면 - 그런데 난 여자가 아니다. - 한 번쯤 읽어 봐야 할 소설이라며 내게 이 책을 추천해 주었다.

 하지만 처음 100여 페이지를 읽은 후에 난 이 책을 잊고 있었다. 다른 일 거리와 읽을 책들이 많기도 했거니와 초반 전개가 지루해서 진도가 쉽게 나아가질 않았다. 한동안 잊고 있던 이 책을 다시 집어든 건 얼마 전이었다. 그런 다음 처음부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책을 내려 놓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3일 동안 일을 마친 후에는 이 책을 붙들고 있었고, 자기 전까지 계속 읽었다. 역자의 말처럼 책의 초반이 지루하긴 했지만 인물들의 연이 엮여 가는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흥미를 더해 가며 날 붙들어 놓았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현대사다"라는 것이었다. 소련의 침공, 군벌들간의 전쟁, 잠깐 찾아온 것 같았던 평화, 폭력으로 사람들을 억누르던 탈레반의 통치, 다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또 다시 찾아온 것 같이 보이는 평화. 여러 매체의 기사를 통해 조금씩 알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가 이 소설 속에는 녹아 있었다. 그리고 그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두 명의 여자 주인공들이 겪는 이야기는 결코 작가의 상상 속에서 떠오른 것이 아니었다. 아수라한 전쟁 통에, 탈레반의 통치 중에, 여성이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가 겪은 이야기는 결코 소설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두 여자들이 겪은 한 편의 다큐 연대기를 보는 것 같았다.

"라일라는 그것이 아프가니스탄에 돈을 주겠다던 원조가 오지 않고, 재건축이 너무 천천히 진행되고,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고, 탈레반이 다시 결집하여 돌아와 복수를 할 것이고, 세계는 다시 한 번 아프가니스탄을 잊을 것이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답변이라는 걸 안다." (561p)

 제 1부. 마리암. 부잣집 남자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낸 그녀. 그녀가 그토록 존경하고 믿어 마지 않던 아버지 잘릴은 그녀를 철저하게 버렸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을 견뎌 내면서, 목을 매고 죽어 버린 어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처음엔 잠깐 행복할 것만 같았던 라시드와의 결혼 생활도, 그녀가 아들을 안겨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다시 불행 속으로 빠져 든다. 제 2부. 라일라. 여자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딸을 열심히 가르치는 아버지. 전쟁에 나가 죽은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반쯤은 실성한 어머니. 하지만 그 내전의 와중에서도 연인 타리크와 라일라의 사랑은 깊어만 간다. 그리고 결국 새로운 세계를 찾아 온 가족이 떠나기로 결심한 바로 그날. 그녀의 인생은 로켓탄 한 발로 송두리째 뒤바뀐다.
 
 제 3부. 마리암과 라일라. 라시드의 교묘한 술책에 빠져, 아니 어쩌면 라일라 자신의 살아 남고자 하는 의지로 두 여인의 삶은 함께 엮여 가기 시작한다. 결국 그 혼란의 와중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가는 여인들뿐이었을까? 처음엔 으르렁대던 마리암과 라일라는 결국 서로에게 둘도 없이 의지하게 되며 함께 전쟁 통의 역경을, 탈레반 치하의 고통을 헤쳐 나간다. 그리고 라일라의 연인 타리크가 돌아온 그 날, 두 여인은 그 간의 역경을 오직 자신들의 의지로 마무리한다. 제 4부. 다시 라일라. 전쟁이 끝나고 탈레반은 물러가고 언뜻 보기에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아 보이는 카불. 이국에서의 평안한 삶을 마감하고 다시 고국의 소용돌이 속으로 돌아온 라일라. 여전히 혼란스러운 고국이지만 그녀가 수많은 전쟁의 세월을 견뎌 내고 역경을 헤쳐 왔던 이 땅은 결국 그녀가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곳이기도 했다.

"요셉은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헛간은 장미꽃밭으로 바뀔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살아 있는 모든 걸 집어 삼키려고 홍수가 닥치면
노아가 태풍의 눈 속에서 너희들을 안내할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561p)


 사실 라일라가 그 혼란 속의 아프간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기도 하고 안쓰러웠다. 아마 그게 모국에 대한 애국심이며 모국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회귀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일라가 카불로 돌아간 2003년으로부터 5년이 지난 2008년 현재까지 아프간에서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테러를 이번에는 종식 시키겠다며 열을 올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학교에 가는 여학생에게 여자가 학교에 간다는 이유로 염산 테러를 가한 탈레반에 대한 기사가 들려 왔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자살 폭탄 테러는 이제 더 이상 신문의 구석자리라도 차지할만한 기삿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 평화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그곳에서 라일라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사실 난 자신이 없다. 예전엔 라일라와 같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이면 언젠가는 그 힘들이 결국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역사는 그렇게 변해 가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의 현실은 우리들에게 그런 작은 상상마저 불허해 버리고 만다. 어쩌면 이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을 볼 수 없는 곳으로 변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다시 한 번 상상해 본다. 라일라가 정착한 그 곳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고 모든 사람들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삶을 살아가는 모습. 전쟁과 테러, 폭력과 죽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둘러 안은 슬픔이 그 곳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언젠가는 꼭 그렇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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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eamLog Blue2Sky에 쓴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장미 비파 레몬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에쿠니 가오리 (소담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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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쿠니 가오리. 유명하다. 일본의 3대 여류 작가 중 한명이며 우리나에서도 인기가 좋다. 나도 그녀의 팬이다. 번역되어 나온 그녀의 책은 빼 놓지 않고 다 읽었다. 그녀가 우리나라에서 뜬 계기는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이 때로는 그녀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최신 번역작인 <장미 비파 레몬>의 띠지가 그녀를 아직도 <냉정과 열정 사이 (이후 냉열)>의 작가로 소개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 작품에 경도 되어 있는 것도 같다. <냉열>도 좋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모든 것을 보여 준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에쿠니 가오리는 일상에 대한 세세한 묘사, 참으로 다양한 사랑과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힘이 탁월한데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냉열>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냉열>은 Blu와 Rosso의 시너지 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등의 단편집과 <낙하하는 저녁><반짝반짝 빛나는>, <호텔 선인장> 등이 그녀만의 풍부한 감성이 담긴, 에쿠니 가오리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번 책 <장미 비파 레몬>은 그녀의 느낌이 아주 물씬 배어 나는 책이다. 9명의 여자들과 그들의 남편 혹은 남자 친구들이 얽히고 설켜 있는 이야기는 복잡할 것 같으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모든 것이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흘러간다.

"음악은 치유 효과가 있고 담소에 방해되지 않는 엔야를 선택했다." (53p)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사랑하는 방식 (혹은 살아가는 방식)은 어찌 보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이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냥 즐기는 불륜이거나 아니면 정 때문에? 저런 만남들도 어찌 보면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어떤 정해진 틀의 답변을 구하고자 하면 쉽지 않다. 그저 단지 이런 모습도 있구나라고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분명히 어디의 누군가는 작품 속의 도우코와 동질감을 느낄지도 모르며, 또 누군가는 에미코에게 감정 이입할 수도 있다. 아니면 또 다른 누구는 야마기시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숨 쉬며 살아 가고 있는 이 세상이란, 사실 이 소설 속과 다를 바가 없을테니까. 소설이니까 조금쯤은 과장이며 비현실적이겠지라는 생각은 버리자. 이 세상 최고의 소설과 이야기는 바로 현실 세계이며 모든 소설 작품은 바로 그 현실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도우코, 소우코, 레이코, 에미코, 마리에, 미치코, 에리, 아야, 사쿠라코. 그리고 미즈누마, 야마기시, 츠치야, 곤도. 이렇게 많은 등장 인물들이 나오지만 책의 줄거리에 대한 요약은 따로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줄거리가 단순해서가 아니라 주인공들의 관계를 미리 안다고 해서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단지 초반에 일견 복잡해 보이던 주인공들의 관계는 중반으로 흘러가다 보면 자연스레 머리 속에 그려지게 된다. 거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각 인물들의 에피소드 호흡이 가빠지면서 책을 읽는 독자도 그 가쁜 호흡에 따라 책의 엔딩으로 치닫게 된다.

 엔딩은 요즘 흔히 듣는 말로 하자면 열린 결말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흐름에서 소설도 끝이 난다. 누군가의 불륜의 결말은 어땠을지, 마음 속의 연인을 잊지 못하고 결혼을 택한 누군가의 후는 어떠했을지 혹은 새로운 불륜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누군가의 뒷 이야기는 어떨지도 궁금하지 않다. 그저 책이 처음부터 독자에게 보여 주었던 그런 흐름으로 등장 인물들의 삶도 계속 흘러 가겠지라는 아련한 상상만 든다.

"컴퓨터. 카세트테이프. 메모지 몇 장. 사전. 책상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아직 정리하지 못한 파일 몇 개. 누가 여행을 다녀오면서 사다 준 쿠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받아놓고서 며칠이나 그대로 내버려둔 캔디 바. 파란색 클립. 만년필. 지구 모양 서진. 수정액. 비타민C 정제. IYOU라고 쓰여 있는 머그잔에 절반쯤 남은 채 식어버린 커피. 액자에 넣지 않고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은 사진 두 장(한 장은 작년 홈 파티 때 찍은 시끌벅적한 사진, 다른 한 장은 웨딩 드레스를 입은 도우코와 교회에서 찍은 사진)." (83p)

 더불어 이 책이 마음에 들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바로 김난주씨의 번역이라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번역 되어 나온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크게 김난주씨와 신유희씨가 번역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에는 거의 김난주씨가 번역을 했는데 언젠가부터 신유희씨의 번역작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최근에는 김난주씨의 번역작이 더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사실 두 역자가 같은 작품을 번역한 것이 아니기에 함께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게는 김난주씨의 번역이 조금 더 에쿠니 가오리의 느낌이 아닌가라고 와 닿는다.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닌데다가 원작을 읽어 보지도 않았기에 신유희씨의 번역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번역이라는 것은 단순한 직역이 아닌 또 하나의 창작 과정이라고 난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 김난주씨의 역이 내 마음에 훨씬 더 와 닿는 것 뿐이다.
 
 사실 바로 직전에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에 많이 실망을 했던 터에 이 작품은 달리 기대를 하진 않았다. 책이 나온 줄도 몰랐었고 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충동적으로 산 것이다. 그런데 이번 충동 구매는 아주 200% 만족이다. 정말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 식 감성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에쿠니 가오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올 겨울, 이 책 한 권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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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굿' 바이. 2008.

 좋은 영화는 화룡정점, 즉 잘 짜여진 전개 과정을 거쳐 완벽한 클라이맥스로 정점을 찍음으로써 탄생할 수 있다. 또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한 것처럼, 이야기(구슬)들을 잘 꿰어서 좋은 영화(보배)를 탄생 시킬 수도 있다. 일본 영화 <굿' 바이(Good & Bye)>는 바로 후자에 속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는 30대 주인공의 성장과 자아 찾기,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 얽혀진 운명과 인연 등이 적당히 버무려져 있다. 그래서 딱히 30대의 성장 영화라 하기도 뭐하고, 따뜻한 가족 영화라 정의 내리기도 힘들지만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무언가가 이 영화에는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아우름을 통해서 영화는 자신의 이야기를 무리 없이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고바야시(주인공)는 그럭저럭한 재능의 첼리스트이기에 음악적으로 대성한 것도 아니며 엎친 데 덥친 격으로 힘들게 들어간 오케스트라는 해체 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귀향 - 어쩌면 낙향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겠다. - 한 그가 선택한 직업은 여행사인 줄 착각하고 찾아간 에이전트에서의 염습사이다. 사실 주인공은 이 일이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일 자체에 대한 귀천 의식은 크게 없었던 것 같다. 단지 그에게는 돈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랬던 그가 계속 일을 하는 와중에 사장님의 염습에 대한 태도, -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사장은 일종의 통달한 도인의 모습이다. - 염을 마친 후에 사자의 가족들이 보여 주는 모습 등을 보면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을 얻어 간다. 영화의 첫 장면(이자 중간의 이음 장면)에서 눈보라 휘날리는 시골길을 운전해 가면서 "고단한 나날들이었다."라고 되뇌이는 주인공의 독백은 바로 지난 시간을 겪으면서 성장한 주인공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실 염습사(전문 납관사)라는 직업이 일본에 실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 뇌리 속에 남아 있는 염의 기억이라면 외할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영등포 구석에 있던 한 병원의 지하실에서 이루어졌던 딱 한 번 뿐이다. 차가운 철제 침대와 축축한 지하실의 공기가 우리를 둘러 싸고 있었고, 염을 하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 이상이라는 경의는 보여 주지 않았다. 아마 일본에 실제로 이런 직업이 있다면 그 모습은 마지막에 주인공의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왔던 사람들의 모습 - 염이나 시신 수습을 단지 귀찮고 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로 치부해 버리는 - 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다르다. 고바야시(주인공)와 사장이 염을 할 때 경의를 표하는 자세와 그들의 정갈한 태도, 그리고 조심스러운 마음 등이 돌아 가신 분의 마지막을 지켜 주는 일로써의 염의 숭고함을 보여 준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 일에 부담 없이 다가설 수 있으며, 때로는 정점에 달한 염의 과정이 아름답게까지 비춰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주인공의 친구(목욕탕집 할머니의 아들)와 부인(히로스에 료코)이 주인공을 이해하고 쌓여 있던 갈등을 해소하는 밑바탕이 된다. 물론 돌아 가신 친구의 어머니를 주인공이 직접 모신다는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화해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전까지 염습이라는 일에 대한 영화의 아름다운 - 혹은 고결한 - 표현이 없었다면 이는 조금 뜬금 없는 화해가 됐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영화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바로 영화의 엔딩이었다. 주인공 평생의 트라우마였던 집 나간 아버지에 대한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엔딩 장면은 아주 시의적절하며 적당했다. 더 과하게 나아가지도 않았고, 덜 나아가지도 않았다. 딱 거기까지였으며 그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특히 아버지가 남긴 편지가 배 속의 아기에게 전달되는 장면은 참 감동적이다. (더 자세히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테니 여기까지만 하자.)
 
 눈 쌓인 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골 마을의 풍광, 그 풍광을 등지고 이뤄지는 주인공의 첼로 연주 장면은 이 영화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요인이다. 더불어 죽은 문어 이야기,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 등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는 작은 에피소드들은 큰 구슬들 사이를 이어 주는 작은 구슬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 주었다.

 <굿' 바이(Good & Bye)>는 인터넷의 높은 평점이 아깝지 않은, 올 가을 당신의 가슴이 따뜻해질 것이라는 홍보 문구가 무색하지 않은 2008년의 수작이다. 아마 그리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동안 2008년 하면 떠오를,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이 될 것이다.

 - 인상 깊었던 대사 : 화장장 일을 하시는 할아버지가 하는 대사, "죽음은 문이다." 즉, 죽음은 막다를 골목이 아니라 단지 누구나가 열고 통과해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라고 할까. 죽을을 끝이 아닌 인생 과정의 하나로 보는 그 표현이 참 좋았다.

 - 인상 깊었던 장면 : 부패한 시신을 수습하는 첫 일을 마치고 돌아 온 고바야시가 날고기를 보고 헛구역질을 하다가 부인을 탐하려 하는 장면. 아마 그가 부인을 탐하려 했던 것은 스스로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서였을 것 같다. 살아 있음에 대한 갈구 같은 것이다. 어쩌면 주인공은 섹스를 통해 그것을 느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덧. 주인공의 부인 역할을 맡았던 료코는 조금씩 얼굴에 주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녀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수는 없는가 보다. 조금 안타깝기도 하고, 그래도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면서 나이가 들어가는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하다. 연기도 좋았다. 너무 이해심이 많다고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주인공의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으니까 마음에 든다.

 덧 2. 최근에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극장에서 일어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 장면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복잡하게 영화의 장면들이나 엔딩 후의 이야기들을 담지 않고 단지 검은 색 배경에 주인공이 정갈하게 염을 하는 장면만을 담아 놓았다. 여유 있으시면 (이 대사,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김광석이 떠오른다.) 끝까지 남아서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보시기를. 음악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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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fe

아내가 결혼했다, 2008

 아내가 결혼했단다. 여자 친구가 아닌 아내가 결혼했단다. 손예진과 김주혁의 행복한 한때를 담은 영화 포스터는 이 영화, 제법 괜찮은 로맨스물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었다는 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알았고, 예고편도 보질 않았기에 영화에 대해 내가 짐작할 수 있었던 건 한 장의 포스터가 다였으니까. 심지어 한 친구는 영화 초반에 손예진이 축구를 좋아하는 걸 보고 "아내가 축구랑 결혼한" 스토리인 줄 알았단다.

 하지만 이 영화는 포스터만치 행복한 영화도, 즐거운 영화도 아니었다. 어쩌면 포스터는 눈속임일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내던지는 질문은 꽤나 진지하며 한없이 밝아 보이기만 하는 손예진의 아우라로도 그 질문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때로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불편할 정도로 힘들기도 했었다.

 영화가 내던지는 질문은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일처 다부, 일부 다처 같은 문제는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의 질문 해석이라면 이 영화는 단지 내 아내의 바람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내가 보기에 영화의 핵심은 결혼이라는 일부 일처의 제도하에서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일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단지 아내가 자유롭게 바람 피우는(??) 것을 보며 별 일 하지 못하는 남편을 보고 남자들이 짜증이 난다거나 혹은 반대로 그동안 남편들의 바람에 억눌려 있던 여자들이 자유 연애(이걸 과연 자유 연애라고 표현해야 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를 앞장서 실천하는 손예진을 보고 신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손예진과 김주혁 둘 다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김주혁을 사랑하고 김주혁과 결혼했으면서도 또 다른 사람도 "함께" 사랑하며 결혼하겠다는 손예진. 그리고 결국엔 아내의 그런 사랑을 "이해" (혹은 체념) 해 주는 남편 김주혁. 뭐랄까, 진짜 한 마디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결국엔 그런 결혼을 감행하고 마는 손예진이 미웠으며 그래도 아랑곳 없이 행복해 보이는 손예진이 미웠다. 오히려 김주혁은 안쓰러웠다. 그런데 영화의 종반으로 갈수록 꼭 손예진을 미워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김주혁이 (거의 마지막까지) 아내와의 그런 삶을 유지하는 것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자는 영화를 보고 손예진이니까 김주혁이 그 삶을 유지했을 거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김주혁의 마음은 단지 내 아내가 너무나 이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이기에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서까지도 포기할 수 없다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새로운 남편과 있으면 자신의 반쪽을 만난 것 같은, 내가 가득 채워지는 것 같다는 손예진.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삶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남편과 그 사람 모두와 함께할 때 행복할 것이라는 이 여자를 무작정 미워할 수 만은 없는 것은 김주혁이 바로 이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주혁의 선택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아내가 남편에게 내어 준 과제(이 부분까지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겠다.)는 끝까지 이 영화가 자기 중심을 지키게 만들었다. 적당한 해피 엔딩이나 어정쩡한 엔딩이 아닌 자신이 내 던진 질문에 대한 일관성을 지켜 냈으니까. 즐겁고 행복한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결코 많이 보지 않았던 2008년의 한국 영화 중에 추천할만한 수작~!

덧. 물론 난 손예진이 될 마음도, 김주혁이 될 마음도 없다. 내게 있어서 사랑이란 단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며 변치 않는 마음이다. 짧지 않은 세월 겪어 온 시간의 경험은 내게 그 사실을 더 확신 시켜 주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물론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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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qeem.tistory.com BlogIcon Qeem 2008.10.31 10:4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흐음...극장에는 저 말고 몇 명의 여자관객분들이 계셨죠..
    그들은 때론 환호를 내지르고 윽박을 지르기도 하면서 미쳤다라고들 말하더라고요..
    그 중에 저 혼자 흐음...하고 웃으니 옆에 친구가 오빠랑 같은 미친인간들이 있긴해...이러더군요...
    하하 하긴 미친다는 기준은 주관적인건가봅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10.31 13:2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확실히 대다수의 남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
      분개(??)할 것 같긴 해요.

      결국 자기 주관이라는 거겠죠.

  2. Favicon of http://qeem.tistory.com BlogIcon Qeem 2008.10.31 23:4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분개는 안할걸요?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 단지 주인아라는 인물로 승화된 것이겠죠..
    흠흠...어쨌든 저는 유교적인 관념이 저희를 알게 모르게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걸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역시 자기 주관이라는 거겠죠.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11.02 10:4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음, 저는 주인아가 어떤 로망 속의 인물이라고 느끼지는 못했었는데.
      축구도 좋아하고, 섹스도 잘하고, 귀엽고 이쁜데다가 능력 있는 (게다가 남자를 잘 이해해 주는) 그런 여자가 로망이 되는 건가요?
      남자들의 그런 약점을 노린 것이라면
      이 영화의 원작자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안전막을 설치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제가 사실 이 부분은 소설을 읽어 보질 않아서 확실하게는 말 못하겠네요.

  3. Favicon of http://subright.tistory.com BlogIcon chul2 2008.11.02 01:5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영화의 초중반에야 정말 속이 터졌죠. 하지만 저 세명의 행동이나 말이 전부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뒤에는 조금은 응원해주고 싶기도 할 정도로 이해가 되더군요. 제가 생각해도 엔딩은 그 상황에서 최선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11.02 10:4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예, 저도 엔딩이 마음에 들었어요.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보고 나왔는데
      스페인의 그 분위기에
      손예진씨의 파마 머리는 정말 딱이더군요. :)

  4. Favicon of http://piedra.tistory.com BlogIcon Conforte 2008.11.02 09:1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영화를 안보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기 그렇네요.
    그렇지만 원 이건...

    사람이 제 하고 싶은 데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을 죽여도 다 헐 말이 있데잖아요.
    마누라가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는 걸 이해는 할 수 있는데...
    거럼 안되잖아요. 것두 모릅니까?

    결혼 제도는 간음을 막는 가장 좋은 제도입니다.
    결혼 서약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지요?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는 안 무너집니까?
    애들처럼 왜들 그러십니까!

    난 보수 꼴통은 아닌데(긴가?)
    머리 대고 고민할 걸 고민해야지...
    이건 무조건 욕하고 말려야하는 문제지. 안그래요!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11.02 10:4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저는 그냥 결혼이라는 제도를 떠나서
      누군가가 단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만 받아 들였어요.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다면 사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보호막 이런 것도 아니고
      형식의 하나일 뿐이죠.

  5. conforte 2008.11.04 04:2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사람이란 존재가
    평생 한 사람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이니깐
    보호막이 필요한 거라 생각합니다.

  6. Favicon of http://jjinojjino.tistory.com BlogIcon 들불처럼 2009.04.14 14:4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포스트 잘 봤습니다.
    한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도 주요한 주제였다는 리뷰 저랑 비슷하게 보신 것 같아 반갑네요.
    트랙백 걸고 갑니다~

 에쿠니 가오리. 한 때는 이 작가에게 푹 빠져 있던 적이 있었다. 그녀의 신작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바로바로 주문을 하고 한동안 또 그 책에 빠져 살곤 했다. 은사자의 전설이 인상적인 <반짝반짝 빛나는>, 오이와 모자, 그리고 2의 이야기 <호텔 선인장>, 다양한 감성의 단편들로 가득한 <울 준비는 되어 있다> 등등 독특한 시선의 장, 단편들은 완전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렇게 그녀에게 빠져 있기를 한동안, 간간이 나오는 신작들만 살펴 보기 시작하다가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의 새 작품을 들었다. (사실 신작은 아니고 출간된 지 1년도 넘은 책이지만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다.) "마미야 형제? 무슨 카메라 형제쯤 되나?"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든 생각이었다. 카메라 브랜드가 사람 이름으로 쓰일리야 없겠지만 내가 아는 마미야는 중형 카메라 브랜드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마미야는 間官이었다. 무엇을 뜻하려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작품은 그간 내가 좋아했던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들에 미치지 못 했다. 그녀는 독특한 감성으로 인간 관계를 묘사한다던지 (<반짝반짝 빛나는>, <호텔 선인장>) 아니면 일상을 매우 차분하면서도 공감 가게 풀어 가는 (<낙하하는 저녁>)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녀의 이러한 장기들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별 볼 것 없는, 아니 그보다 못해 어찌 보면 한심하기까지 한 두 형제의 이야기. 책 속의 표현을 빌자면 마미야 형제는 "양치도, 샴푸도 게을리 하는 법이 없고, 심성도 고왔으나 실제로 그들과 면식이 있는 여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볼품 없는, 어찐지 기분 나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너저분한, 도대체 그 나이에 형제 둘이서만 사는 것도 이상하고, 몇 푼 아끼자고 매번 슈퍼마켓 저녁 할인을 기다렸다가 장을 보는, 애당초 범주 밖의, 있을 수 없는,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절대 연애 관계로는 발전할 수 없는'" 남자들이었다. 쿠즈하라 선생이 처음 형제의 집에 초대 받아 왔을 때, 테츠노부(동생)의 뒤에 나타난 아키노부(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최악이다"라고 생각했던 건 앞의 묘사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에쿠니 가오리는 남들이 판단하는 형제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며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려고 했다. 이 두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지나고 보면 즐거웠다고 느껴지는, 가슴 한 켠을 작게 차지하고 있는 즐거운 추억 같은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던 그 시간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돌이켜 보면 분명히 즐거웠던 것이다. 나오미와 쿠즈하라 선생이 형제의 두 번째 초대를 받아들인 것도 형제와의 시간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형제는 한 눈에 사람들을 매료 시키는 매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있어 보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오오가키와 미요코가 아키노부와 함께 편히 어울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을 것이고 유미가 테츠노부의 학교로 찾아 갔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이는 작가가 독자들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보지 못한다고 느껴지는 형제의 다른 모습을 보여 주며)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삶도 있다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지만 스스로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런 모습도 있다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야기가 아마 그쯤에서 끝났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테츠노부의 행동 - (형의 회사 동료의 부인이자 바람 난 남편 문제로 힘들어 하고 있는) 오오가키 사오리를 (혼자서만) 좋아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 모습은 최악이었다. 도저히 공감하려 해도 공감할 수가 없다. 그건 정말로 덜 큰, 도저히 생각을 어떻게 하고 사는 건지 알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나마 아키노부는 좀 나았다. 나오미한테 고백하고 차일지언정, 혼자만 상상 속의 연인을 만들지언정 적어도 상대를 힘들게 하지는 않으니까.

 아, 그래도 좋아하는 가오리의 작품이라 좋은 얘기를 해 볼까 했는데 쓰다 보니까 바보 같은 동생 녀석 때문에 화가 나 버렸다. 나, 참...... 어쨌든 여전히 난 가오리의 팬이다. 앞으로 또 그녀의 책이 번역 되어 나오면 언젠가는 사서 읽어볼 테니까.

덧. 이번 책은 신유희씨가 번역을 했다. 그동안 소담에서 번역, 출간된 에쿠니 가오리의 책들은 거의 김난주 씨가 번역했고 일부만 신유희씨가 번역을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신유희씨의 번역 횟수가 더 잦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김난주씨의 번역이 더 마음에 드는데 이게 서로 다른 책이라도 뭔가 차이가 느껴진다. 확실히 번역도 문학적 작업의 하나란 생각이 들어서 원작과 제대로 교감을 한 후에야 이루어지는 번역이 더 그 맛을 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신유희씨의 번역에서 비문이라든가 어색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뭔가 미묘한 부분이 부족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들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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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연애소설>, 2002

 "난 사랑에 빠졌어요. 어쩌면 좋죠? 너무 아파요.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요"
- 영화 속에 나오는 <일 포스티노>의 대사 中

 어찌 보면 별 느낌 없는 제목에 불치병에 걸린 여자 주인공이라는 흔한 줄거리로 보일 수도 있는 영화 <연애 소설>. 하지만 이 영화는 첫 느낌처럼 그런 식상함에 머물지 않는 영화다. 주인공의 불치병은 영화 전면에 드러나 눈물을 자아내는 소재가 아니며 - 간간이 복선이 보이긴 하지만 지환이(차태현)가 고등학교에 찾아가기 전까진 아프다는 것조차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 게다가 불치병에 걸린 여자 주인공은 하나가 아닌 둘이다.

 남자 주인공 한 명에 여자 주인공 둘이라. 이쯤 되면 또 한 번 나올법한 멜로 영화의 공식은 바로 삼각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연애 소설>은 삼각 관계의 통념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지환이, 수인이(손예진), 경희(故 이은주) 세 사람의 관계는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를 사랑하지 않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아껴 주고 사랑하는 관계이다. "사랑하는 내 친구 지환, 사랑하는 내 친구 경희"에게 불러 주는 수인이의 노래(들국화의 "내가 찾는 아이")는 바로 이들의 그러한 관계 맺음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지환이는 경희를 좋아하게 되었고, 경희 또한 지환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인이 또한 그걸 알고 있지만 그러한 사실이 이들의 관계 맺음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쪽지와 편지를 통해 이야기 하는 지환이와 수인이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 혹은 알고 있는 - 경희에 대한 감정이 서로를 아끼는 세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경희가 조금 힘들어 하긴 했지만 이는 수인이의 죽음에다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도 알지 못했던 경희 자신 때문이었다.

 <연애 소설>에서는 흑백 사진이 주인공들의 관계 맺기와 기억을 되살리는 소재로 중요하게 이용된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날 지환의 집으로 날아 온 한 통의 편지. 발신인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은 편지 속에 들어 있던 한 장의 사진은 "나도 뽀뽀하고 싶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귀여운 아이들의 흑백 사진이었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서 온 사진 한 장을 보며 어렴풋한 옛 기억을 떠올리는 지환. 그리고 지환이가 오랜만에 선배의 가게를 찾아 갔을 때 Ilford 박스에 담겨 있던 지환이의 사진들 중에 제일 위에 있던 것은 바로 수인이와 경희의 흑백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 한장이 지환이가 다시 경희와 수인이를 찾아 가는 매개체가 된다. 영화는 이후 수인이와 경희가 존재하지 않는 현재와 세 사람이 함께 했던 과거의 시간을 교차 시켜 관객들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관객들은 영화가 보여 주는 그 시간을 따라 가며 세 사람이 함께 했던 시간은 어떠했는지 수인이와 경희의 이름에 숨겨져 있던 작은 비밀은 무엇이었는지를 하나 하나 알아 가게 된다.
 
 그렇게 흘러 가던 시간이 정점에 달하는 것은 바로 지환이와 경희가 다시 만나는 장면이다. 많이 돌아 왔지만, 결국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으로 떨어져 있던 시간의 간극을 메우기 시작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래. 점이 이 쪽에 있었구나. 항상 헷갈렸었는데..."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장점은 둘의 만남으로 모든 것이 정점에 달했다고 느낀 그 이후의 시간을 차분히 보여 주는 것이다. 다시 만난 지환이와 경희가 함께 보내는 시간들. 그리고 경희가 떠나는 모습까지...... 단순히 둘의 만남으로 해피 엔딩을 맞이하기 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이면서도 더 가슴에 남는 결말이다.

 <연애 소설>. 몇 년만에 다시 꺼내 본 영화이지만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전혀 퇴색 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해 주는 것. 자고로 잘 만들어진 영화의 힘이란 그런 것이리라.

덧. 이 영화를 얘기하면 남자와 여자 관객 사이 간에 항상 나오는 얘기가 있었다. 바로 두 여자 주인공 중에 누가 더 매력적이었나 하는 것. 여기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경희(이은주)를 택하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수인이(손예진)를 택했다. 이때 여자들이 궁금해 하는 점은 아주 여성스럽고 외모로 보았을 때도 더 낫다고 보여지는, 쉽게 남성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할만한 캐릭터인 수인이가 왜 더 인기가 없나 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았을 때, 이은주라는 배우는 (물론 아름답기도 하지만) 단순히 외모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어떤 매력이 있었다. - 난 꽤 그녀의 팬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녀의 기일이면 맥주를 홀짝거리며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를 보곤 한다. - 묘한 미소와 그 묘함을 더해 주는 얼굴의 작은 점 하나. <연애 소설>에서의 캐릭터는 약간은 왈가닥이라 남성들의 환상 속 이미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녀라는 한 배우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그러한 매력까지 숨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러한 점 때문에 남자들이 이은주를 택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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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ninabrisa.tistory.com BlogIcon 니나브리사 2008.11.25 20:2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 이 영화 정말 좋아하는데....

 이 책은 한 여성 저널리스트가 548일간 겪은 남자들의 세계를 정리한 책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 세계를 여성이라는 이방인이 아니라 한명의 남성(실은 남장한 여자)으로서 체험하였다. 남자들의 사랑, 우정, 성욕 그리고 자아 찾기. 작가는 이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았다. 이는 남자의 시선도, 여자의 시선도 아닌 제 3의 시선, 즉 남자들 세계에 뛰어든 가짜 남자의 시선이다. 그리고 그 눈은 (볼링 클럽이나 남성들 모임 같이 미국과 우리 나라와의 몇몇 문화적 차이를 제외하면) 내가 남자로 살면서 평소에 발견하거나 눈치채지 못했던, 혹은 알면서도 구체적으로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해 주었다.

 남자들 사이의 우정에서 그녀가 여성의 시선으로 찾아낸 점은 바로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암묵적 질서이다. 겉으로는 친해 보이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확실히 그어져 있는 남자들 사이 인간 관계의 안전 거리이다. 또 그렇게 거리를 지키면서도 그 안에는 서로를 보듬어 주는 따스함이 있다. 저자가 (미국) 남자들 사교 클럽의 대표 모임이라 할 수 있는 볼링 클럽에 들어가서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보자. 처음에는 서로가 다치지 않게 조금씩 격려해 주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내에서 교제가 이루어진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허물 없이 지내게 될수록 이러한 영역은 점점 줄어들지만 여전히 최후의 보루만은 침범하지 않는다.

 얼마 전, 새로 사귀게 된 한 그룹에서 농구 시합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세 시간이 넘게 시합을 하면서 작가가 겪었던 느낌들을 나도 똑같이 겪게 되었다. 아, 이런 시작이었구나. 돌이켜 보면 그동안 내가 새로이 관계 맺었던 그룹에서는 모두 이와 비슷한 과정들을 겪어 왔다. 단지 난 저자처럼 객관적인 시각에서 내가 속한 그룹의 행동 양식을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노라(작가)는 볼링 팀의 일원이기 전에 그 세계를 파헤치러 들어온 저널리스트였기 때문에 좀 더 날카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남자들의 세계는 우정을 벗어난 다른 주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강해 보여야 하지만, 내적으로는 약한 남자들이 일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고 상처 받기도 하는 과정은 그들이 일이 아닌 다른 모임에서 관계 맺는 과정과 비슷하다. 저자가 큰 영역들을 구분해 놓았지만 사실 위 주제들은 하나로 따로 떼어질 수 없는, 모두 서로 얽혀 있는 것들이다.

 때로 몇몇 문장이나 생각들은 작은 탄성을 자아내며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아마 남자들 세계로의 잠입 생활이 끝난 후,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해 병원 치료까지 받아야 했던 저자의 노력이 그런 공감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새로운,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눈치채지 못했던 남자들의 세계를 남자들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은 준다. 그러므로 혹시 자신이 지금 속해 있고 자신의 일상을 지배하는 그 세계가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보면 좋을 듯 하다.

덧. 한 가지, 이 책에서 다루는 남자들의 세계는 꽤 폭 넓은 범위에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더 좁은 집단의, 더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남자들의 세계는 또 이 책과는 조금 다른 행동 양식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최후의 보루조차 사라질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 부분은 저자가 최후의 관계까지 가기 전에 자신이 실은 여자임을 밝혔거나 관계를 끊었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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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릿하다. 그 어떤 것도 확실해 보이는 것은 없다. 명확한 형태는 보이지 않고 희미한 윤곽만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 언뜻 본다면 잘못 인화된 사진쯤으로 보일 법도 하겠다.

 민병헌의 <SNOWLAND>를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흐릿함이 작품을 감상할수록 내 마음 속에서 명확해져 간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눈에 보이는 뚜렷함이 아니다. 저 멀리 눈 덮인 언덕 너머로 희뿌옇게 보이는 나무의 끝자락에서,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조차 힘든 사진 속 풍경 저 너머에서 혹은 화면 가득 메운 검은 숲을 배경으로 희뿌옇게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어떤 명징함이 전해진다. 뚜렷한 건 없는데 뚜렷하다. 아니 사실 뚜렷한 것이 없다는 건 단지 시야가 뿌옇다는 이유로 내린 나의 편견일 수도 있다. 민병헌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있는 그대로라는 것, 곧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은 그것이 명백한 것이라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존재는 명백함을 담보로 한다.

SL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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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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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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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OWLAND>를 감상하다 보면 작가의 고집이 느껴진다. 오직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만 천착한 작가의 옹골찬 고집 말이다. 다른 이의 시선과 타협하지 않는,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의지가 이 사진집에는 담겨 있다. 자신에 대한 평론이나 일체의 사진 외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민병헌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보면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러한 고집은 당연한 것 같다.

 민병헌은 사진 전공자가 아니다. 몇몇 사진가에게 사사 받았다고는 하지만 무협지로 보자면 변변한 뿌리가 없는 사파에 속할 것이다. 한국 사진계에서 이러한 그의 배경은 그가 더 자신만의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까닭이 되기도 한다. 평론가 박영택의 표현처럼 민병헌이 돌올 할 수 있었던 힘은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고집과 기존의 것 – 제도권 내의 사진 시류 - 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방향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사진 제도권 밖에서 사진가로서 성장한 것은 이러한 시류에 얽히지 않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SL027

SL027

SL106

SL106

 “을지로 재개발 지구”, “별거 아닌 풍경” 등의 초기 연작에서 민병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이 시기 그의 사진에는 경계와 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후 “잡초”를 거쳐 “안개”, “하늘” 등의 연작으로 오면서 형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대신 윤곽이 들어 왔다. 그리고 그 윤곽들은 점점 더 흐릿해져만 갔다. 화면을 가득 메운 하늘 아래 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땅의 윤곽(“하늘” 연작 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SNOWLAND>는 이러한 후기 작업들에 더 가깝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여전히 화면은 뿌옇고 명확히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조금씩 제 속살을 드러내는 윤곽만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뿌연 풍경 속에서 뿌옇지 않은 느낌이 전해져 온다. – 작가가 그런 느낌을 의도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내가 감상할 때는 그렇게 느껴진다. – 명백한 것이 없는데도 명백해진다.

SL111

SL111

 나는 민병헌의 초기 연작들보다 이러한 후기 연작들을 더 좋아한다. 보여 주지 않으면서 혹은 스스로가 보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무언가가 보이는 사진들이다. 그러한 사진들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민병헌의 작업들은 한 마디로 “멋지다”. 앞으로 그가 또 어떠한 작업들을 이어갈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사진을 찍는 한국의 한 사진가인 그를 늘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이다.

* 참고 서적
 <SNOWLAND>, 민병헌, 도서출판 호미, 2007
 <열화당 사진문고 – 민병헌>, 박영택, 열화당,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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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grey-chic.tistory.com BlogIcon 필그레이 2008.06.12 00:5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민병헌님을 기억해두어야겠네요.'제도권밖에서의 사진가'라고 표현하신 점도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그림같기도한 사진들이 참 제겐 충격적이기도 하고 새롭기도 합니다.사진집에 관심은 늘 있었지만 사실 유행따라 맘가는 대로 간이 맞춰져 있는 편한 사진집만 본 게 아닐까하는 자괴감마저 드네요.언제 사진집 꼭 봐야겠습니다.소개 감사드려요.^^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06.13 00:1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부족한 제 글이 민병헌님을 알게 되는데 오히려 해는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필그레이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어디선가 마주한 듯한 아련함과 에로티시즘

* <현대 예술의 이해> 수업 보고서로 정리했던 자료입니다.

 이번 보고서의 주제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예술가인 신디 셔먼,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 중에서도 제일 유명하고 초창기 시리즈 중 하나인 <Untitled Film Stills>입니다. 저는 우선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기본 지식을 최대한 배제한 채 작품 자체만을 감상하였습니다. (작품 감상 자료 출처는 마지막에 정리하였습니다).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본 후에 든 생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신디 셔먼 자신이 사진을 연출할 때, 스스로 가지고 있던 기존의 유명한 이미지들을 차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하지만 셔먼은 특정 사진에 특정 영화나 장면을 생각하고 찍은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뒤편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다수의 사진들에서 묘하게 남성을 자극하는 듯한 에로티시즘이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무표정한 여인들의 표정도 그렇고 클로즈업 된 사진뿐만 아니라 때로는 멀리서 찍은 사진(#63, 1980)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63

#63

 셔먼 스스로가 기존의 다양한 이미지를 차용하려 했기 때문에 처음 작품을 접한 사람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연상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로티시즘의 경우에 셔먼이 그런 의도를 품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것 또한 이미 남성들에게 익숙한 어떤 이미지에서 오는 느낌일수도 있을 듯 합니다.


시리즈에 대한 셔먼의 변모호성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첫 번째 감상 이후, 셔먼 자신이 시리즈에 대해 말한 내용들과 그녀의 연혁 등에 관해 공부를 해 보았습니다. (참고 자료 마지막에 정리.)

 사실 그녀 자신은 <Untitled Film Stills>의 작업이 계속될 줄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처음 Hallwalls(Robert Longo, Charlie Clough와 셔먼이 같이 모여 살던 집이자 작업 공간)의 그룹 전시에 시리즈의 시초가 되는 여섯 점의 작품을 처음 내 놓았을 때, 그녀는 작품의 방향이나 주제에 대한 특별한 자각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즐기고 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시점이었죠. 그리고 그 여섯 점에서 그녀는 한 캐릭터로 서로 다른 모습을 연기하였지만,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지는 않았습니다. - 하지만 이후 셔먼은 시리즈를 계속하기로 결정하면서 좀 더 많은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셔먼이 <Untitled Film Stills>를 작업하면서 가장 주안점을 두었던 것은 바로 모호성(ambiguity)입니다. 그녀가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고 작품 번호조차 최소한의 식별 목적으로만 이용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것들이 작품의 모호성을 해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80년에 Metro Pictures의 전시를 위해 작품에 번호를 붙일 당시에는 번호가 연도에 따라 붙여졌지만 나중에는 그러한 규칙마저 없애고 오직 순수한 식별 목적으로만 번호를 붙였습니다. – 시리즈의 작품 번호는 대략 #65 정도까지, 그 후 다른 시리즈의 작업 기간을 지나 #81 ~ #85가 추가 되었습니다. 잃어 버렸던 네거티브 원본에서 시리즈에 마지막으로 추가한 작품(70번째 작품) #62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것들을 통해서 그녀는 사람들이 최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은 채 작품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62

#62, 오랫동안 잃어 버련던 필름을 찾아 시리즈에 추가하였다.

 셔먼이 이런 식의선입견을 갖지 않을 수 있는모호성을 획득하려 했다는 증거로 보이는 다른 하나는 그녀가 사진에서 많은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의 스틸 컷들을 보면서 공부를 하던 그녀는 많은 영화의 스틸 컷이나 공개적으로 배포된 사진들이 강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때로는 영화가 정말 웃기거나 행복한 것이 아닌데도 배포된 사진 속의 캐릭터는 웃고 있기도 했습니다. – 제가 생각하기에 스틸 컷 자체가 강한 감정을 내포함으로써 그것을 보는 사람들 또한 은연 중에 그 감정에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무의식 중에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선입견을 주입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다, 슬프다 등의 감정을.그러나 그녀가 이러한 사진들보다 좋아했던 것은 최대한 무표정, 무감정에 가까운 느낌의 사진들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주로 유럽 쪽의 영화에서 간간이 찾을 수 있던 그런 스틸 컷들은 때로는 모호하면서도 신비스러웠습니다.

 셔먼은 자신의 작품에서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철저히 계획된 연출만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그럼으로써 선입견이 없는 모호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녀 스스로가 보기에 자신의 작품 중에 가장 강렬한 감정이 표현된 작품은 일명 “울고 있는 소녀(crying girl)(#27, 1979)이라 불리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조차도 이미 눈물을 다 흘린 후에 더 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는 듯한 분위기와 주인공의 공허한(blank) 표정으로 감정 표현을 절제하였습니다.

#27

#27, crying girl

 그러나 그녀가 이러한 모호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으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들을 작품의 주제로 사용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에게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들이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 이미 기존의 이미지에 대한 선입견이 작품을 보는데 개입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녀 스스로가 말했듯이 한 작품을 만들 때 특정 영화나 이미지를 염두에 두면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Untitled Film Still> 시리즈에 사용된 이미지들은 모두 그녀 자신의 아이디어였습니다. – 이 부분은 일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 중 하나인데, <Untitled Film Stills> 시리즈는 영화의 한 장면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그럴 법한 장면을 연출한 것뿐입니다. 사람들이 ‘Untitled Film’이라는 이름과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때문에 이건 어느 영화의 장면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그녀는 어째서 사람들이 어디선가 보았을법한 이미지를 작품에 사용한 것일까요? 그런 이미지 때문에 그녀가 원하는 모호성이 깨질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셔먼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이미지에 대한 어떤 관념선입견 같은 것조차 모호성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도구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들이 어디선가 본 듯 하면서도 알 듯, 말 듯한 그런 느낌이 또 다른 모호성을 그녀의 작품에 생겨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이 모호성으로 귀결되도록 하려 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셔먼이 작품에서 일부러 에로티시즘을 의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작품 속에서 연기 했던 여러 배우들 - #13 by Brigitte Bardot, #16 by Jeanne Moreau 등 그녀는 자신의 작품 속에 특정 배우의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배우 자체의 복제(copy)라기보다는 그런 배우의 유형(type)을 복제했다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과 당시 미국의 전형적인 오피스 걸들의 이미지는 남성 관객들에게 그런 느낌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녀가 그러한 남성들의 생각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이러한 관객들의 느낌조차 어떤 모호함 속에서 얻을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요?

#13

#13

#16

#16

<Untitled Film Stills>는 자화상이다?

 셔먼의 이 시리즈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 시리즈의 모든 작품들이 그녀의 자화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모든 작품들 속의 인물을 자신이 직접 분장하고 연기 하였습니다. – 분장에 대한 그녀의 재능은 어렸을 때부터 특출 났다고 했는데, 비록 하루 만에 그만 두기는 했지만 Makeup 샵에 취직하기도 했었습니다.하지만 이 시리즈를 단지 자화상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가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리즈는 자화상(Self-portrait)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인물 사진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역시 사진 속의 인물은 셔먼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연기한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화상이면서도 자화상이 아닌 작품, 이것조차도 셔먼 자신에게는 모호성과 연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객들의 경우에는 사진 속의 인물이 셔먼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자각하지 않고 보는 이상 그냥 다양한 인물 사진이겠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모두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화상이면서 자화상이 아니라는 모호함이 그녀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은 셔먼이 이야기 했던 모호성에 관해 지나친 확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최대한의 모든 방법그녀는 작품을 전시회에 전시하거나 책에 실을 때도 그 순서가 연속성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을 동원해서 작품이 모호성을 갖기를 원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견 이해가 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6

#6

#81

#81

#32

#32

#48

#48

#54

#54

<Untitled Film Stills>는 포스트모더니즘인가?

 일반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아방가르드의 재생이라고 간주할 때, 미적 자율성(독창성)의 부정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셔먼의 이 시리즈는 확실히 포스트 모더니즘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조건들 중 하나는 충족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의 차용, 작품 속의 인물들도 이미 사람들의 선입견 속에 존재하는 전형적인 유형(stereotype)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자신만의 완벽한 독창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 그렇지만 뒤샹의 “샘”이 처음 발표 됐을 때의 시대와 비교해 현 시대는 그러한 복제조차 새로운 독창성으로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 예술가의 천재성”에 관한 자료를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하는 작품들도 실은 그 전에 다른 사람들이 시도한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물론 그녀가 기존의 이미지를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그녀 머리 속의 아이디어 중에 기존에 이미 있는 이미지들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 아이디어 자체가 이미 기존의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회 전복적이고 급진적이었던 아방가르드와 달리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 급진성이 줄어 들었습니다.

 때로 셔먼의 작품들을 가지고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이론에 꿰어 맞추며 칭찬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그녀 스스로는 자신은 페미니즘 이론을 알지도 못하며 단지 기존의 영화 스타일들을 모방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어떤 급진성을 띄고 했다기 보다는 그저 즐기면서 자신의 작업을 진행하였고, 그러다 보니 다양한 캐릭터를 다양한 모습과 분위기로 연출한 것뿐이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작품 속에 어떤 특정한 목적이나 의도를 넣으려 했다면 그것은 곧 작품의 모호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시리즈는 깊이보다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표피를 표현했다는 점, 소수에게만 이해 되는 작품보다는 대중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대중성을 취득했다는 점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어떤 작품이 포스트 모더니즘인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정의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단지 저는 <Untitled Film Stills> 시리즈가 사람들에게 기존과 다른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고, 몇몇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한 경향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자료

Cindy Sherman, <The Complete Untitled Film Stills>, Museum of Modern Art
Cindy Sherman, Amada Cruz , <Cindy Sherman : Retrospective>, Thames & Hudson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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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of Joy

City of Joy


 <City of Joy>. 93년에 개봉했으니 15년이 넘게 지난 작품이다. 인도를 배경으로 한 따뜻한 영화라는 이야기를 예전부터 듣긴 했지만 보는 것을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

 먼저 총평부터 해 보자면 적어도 내게는 기대 이하의 영화였다. <미션>을 만든 롤랑 조페가 감독한 것인데 그가 앞의 작품에서 보여 주었던 감동과 아름다움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감독은 인간애와 사랑, 빈곤 속에서도 싹트는 희망을 보여 주고 싶어했지만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이 매끄럽지를 못해서 전달이 잘 되질 않는다. 예를 들자면 <좋은 생각>류의 이야기를 단순히 짜깁기 해 놓은 것 같다. 장면들의 틈새가 좀 더 부드러웠더라면 더 나은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인도 캘커타의 빈민 진료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국인 의사와 인도 사람들의 우정 쌓기에 가난한 자들(인도 사람들)과 헤메이는 자(Patrick Swayze)의 자아 찾기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어린 환자를 살리지 못한 자괴감과 스스로에 대한 의미를 잃어 버린 채 인도로 도망쳐 온 미국인 의사. 자신들의 미래를 개척할 줄 모르고 힘 있는 자에게 굴복해 사는 가난한 인도 사람들. 그랬던 이들이 무료 진료소라는 무대를 중심으로 만나 서로를 변화 시키고 감응해 가는 내용이 영화의 핵심이다.

 보호비를 내지 않겠다며 진료소를 옮겼던 이들이 다른 주민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고 갑작스레 쏟아진 빗줄기가 나환자촌 마을을 휩쓸어 가는 고난은 이들이 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대부에게 충성하고 따르는 것만을 최선으로 알던 인력거꾼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깨우쳐 가고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항의하며 자기 자신을 찾아 간다. 그리고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소명을 잃고 헤메이던 미국인 의사도 이곳 진료소에서의 생활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다시 찾게 된다. 밤에 린치를 당하며 집으로 돌아가라는 협박을 당한 의사가 짐을 싸들고 진료소를 찾아 가는 장면은 그가 스스로 뭘 해야 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깨달았다는 걸 보여 준다.

 마지막에 하사리가 아쇼카(거리 불량배들의 우두머리)를 때려 눕히는 장면은 하사리가 자아를 찾게 되는 과정이다. 다친 하사리의 쾌유를 빌며 인력거꾼들이 종을 흔들며 모인 장면은 인도 사람들이 자신을 찾게 되었다는 걸 보여 준다. 그리고 하사리의 딸인 암리타의 행복한 결혼으로 영화는 자신을 찾게 된 모든 이들이 함께 모여 축제를 벌이며 즐기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번역하자면 '기쁨의 도시'인 이 영화의 제목은 어찌 보면 역설적이다. 농사를 망쳐 가족이 다 같이 도시로 올라온 하사리 가족은 첫 날부터 사기를 당하고,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에 몸을 파는 푸미나에게 희망이란 없어 보인다. 거리의 대부에게 굴복해 충성을 맹세하는 인력거꾼들에게 기쁜 삶이란 어디 있으며 제대로 진료도 받지 못하고 도시 구경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한 나환자 부부에게 기쁜 일이란 무엇이 될 것인가? 어디 아늑한 집 안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을 많은 사람들이 보기엔 이 도시에 과연 '기쁜' 일이란 것이 있는 것인지 의아하다.

 사실 영화의 제목은 이곳이 처음부터 '기쁨'이 흘러 넘치는 곳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가 '기쁨'이 넘치는 곳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인력거꾼들끼리 뭉쳐 대부 아들의 폭정을 이겨 내고, 지참금이 부족해 결혼할 수 없었던 하사리의 딸이 결혼을 하고, 미국인 의사 맥스는 잃어 버렸던 자신을 찾았다. 고난도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찾아 온 건 결국 '기쁨'이다. 그렇게 이곳은 '기쁨의 도시'가 되어 가는 것이다.

 영화는 캘커타 외곽에 대형 세트장을 지어 놓고 찍었다고 하는데 최대 2만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었다고 하니 실제 인도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진짜와 같은 인도 풍경들로 화면 속에 잘 살아 났다.

 남자 주인공인 맥스(Patrick Swayze)의 연기는 그럭저럭이다. 그보다 눈여겨 볼만한 것은 인도인 배우들의 연기이다. 그중에서도 핵심 조연을 맡고 있는 하사리의 연기는 아주 뛰어났다. 가족들을 위해, 자신을 위해 변해가고 투쟁하는 그의 눈빛과 표정 연기는 살아 있다. 인도 영화가 볼리우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영화 산업 강국인 이유는 이런 뛰어난 배우들의 힘도 한 몫 하고 있는 것일 테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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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ygstory.tistory.com BlogIcon 예경 2008.02.21 18:0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매끄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확실하게 들어나는 주제 보단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더군요. 영상이나 배경면에서는 아주 흥미롭고 신비하고 하사리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것은 공감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인도배우라 그런지 자료수집이 만만찮더군요.
    그 나라를 대놓고 찬양하거나 좋은나라라고 몰아붙이기 보단 어두운면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므로 인해 환상만 심어주지 않고 현실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 같아 좋았어요.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02.21 22:5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하사리의 연기는 정말 훌륭했죠.
      스토리 자체가 찬양하는 영화도 아니고, 매우 사실적이었지만
      그래도 의도적으로 희망을 과하게 넣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조금 있었어요.

  2. Favicon of http://ygstory.tistory.com BlogIcon 예경 2008.02.21 18:0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ps. ost는 명곡입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02.21 22:5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ost는 모리꼬네였죠? 들으면서 알겠더라구요.
      모리꼬네의 휠~(뭐, 요즘은 이렇게 써야 한대요.;;)이 느껴지는 음악이었어요.

 <이상엽의 실크로드 탐사>는 저자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다녀 왔던 고대 실크로드의 여러 지역들에 대한 포토 에세이들이다. 하지만 프롤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사람들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실크로드에 대한 여행기나 가이드북이 아니다. 포토 저널리스트로서 저자는 책 속에 "동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민중들의 이야기, 이웃에 대한 기록"을 담고자 했다.

 사람들은 흔히 실크로드 하면 제일 먼저 뜨거운 태양 아래 낙타떼를 몰고 가는 사막의 캐러밴(거상)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크로드는 사막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길이 나 있지 않은 바다에서도 문명이 교류하던 해상 실크로드가 존재했고, 북방의 초원길에도 문명과 사람이 교류하던 실크로드가 있었다.

 저자는 바다에서부터 고대 실크로드의 흔적을 찾아 나간다. 남인도의 케랄라에서 시작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그리고 다시 중국에서 저 멀리 이스탄불 땅까지 고대 실크로드의 흔적을 따라간 기록들. 그런데 그 길 위에서 저자가 마주한 것은 고대 문명 소통의 통로로서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실크로드가 아니었다. 그 곳에는 우리가 상상하던 고대의 거상들도 없었고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길 위의 사람들의 반기는 원주민들도 없었다.

 오히려 저자가 마주한 것은 갈등과 분쟁이 고착화 된 슬픈 길이었다. 여러 민족과 종교 간의 갈등, 그리고 이러한 갈등들을 불러 일으킨 경제적 갈등까지 현대의 실크로드는 더 이상 문명 소통의 통로가 아니라 문명 충돌의 장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길 위에는 분쟁으로 인한 눈물과 고통이 있었고, 오해와 반목으로 인한 충돌과 죽음이 있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현대 실크로드가 직면해 있는 현실과 그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 보게 된다. 더불어 저자의 깊이 있는 글들과 함께 실려 있는 사진들도 주목할만 하다. 사진가로서 저자가 찍은 사진들은 사진과 글이 결합할 때 어떤 식으로 더 "파워풀"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참고로 책을 읽기 전에 고대 실크로드나 여러 지역들의 정세나 현황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면 이해하기가 좀 더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세부 정세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는게 조금 힘든 부분도 있다.
 
 저자의 참고 서적 목록을 보면 이슬람 문명부터 동남아 개론, 실크로드 개괄에 관한 책 등까지 방대한데 그 중에서 정수일 교수의 <실크로드학>이 전체적인 개괄 지식을 얻기에 가장 추천할만 하다. 학문적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긴 하지만 한 번 다 읽고 나면 머리 속에 전체적인 지도를 그리는 것이 조금 수월해질 것이다.

덧. 이상엽씨는 다큐멘터리 사진 웹진인 이미지프레스의 운영자이자 국내 다큐멘터리 사진계에서 이름 있는 포토 저널리스트이다. 최근 몇 년간은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라는 시리즈를 기획하고 공동 작업하여 클래식 카메라에 대한 대중의 열풍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고, 이미지프레스의 비정기 무크지를 발행하여 사진과 저널의 결합 작업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 시키고 작가들의 작품 발표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 오고 있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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