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일요일 오전 조조 영화를 보고 왔다. 새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좋은 점 중 하나는 극장이 가깝다는 것이다. 9시 50분에 영화가 시작하는데 20분 전에 집을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여유 있게 표를 사고 자리를 잡았다.

 <그린 존>의 국내 홍보 문구는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의 제작진과 맷 데이먼이 다시 만났다는 것이었다. 광고 문구만 본다면 사실적이면서도 현란한 액션의 스릴러물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린 존>은 <본> 시리즈와는 그 방향이 전혀 다르다. <본> 시리즈가 가상의 시나리오에 기초한 (픽션) 액션물이라면 <그린 존>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사실에 기초한 페이크 다큐에 가깝다. 영화 제목 자체가 이라크 내에 실재하고 있는 미군의 '안전 지대'를 지칭하는 것이니 이에 따라 이 영화의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미 알려진 내용들이다.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WMD)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은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결국 그 정보는 거짓이었고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 세계를 기만했다는 팩트! 그렇다면 <그린 존>이 이러한 팩트를 반복해 이야기 하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주인공 로이 밀러(맷 데이먼)가 거듭되는 WMD 수색 작전의 실패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 미국이 주장한 이라크 침공의 원인이 WMD였다고 생각해 볼 때 - 영화 전개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점이지만 현실 속의 관객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주인공의 의심은 곧 이 (추악한) 전쟁 자체에 대한 의문에 다름 아니다. 과연 WMD는 존재했던 것인가? WMD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라크의 민주주의와 이라크인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은 허울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밝혀진 진실은 WMD가 존재한다는 정보 자체가 완전한 허위였고 조작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작 과정에는 미국 - 그리고 이를 위시한 연합국들 - 의 이해 관계뿐만 아니라 이라크 내 권력 세력의 이해 관계도 얽혀 있었다. 영화 속에서는 정보를 허위로 조작한 것이 과연 누구였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물론 중간급 관리였던 파운드스톤 혼자만의 농간은 아닐 것이다. 아마 실제로는 미국 최고 권력자까지의 암묵적인 합의와 승인이 존재했겠지.

 하지만 진실이 밝혀졌다고 해서 이야기가 해피 엔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밝혀낸 진실이 '힘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문제를 확대하면 오히려 사실을 모를 때보다 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현실 속에서) 이미 WMD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정 사실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미국과 연합군이 이라크를 떠났는가? 전쟁 전의 상황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노력만이라도 있었는가? 전 세계가 미국의 거짓을 규탄하고 있다고 하여 변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대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미국은 여전히 이라크를 자신들의 뜻대로 개조하기 위해 설쳐대고 있으며 이를 실제적으로 막을 수 있는 세력은 - 적어도 현재 상태에서 보자면 - 현실 상에서는 아무도 없다. 어찌 보면 '진실의 힘'이라는 것은 약자들을 달래기 위해 - 혹은 기만하기 위해 - 힘 있는 자들이 만들어 낸 수사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밝혀낸 진실은 잠시간 언론의 이슈가 되었을 뿐, 전쟁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했다.

 한 장의 사진이 베트남 전쟁을 끝낸 반전 운동의 계기가 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사람들이 몰랐던 진실과 그에 근거한 언론의 힘이 작동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진실과 언론의 힘, 그리고 그 작동 기제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지구 군주국으로 군림하려 하는 미국도 그렇지만, 최근 몇 년 간은 - MB 당선 이후 - 우리 나라가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언론은 정부의 앵무새 역할만 하고 있고, 사실은 은폐 되거나 축소 되며 묻혀 버리고 있다. 모든 사실들은 정부에게 유리한 형태로만 보여진다.

 <그린 존>은 오직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진실만을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그린 존>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의 내막은 수많은 <그린 존>들에 의해 은폐된 진실 중 하나였을 뿐이다.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0.05.10 15:4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10.05.23 20:4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너무 늦었겠죠? 이미 다른 분한테 받으셨으리라 봅니다.

      혹시 아직도 못 받으셨다면 다시 말씀해 주세요.

  2. 2010.05.15 15:3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10.05.23 20:4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너무 늦었겠죠? 이미 다른 분한테 받으셨으리라 봅니다.

      혹시 아직도 못 받으셨다면 다시 말씀해 주세요.

  3. Favicon of http://tood-re.tistory.com BlogIcon 먹튀 검증 2018.07.25 17:3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잘보고갑니다


wife

아내가 결혼했다, 2008

 아내가 결혼했단다. 여자 친구가 아닌 아내가 결혼했단다. 손예진과 김주혁의 행복한 한때를 담은 영화 포스터는 이 영화, 제법 괜찮은 로맨스물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었다는 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알았고, 예고편도 보질 않았기에 영화에 대해 내가 짐작할 수 있었던 건 한 장의 포스터가 다였으니까. 심지어 한 친구는 영화 초반에 손예진이 축구를 좋아하는 걸 보고 "아내가 축구랑 결혼한" 스토리인 줄 알았단다.

 하지만 이 영화는 포스터만치 행복한 영화도, 즐거운 영화도 아니었다. 어쩌면 포스터는 눈속임일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내던지는 질문은 꽤나 진지하며 한없이 밝아 보이기만 하는 손예진의 아우라로도 그 질문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때로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불편할 정도로 힘들기도 했었다.

 영화가 내던지는 질문은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일처 다부, 일부 다처 같은 문제는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의 질문 해석이라면 이 영화는 단지 내 아내의 바람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내가 보기에 영화의 핵심은 결혼이라는 일부 일처의 제도하에서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일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단지 아내가 자유롭게 바람 피우는(??) 것을 보며 별 일 하지 못하는 남편을 보고 남자들이 짜증이 난다거나 혹은 반대로 그동안 남편들의 바람에 억눌려 있던 여자들이 자유 연애(이걸 과연 자유 연애라고 표현해야 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를 앞장서 실천하는 손예진을 보고 신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손예진과 김주혁 둘 다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김주혁을 사랑하고 김주혁과 결혼했으면서도 또 다른 사람도 "함께" 사랑하며 결혼하겠다는 손예진. 그리고 결국엔 아내의 그런 사랑을 "이해" (혹은 체념) 해 주는 남편 김주혁. 뭐랄까, 진짜 한 마디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결국엔 그런 결혼을 감행하고 마는 손예진이 미웠으며 그래도 아랑곳 없이 행복해 보이는 손예진이 미웠다. 오히려 김주혁은 안쓰러웠다. 그런데 영화의 종반으로 갈수록 꼭 손예진을 미워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김주혁이 (거의 마지막까지) 아내와의 그런 삶을 유지하는 것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자는 영화를 보고 손예진이니까 김주혁이 그 삶을 유지했을 거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김주혁의 마음은 단지 내 아내가 너무나 이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이기에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서까지도 포기할 수 없다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새로운 남편과 있으면 자신의 반쪽을 만난 것 같은, 내가 가득 채워지는 것 같다는 손예진.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삶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남편과 그 사람 모두와 함께할 때 행복할 것이라는 이 여자를 무작정 미워할 수 만은 없는 것은 김주혁이 바로 이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주혁의 선택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아내가 남편에게 내어 준 과제(이 부분까지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겠다.)는 끝까지 이 영화가 자기 중심을 지키게 만들었다. 적당한 해피 엔딩이나 어정쩡한 엔딩이 아닌 자신이 내 던진 질문에 대한 일관성을 지켜 냈으니까. 즐겁고 행복한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결코 많이 보지 않았던 2008년의 한국 영화 중에 추천할만한 수작~!

덧. 물론 난 손예진이 될 마음도, 김주혁이 될 마음도 없다. 내게 있어서 사랑이란 단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며 변치 않는 마음이다. 짧지 않은 세월 겪어 온 시간의 경험은 내게 그 사실을 더 확신 시켜 주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물론 그럴 것이다.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qeem.tistory.com BlogIcon Qeem 2008.10.31 10:4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흐음...극장에는 저 말고 몇 명의 여자관객분들이 계셨죠..
    그들은 때론 환호를 내지르고 윽박을 지르기도 하면서 미쳤다라고들 말하더라고요..
    그 중에 저 혼자 흐음...하고 웃으니 옆에 친구가 오빠랑 같은 미친인간들이 있긴해...이러더군요...
    하하 하긴 미친다는 기준은 주관적인건가봅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10.31 13:2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확실히 대다수의 남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
      분개(??)할 것 같긴 해요.

      결국 자기 주관이라는 거겠죠.

  2. Favicon of http://qeem.tistory.com BlogIcon Qeem 2008.10.31 23:4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분개는 안할걸요?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 단지 주인아라는 인물로 승화된 것이겠죠..
    흠흠...어쨌든 저는 유교적인 관념이 저희를 알게 모르게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걸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역시 자기 주관이라는 거겠죠.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11.02 10:4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음, 저는 주인아가 어떤 로망 속의 인물이라고 느끼지는 못했었는데.
      축구도 좋아하고, 섹스도 잘하고, 귀엽고 이쁜데다가 능력 있는 (게다가 남자를 잘 이해해 주는) 그런 여자가 로망이 되는 건가요?
      남자들의 그런 약점을 노린 것이라면
      이 영화의 원작자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안전막을 설치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제가 사실 이 부분은 소설을 읽어 보질 않아서 확실하게는 말 못하겠네요.

  3. Favicon of http://subright.tistory.com BlogIcon chul2 2008.11.02 01:5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영화의 초중반에야 정말 속이 터졌죠. 하지만 저 세명의 행동이나 말이 전부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뒤에는 조금은 응원해주고 싶기도 할 정도로 이해가 되더군요. 제가 생각해도 엔딩은 그 상황에서 최선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11.02 10:4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예, 저도 엔딩이 마음에 들었어요.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보고 나왔는데
      스페인의 그 분위기에
      손예진씨의 파마 머리는 정말 딱이더군요. :)

  4. Favicon of http://piedra.tistory.com BlogIcon Conforte 2008.11.02 09:1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영화를 안보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기 그렇네요.
    그렇지만 원 이건...

    사람이 제 하고 싶은 데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을 죽여도 다 헐 말이 있데잖아요.
    마누라가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는 걸 이해는 할 수 있는데...
    거럼 안되잖아요. 것두 모릅니까?

    결혼 제도는 간음을 막는 가장 좋은 제도입니다.
    결혼 서약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지요?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는 안 무너집니까?
    애들처럼 왜들 그러십니까!

    난 보수 꼴통은 아닌데(긴가?)
    머리 대고 고민할 걸 고민해야지...
    이건 무조건 욕하고 말려야하는 문제지. 안그래요!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11.02 10:4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저는 그냥 결혼이라는 제도를 떠나서
      누군가가 단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만 받아 들였어요.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다면 사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보호막 이런 것도 아니고
      형식의 하나일 뿐이죠.

  5. conforte 2008.11.04 04:2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사람이란 존재가
    평생 한 사람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이니깐
    보호막이 필요한 거라 생각합니다.

  6. Favicon of http://jjinojjino.tistory.com BlogIcon 들불처럼 2009.04.14 14:4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포스트 잘 봤습니다.
    한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도 주요한 주제였다는 리뷰 저랑 비슷하게 보신 것 같아 반갑네요.
    트랙백 걸고 갑니다~

 에쿠니 가오리. 한 때는 이 작가에게 푹 빠져 있던 적이 있었다. 그녀의 신작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바로바로 주문을 하고 한동안 또 그 책에 빠져 살곤 했다. 은사자의 전설이 인상적인 <반짝반짝 빛나는>, 오이와 모자, 그리고 2의 이야기 <호텔 선인장>, 다양한 감성의 단편들로 가득한 <울 준비는 되어 있다> 등등 독특한 시선의 장, 단편들은 완전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렇게 그녀에게 빠져 있기를 한동안, 간간이 나오는 신작들만 살펴 보기 시작하다가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의 새 작품을 들었다. (사실 신작은 아니고 출간된 지 1년도 넘은 책이지만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다.) "마미야 형제? 무슨 카메라 형제쯤 되나?"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든 생각이었다. 카메라 브랜드가 사람 이름으로 쓰일리야 없겠지만 내가 아는 마미야는 중형 카메라 브랜드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마미야는 間官이었다. 무엇을 뜻하려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작품은 그간 내가 좋아했던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들에 미치지 못 했다. 그녀는 독특한 감성으로 인간 관계를 묘사한다던지 (<반짝반짝 빛나는>, <호텔 선인장>) 아니면 일상을 매우 차분하면서도 공감 가게 풀어 가는 (<낙하하는 저녁>)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녀의 이러한 장기들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별 볼 것 없는, 아니 그보다 못해 어찌 보면 한심하기까지 한 두 형제의 이야기. 책 속의 표현을 빌자면 마미야 형제는 "양치도, 샴푸도 게을리 하는 법이 없고, 심성도 고왔으나 실제로 그들과 면식이 있는 여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볼품 없는, 어찐지 기분 나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너저분한, 도대체 그 나이에 형제 둘이서만 사는 것도 이상하고, 몇 푼 아끼자고 매번 슈퍼마켓 저녁 할인을 기다렸다가 장을 보는, 애당초 범주 밖의, 있을 수 없는,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절대 연애 관계로는 발전할 수 없는'" 남자들이었다. 쿠즈하라 선생이 처음 형제의 집에 초대 받아 왔을 때, 테츠노부(동생)의 뒤에 나타난 아키노부(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최악이다"라고 생각했던 건 앞의 묘사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에쿠니 가오리는 남들이 판단하는 형제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며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려고 했다. 이 두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지나고 보면 즐거웠다고 느껴지는, 가슴 한 켠을 작게 차지하고 있는 즐거운 추억 같은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던 그 시간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돌이켜 보면 분명히 즐거웠던 것이다. 나오미와 쿠즈하라 선생이 형제의 두 번째 초대를 받아들인 것도 형제와의 시간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형제는 한 눈에 사람들을 매료 시키는 매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있어 보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오오가키와 미요코가 아키노부와 함께 편히 어울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을 것이고 유미가 테츠노부의 학교로 찾아 갔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이는 작가가 독자들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보지 못한다고 느껴지는 형제의 다른 모습을 보여 주며)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삶도 있다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지만 스스로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런 모습도 있다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야기가 아마 그쯤에서 끝났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테츠노부의 행동 - (형의 회사 동료의 부인이자 바람 난 남편 문제로 힘들어 하고 있는) 오오가키 사오리를 (혼자서만) 좋아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 모습은 최악이었다. 도저히 공감하려 해도 공감할 수가 없다. 그건 정말로 덜 큰, 도저히 생각을 어떻게 하고 사는 건지 알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나마 아키노부는 좀 나았다. 나오미한테 고백하고 차일지언정, 혼자만 상상 속의 연인을 만들지언정 적어도 상대를 힘들게 하지는 않으니까.

 아, 그래도 좋아하는 가오리의 작품이라 좋은 얘기를 해 볼까 했는데 쓰다 보니까 바보 같은 동생 녀석 때문에 화가 나 버렸다. 나, 참...... 어쨌든 여전히 난 가오리의 팬이다. 앞으로 또 그녀의 책이 번역 되어 나오면 언젠가는 사서 읽어볼 테니까.

덧. 이번 책은 신유희씨가 번역을 했다. 그동안 소담에서 번역, 출간된 에쿠니 가오리의 책들은 거의 김난주 씨가 번역했고 일부만 신유희씨가 번역을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신유희씨의 번역 횟수가 더 잦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김난주씨의 번역이 더 마음에 드는데 이게 서로 다른 책이라도 뭔가 차이가 느껴진다. 확실히 번역도 문학적 작업의 하나란 생각이 들어서 원작과 제대로 교감을 한 후에야 이루어지는 번역이 더 그 맛을 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신유희씨의 번역에서 비문이라든가 어색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뭔가 미묘한 부분이 부족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들긴 하지만.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흐릿하다. 그 어떤 것도 확실해 보이는 것은 없다. 명확한 형태는 보이지 않고 희미한 윤곽만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 언뜻 본다면 잘못 인화된 사진쯤으로 보일 법도 하겠다.

 민병헌의 <SNOWLAND>를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흐릿함이 작품을 감상할수록 내 마음 속에서 명확해져 간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눈에 보이는 뚜렷함이 아니다. 저 멀리 눈 덮인 언덕 너머로 희뿌옇게 보이는 나무의 끝자락에서,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조차 힘든 사진 속 풍경 저 너머에서 혹은 화면 가득 메운 검은 숲을 배경으로 희뿌옇게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어떤 명징함이 전해진다. 뚜렷한 건 없는데 뚜렷하다. 아니 사실 뚜렷한 것이 없다는 건 단지 시야가 뿌옇다는 이유로 내린 나의 편견일 수도 있다. 민병헌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있는 그대로라는 것, 곧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은 그것이 명백한 것이라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존재는 명백함을 담보로 한다.

SL095

SL095

SL028

SL028

SL002

SL002

 <SNOWLAND>를 감상하다 보면 작가의 고집이 느껴진다. 오직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만 천착한 작가의 옹골찬 고집 말이다. 다른 이의 시선과 타협하지 않는,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의지가 이 사진집에는 담겨 있다. 자신에 대한 평론이나 일체의 사진 외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민병헌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보면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러한 고집은 당연한 것 같다.

 민병헌은 사진 전공자가 아니다. 몇몇 사진가에게 사사 받았다고는 하지만 무협지로 보자면 변변한 뿌리가 없는 사파에 속할 것이다. 한국 사진계에서 이러한 그의 배경은 그가 더 자신만의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까닭이 되기도 한다. 평론가 박영택의 표현처럼 민병헌이 돌올 할 수 있었던 힘은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고집과 기존의 것 – 제도권 내의 사진 시류 - 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방향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사진 제도권 밖에서 사진가로서 성장한 것은 이러한 시류에 얽히지 않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SL027

SL027

SL106

SL106

 “을지로 재개발 지구”, “별거 아닌 풍경” 등의 초기 연작에서 민병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이 시기 그의 사진에는 경계와 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후 “잡초”를 거쳐 “안개”, “하늘” 등의 연작으로 오면서 형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대신 윤곽이 들어 왔다. 그리고 그 윤곽들은 점점 더 흐릿해져만 갔다. 화면을 가득 메운 하늘 아래 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땅의 윤곽(“하늘” 연작 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SNOWLAND>는 이러한 후기 작업들에 더 가깝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여전히 화면은 뿌옇고 명확히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조금씩 제 속살을 드러내는 윤곽만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뿌연 풍경 속에서 뿌옇지 않은 느낌이 전해져 온다. – 작가가 그런 느낌을 의도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내가 감상할 때는 그렇게 느껴진다. – 명백한 것이 없는데도 명백해진다.

SL111

SL111

 나는 민병헌의 초기 연작들보다 이러한 후기 연작들을 더 좋아한다. 보여 주지 않으면서 혹은 스스로가 보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무언가가 보이는 사진들이다. 그러한 사진들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민병헌의 작업들은 한 마디로 “멋지다”. 앞으로 그가 또 어떠한 작업들을 이어갈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사진을 찍는 한국의 한 사진가인 그를 늘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이다.

* 참고 서적
 <SNOWLAND>, 민병헌, 도서출판 호미, 2007
 <열화당 사진문고 – 민병헌>, 박영택, 열화당, 2005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grey-chic.tistory.com BlogIcon 필그레이 2008.06.12 00:5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민병헌님을 기억해두어야겠네요.'제도권밖에서의 사진가'라고 표현하신 점도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그림같기도한 사진들이 참 제겐 충격적이기도 하고 새롭기도 합니다.사진집에 관심은 늘 있었지만 사실 유행따라 맘가는 대로 간이 맞춰져 있는 편한 사진집만 본 게 아닐까하는 자괴감마저 드네요.언제 사진집 꼭 봐야겠습니다.소개 감사드려요.^^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06.13 00:1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부족한 제 글이 민병헌님을 알게 되는데 오히려 해는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필그레이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어디선가 마주한 듯한 아련함과 에로티시즘

* <현대 예술의 이해> 수업 보고서로 정리했던 자료입니다.

 이번 보고서의 주제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예술가인 신디 셔먼,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 중에서도 제일 유명하고 초창기 시리즈 중 하나인 <Untitled Film Stills>입니다. 저는 우선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기본 지식을 최대한 배제한 채 작품 자체만을 감상하였습니다. (작품 감상 자료 출처는 마지막에 정리하였습니다).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본 후에 든 생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신디 셔먼 자신이 사진을 연출할 때, 스스로 가지고 있던 기존의 유명한 이미지들을 차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하지만 셔먼은 특정 사진에 특정 영화나 장면을 생각하고 찍은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뒤편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다수의 사진들에서 묘하게 남성을 자극하는 듯한 에로티시즘이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무표정한 여인들의 표정도 그렇고 클로즈업 된 사진뿐만 아니라 때로는 멀리서 찍은 사진(#63, 1980)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63

#63

 셔먼 스스로가 기존의 다양한 이미지를 차용하려 했기 때문에 처음 작품을 접한 사람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연상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로티시즘의 경우에 셔먼이 그런 의도를 품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것 또한 이미 남성들에게 익숙한 어떤 이미지에서 오는 느낌일수도 있을 듯 합니다.


시리즈에 대한 셔먼의 변모호성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첫 번째 감상 이후, 셔먼 자신이 시리즈에 대해 말한 내용들과 그녀의 연혁 등에 관해 공부를 해 보았습니다. (참고 자료 마지막에 정리.)

 사실 그녀 자신은 <Untitled Film Stills>의 작업이 계속될 줄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처음 Hallwalls(Robert Longo, Charlie Clough와 셔먼이 같이 모여 살던 집이자 작업 공간)의 그룹 전시에 시리즈의 시초가 되는 여섯 점의 작품을 처음 내 놓았을 때, 그녀는 작품의 방향이나 주제에 대한 특별한 자각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즐기고 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시점이었죠. 그리고 그 여섯 점에서 그녀는 한 캐릭터로 서로 다른 모습을 연기하였지만,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지는 않았습니다. - 하지만 이후 셔먼은 시리즈를 계속하기로 결정하면서 좀 더 많은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셔먼이 <Untitled Film Stills>를 작업하면서 가장 주안점을 두었던 것은 바로 모호성(ambiguity)입니다. 그녀가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고 작품 번호조차 최소한의 식별 목적으로만 이용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것들이 작품의 모호성을 해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80년에 Metro Pictures의 전시를 위해 작품에 번호를 붙일 당시에는 번호가 연도에 따라 붙여졌지만 나중에는 그러한 규칙마저 없애고 오직 순수한 식별 목적으로만 번호를 붙였습니다. – 시리즈의 작품 번호는 대략 #65 정도까지, 그 후 다른 시리즈의 작업 기간을 지나 #81 ~ #85가 추가 되었습니다. 잃어 버렸던 네거티브 원본에서 시리즈에 마지막으로 추가한 작품(70번째 작품) #62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것들을 통해서 그녀는 사람들이 최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은 채 작품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62

#62, 오랫동안 잃어 버련던 필름을 찾아 시리즈에 추가하였다.

 셔먼이 이런 식의선입견을 갖지 않을 수 있는모호성을 획득하려 했다는 증거로 보이는 다른 하나는 그녀가 사진에서 많은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의 스틸 컷들을 보면서 공부를 하던 그녀는 많은 영화의 스틸 컷이나 공개적으로 배포된 사진들이 강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때로는 영화가 정말 웃기거나 행복한 것이 아닌데도 배포된 사진 속의 캐릭터는 웃고 있기도 했습니다. – 제가 생각하기에 스틸 컷 자체가 강한 감정을 내포함으로써 그것을 보는 사람들 또한 은연 중에 그 감정에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무의식 중에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선입견을 주입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다, 슬프다 등의 감정을.그러나 그녀가 이러한 사진들보다 좋아했던 것은 최대한 무표정, 무감정에 가까운 느낌의 사진들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주로 유럽 쪽의 영화에서 간간이 찾을 수 있던 그런 스틸 컷들은 때로는 모호하면서도 신비스러웠습니다.

 셔먼은 자신의 작품에서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철저히 계획된 연출만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그럼으로써 선입견이 없는 모호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녀 스스로가 보기에 자신의 작품 중에 가장 강렬한 감정이 표현된 작품은 일명 “울고 있는 소녀(crying girl)(#27, 1979)이라 불리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조차도 이미 눈물을 다 흘린 후에 더 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는 듯한 분위기와 주인공의 공허한(blank) 표정으로 감정 표현을 절제하였습니다.

#27

#27, crying girl

 그러나 그녀가 이러한 모호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으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들을 작품의 주제로 사용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에게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들이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 이미 기존의 이미지에 대한 선입견이 작품을 보는데 개입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녀 스스로가 말했듯이 한 작품을 만들 때 특정 영화나 이미지를 염두에 두면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Untitled Film Still> 시리즈에 사용된 이미지들은 모두 그녀 자신의 아이디어였습니다. – 이 부분은 일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 중 하나인데, <Untitled Film Stills> 시리즈는 영화의 한 장면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그럴 법한 장면을 연출한 것뿐입니다. 사람들이 ‘Untitled Film’이라는 이름과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때문에 이건 어느 영화의 장면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그녀는 어째서 사람들이 어디선가 보았을법한 이미지를 작품에 사용한 것일까요? 그런 이미지 때문에 그녀가 원하는 모호성이 깨질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셔먼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이미지에 대한 어떤 관념선입견 같은 것조차 모호성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도구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들이 어디선가 본 듯 하면서도 알 듯, 말 듯한 그런 느낌이 또 다른 모호성을 그녀의 작품에 생겨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이 모호성으로 귀결되도록 하려 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셔먼이 작품에서 일부러 에로티시즘을 의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작품 속에서 연기 했던 여러 배우들 - #13 by Brigitte Bardot, #16 by Jeanne Moreau 등 그녀는 자신의 작품 속에 특정 배우의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배우 자체의 복제(copy)라기보다는 그런 배우의 유형(type)을 복제했다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과 당시 미국의 전형적인 오피스 걸들의 이미지는 남성 관객들에게 그런 느낌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녀가 그러한 남성들의 생각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이러한 관객들의 느낌조차 어떤 모호함 속에서 얻을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요?

#13

#13

#16

#16

<Untitled Film Stills>는 자화상이다?

 셔먼의 이 시리즈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 시리즈의 모든 작품들이 그녀의 자화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모든 작품들 속의 인물을 자신이 직접 분장하고 연기 하였습니다. – 분장에 대한 그녀의 재능은 어렸을 때부터 특출 났다고 했는데, 비록 하루 만에 그만 두기는 했지만 Makeup 샵에 취직하기도 했었습니다.하지만 이 시리즈를 단지 자화상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가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리즈는 자화상(Self-portrait)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인물 사진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역시 사진 속의 인물은 셔먼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연기한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화상이면서도 자화상이 아닌 작품, 이것조차도 셔먼 자신에게는 모호성과 연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객들의 경우에는 사진 속의 인물이 셔먼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자각하지 않고 보는 이상 그냥 다양한 인물 사진이겠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모두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화상이면서 자화상이 아니라는 모호함이 그녀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은 셔먼이 이야기 했던 모호성에 관해 지나친 확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최대한의 모든 방법그녀는 작품을 전시회에 전시하거나 책에 실을 때도 그 순서가 연속성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을 동원해서 작품이 모호성을 갖기를 원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견 이해가 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6

#6

#81

#81

#32

#32

#48

#48

#54

#54

<Untitled Film Stills>는 포스트모더니즘인가?

 일반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아방가르드의 재생이라고 간주할 때, 미적 자율성(독창성)의 부정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셔먼의 이 시리즈는 확실히 포스트 모더니즘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조건들 중 하나는 충족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의 차용, 작품 속의 인물들도 이미 사람들의 선입견 속에 존재하는 전형적인 유형(stereotype)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자신만의 완벽한 독창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 그렇지만 뒤샹의 “샘”이 처음 발표 됐을 때의 시대와 비교해 현 시대는 그러한 복제조차 새로운 독창성으로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 예술가의 천재성”에 관한 자료를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하는 작품들도 실은 그 전에 다른 사람들이 시도한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물론 그녀가 기존의 이미지를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그녀 머리 속의 아이디어 중에 기존에 이미 있는 이미지들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 아이디어 자체가 이미 기존의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회 전복적이고 급진적이었던 아방가르드와 달리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 급진성이 줄어 들었습니다.

 때로 셔먼의 작품들을 가지고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이론에 꿰어 맞추며 칭찬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그녀 스스로는 자신은 페미니즘 이론을 알지도 못하며 단지 기존의 영화 스타일들을 모방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어떤 급진성을 띄고 했다기 보다는 그저 즐기면서 자신의 작업을 진행하였고, 그러다 보니 다양한 캐릭터를 다양한 모습과 분위기로 연출한 것뿐이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작품 속에 어떤 특정한 목적이나 의도를 넣으려 했다면 그것은 곧 작품의 모호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시리즈는 깊이보다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표피를 표현했다는 점, 소수에게만 이해 되는 작품보다는 대중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대중성을 취득했다는 점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어떤 작품이 포스트 모더니즘인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정의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단지 저는 <Untitled Film Stills> 시리즈가 사람들에게 기존과 다른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고, 몇몇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한 경향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자료

Cindy Sherman, <The Complete Untitled Film Stills>, Museum of Modern Art
Cindy Sherman, Amada Cruz , <Cindy Sherman : Retrospective>, Thames & Hudson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City of Joy

City of Joy


 <City of Joy>. 93년에 개봉했으니 15년이 넘게 지난 작품이다. 인도를 배경으로 한 따뜻한 영화라는 이야기를 예전부터 듣긴 했지만 보는 것을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

 먼저 총평부터 해 보자면 적어도 내게는 기대 이하의 영화였다. <미션>을 만든 롤랑 조페가 감독한 것인데 그가 앞의 작품에서 보여 주었던 감동과 아름다움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감독은 인간애와 사랑, 빈곤 속에서도 싹트는 희망을 보여 주고 싶어했지만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이 매끄럽지를 못해서 전달이 잘 되질 않는다. 예를 들자면 <좋은 생각>류의 이야기를 단순히 짜깁기 해 놓은 것 같다. 장면들의 틈새가 좀 더 부드러웠더라면 더 나은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인도 캘커타의 빈민 진료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국인 의사와 인도 사람들의 우정 쌓기에 가난한 자들(인도 사람들)과 헤메이는 자(Patrick Swayze)의 자아 찾기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어린 환자를 살리지 못한 자괴감과 스스로에 대한 의미를 잃어 버린 채 인도로 도망쳐 온 미국인 의사. 자신들의 미래를 개척할 줄 모르고 힘 있는 자에게 굴복해 사는 가난한 인도 사람들. 그랬던 이들이 무료 진료소라는 무대를 중심으로 만나 서로를 변화 시키고 감응해 가는 내용이 영화의 핵심이다.

 보호비를 내지 않겠다며 진료소를 옮겼던 이들이 다른 주민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고 갑작스레 쏟아진 빗줄기가 나환자촌 마을을 휩쓸어 가는 고난은 이들이 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대부에게 충성하고 따르는 것만을 최선으로 알던 인력거꾼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깨우쳐 가고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항의하며 자기 자신을 찾아 간다. 그리고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소명을 잃고 헤메이던 미국인 의사도 이곳 진료소에서의 생활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다시 찾게 된다. 밤에 린치를 당하며 집으로 돌아가라는 협박을 당한 의사가 짐을 싸들고 진료소를 찾아 가는 장면은 그가 스스로 뭘 해야 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깨달았다는 걸 보여 준다.

 마지막에 하사리가 아쇼카(거리 불량배들의 우두머리)를 때려 눕히는 장면은 하사리가 자아를 찾게 되는 과정이다. 다친 하사리의 쾌유를 빌며 인력거꾼들이 종을 흔들며 모인 장면은 인도 사람들이 자신을 찾게 되었다는 걸 보여 준다. 그리고 하사리의 딸인 암리타의 행복한 결혼으로 영화는 자신을 찾게 된 모든 이들이 함께 모여 축제를 벌이며 즐기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번역하자면 '기쁨의 도시'인 이 영화의 제목은 어찌 보면 역설적이다. 농사를 망쳐 가족이 다 같이 도시로 올라온 하사리 가족은 첫 날부터 사기를 당하고,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에 몸을 파는 푸미나에게 희망이란 없어 보인다. 거리의 대부에게 굴복해 충성을 맹세하는 인력거꾼들에게 기쁜 삶이란 어디 있으며 제대로 진료도 받지 못하고 도시 구경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한 나환자 부부에게 기쁜 일이란 무엇이 될 것인가? 어디 아늑한 집 안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을 많은 사람들이 보기엔 이 도시에 과연 '기쁜' 일이란 것이 있는 것인지 의아하다.

 사실 영화의 제목은 이곳이 처음부터 '기쁨'이 흘러 넘치는 곳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가 '기쁨'이 넘치는 곳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인력거꾼들끼리 뭉쳐 대부 아들의 폭정을 이겨 내고, 지참금이 부족해 결혼할 수 없었던 하사리의 딸이 결혼을 하고, 미국인 의사 맥스는 잃어 버렸던 자신을 찾았다. 고난도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찾아 온 건 결국 '기쁨'이다. 그렇게 이곳은 '기쁨의 도시'가 되어 가는 것이다.

 영화는 캘커타 외곽에 대형 세트장을 지어 놓고 찍었다고 하는데 최대 2만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었다고 하니 실제 인도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진짜와 같은 인도 풍경들로 화면 속에 잘 살아 났다.

 남자 주인공인 맥스(Patrick Swayze)의 연기는 그럭저럭이다. 그보다 눈여겨 볼만한 것은 인도인 배우들의 연기이다. 그중에서도 핵심 조연을 맡고 있는 하사리의 연기는 아주 뛰어났다. 가족들을 위해, 자신을 위해 변해가고 투쟁하는 그의 눈빛과 표정 연기는 살아 있다. 인도 영화가 볼리우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영화 산업 강국인 이유는 이런 뛰어난 배우들의 힘도 한 몫 하고 있는 것일 테다.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ygstory.tistory.com BlogIcon 예경 2008.02.21 18:0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매끄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확실하게 들어나는 주제 보단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더군요. 영상이나 배경면에서는 아주 흥미롭고 신비하고 하사리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것은 공감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인도배우라 그런지 자료수집이 만만찮더군요.
    그 나라를 대놓고 찬양하거나 좋은나라라고 몰아붙이기 보단 어두운면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므로 인해 환상만 심어주지 않고 현실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 같아 좋았어요.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02.21 22:5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하사리의 연기는 정말 훌륭했죠.
      스토리 자체가 찬양하는 영화도 아니고, 매우 사실적이었지만
      그래도 의도적으로 희망을 과하게 넣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조금 있었어요.

  2. Favicon of http://ygstory.tistory.com BlogIcon 예경 2008.02.21 18:0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ps. ost는 명곡입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02.21 22:5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ost는 모리꼬네였죠? 들으면서 알겠더라구요.
      모리꼬네의 휠~(뭐, 요즘은 이렇게 써야 한대요.;;)이 느껴지는 음악이었어요.

 <이상엽의 실크로드 탐사>는 저자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다녀 왔던 고대 실크로드의 여러 지역들에 대한 포토 에세이들이다. 하지만 프롤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사람들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실크로드에 대한 여행기나 가이드북이 아니다. 포토 저널리스트로서 저자는 책 속에 "동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민중들의 이야기, 이웃에 대한 기록"을 담고자 했다.

 사람들은 흔히 실크로드 하면 제일 먼저 뜨거운 태양 아래 낙타떼를 몰고 가는 사막의 캐러밴(거상)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크로드는 사막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길이 나 있지 않은 바다에서도 문명이 교류하던 해상 실크로드가 존재했고, 북방의 초원길에도 문명과 사람이 교류하던 실크로드가 있었다.

 저자는 바다에서부터 고대 실크로드의 흔적을 찾아 나간다. 남인도의 케랄라에서 시작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그리고 다시 중국에서 저 멀리 이스탄불 땅까지 고대 실크로드의 흔적을 따라간 기록들. 그런데 그 길 위에서 저자가 마주한 것은 고대 문명 소통의 통로로서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실크로드가 아니었다. 그 곳에는 우리가 상상하던 고대의 거상들도 없었고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길 위의 사람들의 반기는 원주민들도 없었다.

 오히려 저자가 마주한 것은 갈등과 분쟁이 고착화 된 슬픈 길이었다. 여러 민족과 종교 간의 갈등, 그리고 이러한 갈등들을 불러 일으킨 경제적 갈등까지 현대의 실크로드는 더 이상 문명 소통의 통로가 아니라 문명 충돌의 장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길 위에는 분쟁으로 인한 눈물과 고통이 있었고, 오해와 반목으로 인한 충돌과 죽음이 있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현대 실크로드가 직면해 있는 현실과 그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 보게 된다. 더불어 저자의 깊이 있는 글들과 함께 실려 있는 사진들도 주목할만 하다. 사진가로서 저자가 찍은 사진들은 사진과 글이 결합할 때 어떤 식으로 더 "파워풀"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참고로 책을 읽기 전에 고대 실크로드나 여러 지역들의 정세나 현황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면 이해하기가 좀 더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세부 정세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는게 조금 힘든 부분도 있다.
 
 저자의 참고 서적 목록을 보면 이슬람 문명부터 동남아 개론, 실크로드 개괄에 관한 책 등까지 방대한데 그 중에서 정수일 교수의 <실크로드학>이 전체적인 개괄 지식을 얻기에 가장 추천할만 하다. 학문적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긴 하지만 한 번 다 읽고 나면 머리 속에 전체적인 지도를 그리는 것이 조금 수월해질 것이다.

덧. 이상엽씨는 다큐멘터리 사진 웹진인 이미지프레스의 운영자이자 국내 다큐멘터리 사진계에서 이름 있는 포토 저널리스트이다. 최근 몇 년간은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라는 시리즈를 기획하고 공동 작업하여 클래식 카메라에 대한 대중의 열풍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고, 이미지프레스의 비정기 무크지를 발행하여 사진과 저널의 결합 작업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 시키고 작가들의 작품 발표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 오고 있다.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감독 정윤철 (2007 / 한국)
출연 황정민, 전지현, 진지희, 김태성
상세보기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 작품이다, 연기파 배우 황정민이 나온다, 오랜만에 전지현의 출연작이다 등 상영 전부터 이래저래 소문을 몰고 다니던 영화였다. 하지만 <말아톤>을 제대로 보지 않았기에 정윤철 감독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고 황정민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 때문에 영화를 선택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보기로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전지현이 출연했기 때문이다. 전지현이 나온 영화는 (공포 영화를 빼고는) 다 보았고 <데이지> 이후 오랜만의 작품이라 개봉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영화는 유일한의 동명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고 하는데 현실과 환상이 적절히 결합된 구성을 비교적 잘 보여 주었다. 영화가 중반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러한 결합이 약간 어색한 감이 있는데 후반부로 가면서 그 조화가 잘 이루어졌다. "지구를 구하자"라는 캠페인에 참가했던 황정민과 전지현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장면이나 마지막에 황정민이 아이를 안고 나는 장면은 영화 속의 현실과 교차로 보여지면서 꿈인지 현실인지 아련한 느낌이 든다.

 황정민의 연기는 역시 좋았다. 초반엔 약간 부자연스런 느낌이 있었지만 그의 과거가 살짝 드러나고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에 몰입 되면서 연기가 탄력을 받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온 몸에 물을 뿌린 후 전지현과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정말 멋졌다. 바보가 아니라 자신이 할 일을 알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나아 가려는 그 말과 표정은 이 영화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아도 좋을 것이다.
 
 전지현도 오랜만의 복귀작에서 좀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 주고자 노력한 것 같다. 화장 안 한 얼굴로 출연한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는데 클로즈 업 장면에서는 얼굴의 잡티가 보일 정도였으니 정말 거의 안 한 것 같긴 하다. 그리고 CF 퀸으로서의 강렬한 이미지를 잘 숨기고 송수정이라는 PD 캐릭터를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전지현도 광고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자신을 숨기기 쉽지 않은 배우인데 - 김태희가 어떤 영화를 나오든 CF로 보이는 것처럼 - 이 영화에서는 그런 느낌이 없다. 힘든 PD 생활을 하는 캐릭터의 털털함도 잘 느껴지고 전체적인 연기에서 특별히 아쉬운 부분도 없다.
 
 슈퍼맨이 사람들을 도와 주는 이유는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자신이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슈퍼맨이 바꾸지 못한 그의 과거는 악몽이 되어 나타나지만 그는 적어도 자신의 미래만은 스스로 바꾸고 있다. 나도 아직까지 한 사람의 작은 힘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한 명이다. - 사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생각에 몰표를 줬을텐데 이젠 나도 좀 변했다. - 그래서 황정민의 슈퍼맨에 더 공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의 말처럼 "커다란 쇠문을 여는 것은 힘이 아니라 작은 열쇠"이니까 말이다.

 이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대체적인 평가는 "너무 교훈적이다, 메시지를 주입한다"인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나한테 제일 아쉬웠던 점은 영화의 결말 부분이다. 황정민이 전지현에게 전해 준 마지막 약속은 영화가 너무 나아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오히려 황정민이 아이를 구한 것으로만 끝났다면 더 깔끔하고 와 닿는 결말이 됐을 것 같다. 시사회 자료를 보면 우리 속에는 모두 슈퍼맨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찍었다고 감독이 말하는데 정윤철 감독은 관객들에게 정말 슈퍼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일까.

덧. TV 광고에서 전지현을 보면서 내가 늘 하는 생각은 그녀를 모델로 해서 사진을 찍고 싶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청순한 표정부터 유혹하는 눈빛까지, 광고를 보고 있자면 그녀가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은 과연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전지현을 모델로 사진을 찍으면 굉장히 다양한 느낌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물론 과연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올지는 미심쩍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것도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건가? 사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건 아닌데......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cine0083.tistory.com BlogIcon 시네마천국 2008.02.05 16:4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단편을 장편으로 잘 풀어내어 그 부분은 상당히 좋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극 흐름에서 너무 오르락 내리락 하듯 보여준건 재미를 조금 반감시키지 않았나 싶네요~

    전지현의 다소 밍밍한 모습은 전작들보다 더 좋은 느낌이였습니다.

  2. Favicon of http://bottlesonata.tistory.com BlogIcon airpheus 2008.02.10 22:5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즐겁게 읽고 갑니다. 트래백 감사해요 ^^

  3. Favicon of http://libraa.tistory.com BlogIcon Themis 2008.02.11 18:0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글을 상당히 잘 쓰셨네요...전 글재주가 없어서...^^;;; 잘 읽고 갑니다. 트랙백 감사하구요...(솔직히 트랙백사용법은 아직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있다는..ㅜㅜ바보)

 우리 나라에 몇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경제-경영서, 자기 계발서 등의 인기는 가히 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기는 습관>도 그런 붐의 연장선 상에 있는 책 중의 하나다. 그리고 그 붐 속에서 출간된 지 반년만에 176쇄 - 정말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 발행에 돌입하고 여러 기업의 교육용 교재로 쓰일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책의 저자가 바로 직접 이겨 본 경험이 있는 CEO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의 내용들이 저자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경험과 사례를 바탕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공감을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류의 책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늘 그 나물에 그 밥이기도 하고 때로는 말로만 늘어 놓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책은 요소요소에 적절한 사례를 잘 소개해 놓았고 그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었다.

 저자는 책에서 기업이든 사람이든 승리할 수 있는 요인을 크게 몇 가지로 나누어 정리했다. 그 키워드는 대략 열정, 마케팅, 프로세스, 규범, 성실이다. 그 중에서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것은 바로 성실이다. 책에 보면 안성기씨와 조용필씨의 이야기가 나온다. 각자 배우와 가수라는 자기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두 사람인데, 혹시 그들이 배우와 가수가 아닌 다른 분야에 도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저자의 판단은 그들은 다른 곳에서도 결코 허투루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국내 최고의 알피니스트 중 한 명인 박정헌씨는 "최고와 최고는 통한다. 우리 나라에서 엿장수로서 최고가 된다면 대통령을 만날 수도 있다."라고 했다. 엿장수라는 자신만의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면 이는 우리 나라 정치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되는 것과 같은 가치라는 것이다.

 얼마 전 모 방송사의 연말 시상식에서 강호동씨가 대상을 수상했다. 방송 입문 십 몇 년만에 첫 대상 수상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를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최연소 천하 장사로 씨름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가 전혀 다른 분야인 연예계에 와서 다시 한 번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는 정말로 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것이다. 이는 씨름을 할 때도, 방송을 할 때도 자신의 현재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끈기와 성실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어느 자리에서든 최고에 올라서기 위해서 필요한 가치는 비슷한 것 같다. 자신의 현재에 충실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 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열심히 하지 않는 이가 다른 것이라고 열심히 할 것 같은가? 안성기씨나 조용필씨가 찻집을 운영한다고 할 때 허술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 것이다.

 사실 최고라는 것이 꼭 남들 위에 올라 서는 것, 남과 비교해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무슨 일을 하고 있던 간에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게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지지 않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충실해야 할 것이다.

Carpe Diem~!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도록 하자.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t.jayoo.org BlogIcon 자유 2008.01.21 10:4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현재 3대 MC를 뽑으라면 강호동도 뽑힐만큼 요즘 잘 나가죠. 방송 3사 주말 프로그램 하나씩을 맡고 있으니 말이에요. 최연소 천하장사에 이은 연예계 평정까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보고 배워야 하는데.... :)

  2. Favicon of http://doyoupang.tistory.com BlogIcon 듀팡 2008.01.21 20:3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책 빌려 왔는데, 7일안에 다 읽고 리뷰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3. Favicon of http://tcat.kr BlogIcon TomCat 2008.01.30 18:1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ㅎㅎ 좋은 글이네요.

    저도 티스토리에 뭔가 하나 내고 싶은데
    형 혹시 초청장 보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8월의 크리스마스
감독 허진호 (1998 / 한국)
출연 심은하, 한석규, 이민수, 류광철
상세보기

  얼마 전 DVD를 사면서 영화를 다시 봤다. 몇 번째로 보는 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또 보는 건 꽤 오랜만이다. 앳된 시절 심은하의 모습과 연기, 그리고 - 요즘은 많이 사그라 들었지만 - 한석규의 연기 또한 일품이다. 오랜만에 듣는 주제가도 좋다. 역시 한석규가 목소리 하나만은 어디 가서 빠지질 않는다니까.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고3을 눈 앞에 둔 시절이었다. 원래 혼자 극장 가던 걸 즐기는 편이라 그때도 혼자 시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당시 한석규, 심은하는 내노라 하는 톱스타들이었고,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지라 영화를 선택하는데 큰 고민은 없었다.

 길지 않은 한 시간 반 정도의 상영 시간.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극장을 나온 후, 잠시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영화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이후로 허진호 감독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가 네 편의 영화를 만들어 오는 동안 지속적인 그의 팬이 되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중에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역시 <봄날은 간다>이겠지만, 그의 데뷰작이자 잔잔한 명작으로 추억 되는 이 작품 또한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바로 이 데뷰작부터 계속된 일이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최근 작 <행복>에서는 직접적으로 주인공들이 죽었고, <봄날은 간다>에서는 상우(유지태)의 할머니, <외출>에서는 손예진의 남편이 죽었다. 하지만 허 감독의 특징이라고 생각 되는 것은 결코 죽음에 근접해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직접 죽음을 보여 주어도 보여 주는 것 이상으로 다가서지는 않는다. 죽음도 우리가 늘 살고 있는 일상의 하나일 뿐이다. - <행복>과 <8월의 크리스마스>를 비교하면 죽음에 대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가는 쪽으로 바뀌기는 했다. 그건 첫 작품 이후, 조금씩 조금씩 더 현실적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변해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주 무대는 정원(한석규)이 운영하는 작은 사진관이다. 이 동네 구멍가게 사진관에 어느 날 사진을 뽑아 달라며 찾아 온 주차 단속원 아가씨 다림(심은하). 둘의 첫 만남은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인상 좋은 넉살의 한석규가 특유의 "허허." 웃음을 지으며 아이스크림을 건네니 다림도 화가 풀릴 수 밖에.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스르르 알듯, 모를듯 서로에게 조금씩 빠져 들어 갔다.

 <8월의 크리스마스> 하면 몇몇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손 꼽는 것들은 한석규가 유리창 너머로 심은하를 보듬는 장면, 사진관에 찾아 온 심은하가 유리창 밖에서 입을 오무려 가며 이야기하는 장면, 사진관의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 오던 밤 거리에서 심은하가 갑자기 한석규의 팔짱을 끼는 장면이다. 이 영화는 다른 영화에 비해 긴 호흡의 장면들이 많은데 그래서 그런지 배우들의 연기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좋은 장면, 좋은 연기를 보면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감동을 받는데 이 작품에선 그런 기분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영화의 주된 공간이 사진관이다 보니 이 영화에서 사진은 중요한 소재 중 하나가 된다. 영정 사진을 찍으러 온 할머니, 본인의 영정 사진을 찍는 한석규, 아버지를 위해 여러가지 사용법들을 만들 때 사용하는 즉석 사진들, 그리고 사진관에 찾아 온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 또 영화 속의 소재로서뿐만 아니라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모티브도 바로 사진이었다. 감독은 영화의 아이디어를 가수 김광석의 영정 사진을 보고 얻었다고 했다. 영정 사진에서 어떻게 그렇게 밝게 웃을 수 있을까 하면서 밝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상을 이야기 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단다.

 그리고 영화는 충분히 그의 의도를 반영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영화에서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냥 옆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때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좋다. 이야기를 얻어 가는 건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연기가 아닌 일상의 모습을 그리고, 죽음조차도 하나의 일상으로 표현한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석규, 심은하의 일상의 연기, 영화를 마치고 갑자기 돌아 가신 유영길 촬영 감독의 화면 포착, 그리고 신인 감독이었던 허진호 감독이 모여 만들어 낸 명작이다. 언젠가는 이만한 콤비들이 다시 모여 만들어 낸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될까?

덧. 영화에서 한석규가 아버지인 신구 옆에 가서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배경 음악으로 흘러 나오는 곡이 아들을 먼저 잃은 남미의 기타리스트가 아들을 생각하며 연주한 곡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 내부 장치들의 디테일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싶다. 어떻게 그 장면에 그런 곡을 찾아서 넣을 생각을 했을지.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goldsoul.tistory.com BlogIcon GoldSoul 2007.12.20 11:4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DVD 있어요. 가끔 생각나면 꺼내서 보고 싶은 장면까지 보고 끄기도 해요.
    언제봐도 좋아요. 8월의 크리스마스는요. :)

  2. kradmeser 2008.08.01 01:2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잘 지내냐? 무심코 검색창에 scsc를 쳤다가 여길 찾았다.

    한석규 아저씨는 원래 성우 출신이라 목소리가 멋질 수 밖에 없지. ㅎㅎ

    8월의 크리스마스는 장면장면이 다 좋지.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한석규가 버스를 타고 가고 있을 때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가 깔리는 그 장면..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08.01 16:0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와, 형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어떻게 지내십니까? 얼굴 까 먹겠어요.

      한석규가 버스 타고 가는 장면 생각나네요.
      솔직히 영화 전체적으로 다 좋았어요.
      크게 뭐 뺄 것이 없었죠.

      이 영화, 어느 새 10년도 더 되어 버렸죠?
      어느 새 제 나이도 그만큼......

 최근 며칠 사이에 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쌀쌀해졌다. 불과 10월 초까지만 해도 "여름이 끝난 지가 언젠데 왜 이렇게 더워" 하면서 투덜대고 다녔는데, 이젠 "벌써 겨울이야? 도대체 가을은 어디 간 거야"로 변했다. 이렇게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즈음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건 역시 따끈따끈한 국물이 있는 음식들이다. 면발이 쫄깃한 우동 한 그릇. 국물 맛이 시원한 조개탕. 아니면 만두국도 좋겠다. 모두 생각하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그 중에서 지금 얘기할 음식은 바로 깔끔한 국물이 일품인 만두국이다. 서울 중심부의 동부 이촌동에 자리한 <갯마을>은 오랜 세월 오직 만두만으로 그 명성을 쌓아온 곳이다. 메뉴는 만두국과 떡만두국, 물만두, 그리고 녹두전이 있다. 우선 메뉴가 단출하다는 것으로서 맛집의 첫째 조건에 합격이다. 이것저것 다양한 음식을 하는 가게 치고 맛있는 요리를 내 놓는 집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물김치

<갯마을>의 또 다른 별미, 물김치

 <갯마을>에 가서 만두국을 주문하면 제일 처음엔 시원한 물김치와 작은 종지에 담긴 간장, 그리고 후식으로 요구르트를 준다. 여기서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나오는 물김치 또한 이 집의 자랑 중 하나다. 아삭아삭 씹히는 배추도 맛있고, 국물 맛도 주 요리인 만두국을 닮아서인지 그 맛이 정갈하다. 물김치는 얼마든지 더 달라고 할 수 있으니 마음껏 먹어도 된다.

 자 이제 오늘의 주인공 만두국이다. 커다란 그릇에 담겨 나오는 만두국의 양은 웬만한 덩치의 성인 남성에게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하다. - 여러 명이 왔을 때 조금 부족하다 느껴지면 물만두나 녹두전을 따로 시켜 먹어도 좋다. - 우선 만두국의 제일 위에 담겨 있는 살코기 몇 점과 계란 지단은 보너스다. 만두는 일반 성인이라면 한 입에 쏙 들어갈 정도의 적당한 크기다. 다만 처음 음식이 나왔을 때는 만두가 한 번에 바로 먹기엔 조금 뜨겁다. 이 때는 만두를 꺼내 놓을 수 있는 그릇도 함께 주니까 국물을 마시면서 만두를 꺼내 놓았다가 따로 간장에 찍어 먹어도 된다.

 만두국에 있어서는 물론 만두도 중요하지만 역시 그 맛의 절반 이상을 결정하는 것이 국물일 것이다. <갯마을>의 국물 맛은 깔끔하다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국물이 전혀 텁텁함이 없고 담백하다. (혹자는 국물이 깎쟁이 같다고 하더라.) 조미료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고, 제대로 우러난 육수가 바로 이 깔끔한 국물을 만들어 주는 비결이다.

만두국

<갯마을> 만두국

  이 곳의 한가지 단점이라면 한끼 식사로 생각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한 그릇에 8천원. 물가가 비싼 동네라는 특성을 고려해도 동네 음식점 치고는 가격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가끔의 별미로, 추운 겨울 따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 찾아 오기에는 나쁘지 않은 가격일 것이다.

 아파트 단지촌에서 십 년이 넘게 자리를 지켜 올 수 있다는 것도 <갯마을>의 음식 맛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에는 성황에 힘 입어 가게를 조금 확장했는데 그 이후로도 맛은 변함이 없다. 주말 오후의 식사 시간이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이니 이 집의 음식 맛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동네로 필자의 지인들이 놀러 올 때마다 이 가게를 데려왔지만 아직까지 실패한 적이 없다.

 위치는 지하철 4호선 이촌역, 혹은 국철 이촌역 4번 출구로 나와 걸어서 10분 정도 가면 된다. 서울 신용산 초등학교 정문 맞은 편 길에 있다. 영업 시간은 AM 09:30 ~ PM 09:00. 주차는 가게 뒤 쪽의 아파트 단지 안에 할 수 있다.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gertip.com BlogIcon Zet 2007.10.26 09:1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왜케 맛있는 사진이 많은지..ㅠ.ㅠ 맛있겠어요~

  2. Favicon of http://grey-chic.tistory.com/ BlogIcon 필그레이 2007.10.26 22:4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만두국...ㅜㅠ 정말 따뜻한 국물과 함께하는 만두국 최고예요.^_^ 게다가 야밤에 이런 포스팅을 보니..야참으로...만두국을 끓여먹고 싶은...

    언제 한번 만두국먹으러 가긴해야겠어요.원래 이촌동쪽이 좀 비싼동네이긴해요.그래도 외식으로 언제 들러야겠네요.씁...^^

수도원 기행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나한테는 때가 되면 가끔씩 책장에서 꺼내어 쌓인 먼지를 털고 다시 읽기 시작하는 책들이 있다. 쌀쌀한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할 즈음이면 생각나는 책들도 있고 혹은 따뜻한 봄이 온다는 신호가 올 때 쯤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들도 있다. 아니면 첫 눈이 내릴즈음 해서 떠오르는 책도 좋다. 이렇게 이미 읽었던 책들 중에 맘에 드는 것은 몇 번씩 다시 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보통 3~4 번, 많으면 5~6 번 이상씩은 읽은 것들이다. 지금 말하는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도 내게는 바로 그런 책 중 하나이다. 때가 되면 절로 손이 가서 또 한 번 첫 장을 넘기게 되는 책인 것이다.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2003년 11월,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다. 당시 어떤 기사에서 여행을 가기 전 추천할 만한 책으로 이 <수도원 기행>이 목록에 올라와 있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그다지 베스트셀러를 찾아서 읽지는 않는 내 취향 때문이기도 했고, 또 딱히 손이 가지 않던 - 마음이 끌리지 않았던 - 작가라 공지영씨의 책은 그 전에는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 책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읽은 공지영씨 책이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읽어볼 만 하다니 그럼 한 번 읽어 볼까 하고 서점에 가서 책을 사왔다.

 기억에 의하면 아마 책을 산 그날에 다 읽었던 것 같다. 글씨가 작거나 분량이 딱히 많은 편도 아니고, 글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첫 표지를 넘긴 그 순간에 다 읽고 싶게 만드는 그런 매력이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작가도 이야기했지만 이 작품은 수도원을 돌아 다니고 쓴 기행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지영의 사람 기행서>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책이다. 아름다운 풍광과 그 속의 수도원들을 보고 느끼는 것도 좋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서 - 아니, 아름답지 못한 곳이라고 할지라도 -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자체가 작가에게는 더 큰 여행이 되었던 듯 싶으니까. 수도원 기행이라고 하지만 주가 되는 건 수도원이 아니다. 작가가 기행을 하면서 수도원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첫 목적지인 아르정탱의 봉쇄 수도원에서 "짧은 인연, 상대방이 잘된들 내게는 아무런 대가가 없는 인연에도 지극히 마음을 쏟아주는, 그래도 당신들에게는 아무런 보탬도 뺄 것도 없어서 결국은 보탬이 되고야 마는 그런" 호의를 베풀어 주는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그녀의 사람 기행은 시작되었다. 그 후 그녀의 기행을 도와 주신 많은 분들과 낮선 곳에 선 그녀를 반겨 주었던 고마운 이들, 그리고 이름 모를 동네 버스의 기사 아저씨조차 그녀에게는 길 위에서 만나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 마지막에는 작가 자신까지도 이 사람 기행 속으로 녹아 들어가 스스로를 기행하였다.

 책 속에서 작가는 끊임 없이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 또 현재를 이야기한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그녀가 어떻게 힘들었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대략 짐작할 수는 있다. 그래서 이번 기행은 그런 그녀의 과거를 가지런히 하고 새롭게 깨달아가는 기행이기도 했다. 글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졌고 작가가 스스로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가식의 여과 없이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그리 오래도록 찾아 헤맨 목마른 영혼의 해답"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듯이, 여행을 통해서 그녀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답에 점점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녀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은 듯 했다. 내가 보기에 그 해답은 득도에 가까운 깨달음과 비슷하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과거의 우를 생각하며 괴로워했지만, "이제 순종이라는 말의 아름다운 의미를 알 만한 나이가 된" 그녀는 무릎을 꿇고 이야기했다. 아멘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그동안 고민해 왔던 것들이 "그래, 결국 이런 것이었구나. 이래서 날 만드셨구나."라고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언젠가 나도 이런 여행을 떠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볼 거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여행. 무거운 짐 없이 두 손을 가벼이 하고 떠나서 두손 가득히 얻어 오는 여행. 언젠간 나도 할 수 있을까...

덧.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라면 내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서 종교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피정이라던지 영성체 등등. 사전에서도 썩 그럴듯한 답을 찾기 힘들고, 친구들한테 물어 봐도 뭔가 충실한 설명은 되지 못하고. 어디 이런 것에 대해서 좀 이해가 잘 가면서도 쉬운 설명은 없을까.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pennyway.net BlogIcon 페니웨이™ 2007.10.12 14:1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공지영씨 작품은 종교적인 색체가 넘 강해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다 좋은데 그 점 땜에 약간 거북살 스럽더군요 ^^;;

  2. Favicon of http://grey-chic.tistory.com/ BlogIcon 필그레이 2007.10.26 22:4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참 인상깊게 읽은 책이예요.저같은 경우는 이쪽 종교에 관심이 많아서리...^^ 요즘 또 공지영 소설 몇권을 손에 쥐고 있답니다.이 책이후 한동안 읽지 않았는데.역시 가을이긴한가봅니다.책 리뷰 잘 읽고 갑니다..

행복
감독 허진호 (2007 / 한국)
출연 황정민, 임수정, 김기천, 유승목
상세보기

 허진호 감독의 신작인 <행복>의 시사회에 당첨 되어서 영화를 보고 왔다. 원래 허진호 감독의 팬이었던지라 기대를 좀 하고 있었는데, 영화는 솔직히 내 기대치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가히 명작이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전작들인 <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은 간다>에 비하면 좀 부족한 듯 하니까. 그래도 개인적인 팬으로서 수작의 반열에는 올려 주고 싶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허진호 감독의 작품들이 갈수록 아프게 현실적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첫 작품인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경우엔 조금 환타지적인 측면이 있었고, 다음 작품인 <봄날은 간다>에 와서는 꽤 사실적이 되었었다. 그런데 <행복>에서는 그 현실감의 정도가 더 강해졌고, 영화가 더 아파졌다. (<외출>은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 해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이어지는 선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열외로 한다.)

 허진호 감독이 인터뷰 기사에서도 이야기를 했었는데, 자기는 <봄날은 간다>가 나름대로 해피 엔딩이라고 생각하는데 영화를 본 사람들이 슬프다고 한단다. 나도 감독의 생각에 동의하는데 <봄날은 간다>가 슬픈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영화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잘 보여 주니까 사람들이 그 점이 아파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8월의 크리스마스>도 잔잔한 감정만이 흐를 뿐이지 슬픈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행복>은 확실히 아파졌다. 그건 감독의 의도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시대가 점점 더 환타지가 아닌 사실을 요구하기에 영화도 그렇게 바뀌어 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행복>이 더 현실적이 되었다는 건 임수정의 캐릭터인 은희에서 잘 보여지는데, 은희는 어디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지고지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는 캐릭터이다. 화가 나면 욕도 하고, 성질도 부린다. 그리고 그런 점이 은희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황정민이 연기한 영수도 영화 광고의 카피처럼 그렇게 나쁜 남자는 아니다. 자신이 버린 연인 때문에 아파하고, 고민하는 모습은 오히려 순수하고 현실적인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은희(임수정)와 수연(공효진)이 첫 만남에서 서로를 의식하는 장면과 영수 때문에 괴로운 은희가 무작정 달리다가 쓰러지는 장면이다. 영수의 옛 여자와 현재의 여자로서 마주하게 된 은희와 수연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은 그 장면을 팽팽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은희가 시골길을 마구 달리는 장면. 보통 영화에서 마구 달리는 장면이라면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라던지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물론 은희도 가슴에 맺힌 답답함 때문에 달리는 것이겠지만, 보통과 다른 점은 은희는 달리다가 죽을 수도 있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은희가 무작정 달린 건 죽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난 이 장면이 참 슬펐다.

 영화는 곧 개봉이다. 허진호 감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봐도 후회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덧. 그동안 허진호 감독의 작품들을 보면 정말 늘 최고의 자리에 있는 배우들을 써 왔다. 한석규 - 심은하, 이영애 - 유지태, 배용준 - 손예진, 그리고 이번엔 황정민 - 임수정까지. 감독이 좋은 영화들을 만들어 오긴 했지만 늘 이렇게 톱스타들을 쓸 정도로 흥행 감독의 반열에 올라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 보니 영화계에서 허진호 감독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단다. 이것, 저것 행사의 장들을 맡은 것도 많고 중대 연영과 교수로서 영화계 인맥과 파워가 무시하지 못할 만한 수준이란다. 흠, 그래서 늘 좋은 배우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것인가. 어쨌든 좋은 배우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감독으로선 큰 행운임에 틀림 없다.

영화 <행복> 공식 홈페이지 가기.

시사회 현장.

시사회 현장 한 컷.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1004ant.tistory.com BlogIcon 1004ant 2007.10.03 20:2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데뷔작부터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작업을 했군요. ^^; 대단한 감독이란 생각이 듭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7.10.03 20:5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정말 최고의 배우들이었죠. 그것도 역시 허진호 감독의 역량이라고 봐요. 단지 돈만 많이 준다고 작업할 수 있는 배우들은 아닐테니까 말이죠. 시나리오와 감독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2. Favicon of http://goldsoul.tistory.com BlogIcon GoldSoul 2007.10.03 22:1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허진호 감독의 인맥이 그렇게 탄탄했군요. 흐음-
    정말 <봄날은 간다>는 나름의 해피엔딩이였던 거 같애요.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여러번 보고 나이가 드니까 아, 그 결말이 조금의 해피엔딩이였었구나, 싶어요.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시간이 지난 뒤에 곱씹어볼수록 깊은 맛이 났는데, <행복>도 그럴까요?
    아쉬운 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허진호 감독 '다운' 작품이였어요.
    그런데 저는 황정민 캐릭터가 너무 이해가 안됐어요. 계속 나쁜놈,이라고 중얼거렸거든요. ㅠ

    아무튼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저도 트랙백 남길께요. :)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7.10.04 01:1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예. <행복>도 곱씹어 보면 또 새로운 맛을 발견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봄날은 간다>처럼 <행복>도 나중에 다시 보시면 영수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실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3. Favicon of http://unjena.com BlogIcon Hee 2007.10.04 21:3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포스팅에도 썼지만 그 장면도 인상 깊었어요.

    천천히 먹는 게 지겹다면서 나간 황정민..
    혼자 남아 꾸역꾸역 먹는 임수정..

    그 장면부터 좀 지난 뒤에 나오지만 공효진에게 말했던,
    그렇게 사는 게 재미있니? 라는 물음처럼..
    위 장면에서는 임수정에게 그렇게 사는 게 지겹지 않냐고 물어보는 듯해서..
    천천히 먹을 수 밖에 없는 임수정과..그것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내뱉은 황정민..
    혼자 남아 천천히 먹는 임수정의 모습에서 여러 생각이 느껴지던...
    암튼 명작이라 부르는 것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충분히 수작이라 불릴 만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7.10.04 22:4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저도 그 장면, 기억이 납니다.
      사실, 그 장면은 예고편만을 봤을 땐
      굉장히 격한(??) 장면이 아닐까 싶었는데,
      실제 영화에선 지극히 절제된 장면으로 나오더군요.
      그리고 오히려 그래서 더 좋은 것 같아요.

  4. Favicon of http://differenttastes.tistory.com BlogIcon 신어지 2007.10.04 23:4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행복>을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두 사람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거죠. 그 약속을 지킨 셈이 되는 거고 그걸 통해 관객들은 어느 정도의
    위안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황정민이 망가지고 급기야 희망의 집으로
    속죄의 발걸음(또는 뒤늦게 이어가는 은희와의 사랑)을 옮기는 마지막 컷 또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7.10.05 09:5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사실 은희가 죽었다고 해서(음, 스포일러인가..) 영화가 슬픈 엔딩이라고는 생각치 않아요. 영화가 아펐던 건 주인공들의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거든요. 그리고 영화가 아프다는게 슬픈 엔딩이라는 말도 아니구요.

      마지막 컷은 저는 Cinerge님과 좀 다르게 봐요. 오히려 제 생각은 감독이 자료 조사 한 것에서 얘기한 것처럼 더 현실적으로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것이 속죄라던지 혹은 사랑의 연장선이라는 문제는 제게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관점이네요.

  5. Favicon of http://grey-chic.tistory.com BlogIcon 필그레이 2007.10.05 23:2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허진호 감독의 개인적 파워도 작용했겠지만...배우들도 허진호 감독영화라면 사실 크게 거부할만큼 불편한 영화가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요.일례를 들자면 ..홍상수감독 영화는 대부분 여배우들은 기피하려고 한다더라고요.

    이제야 평을 읽으러 왔네요.잘 읽었어요.조근조근 잘 쓰셔서 어찌나 쏙쏙 읽히던지요.^_^

    저도 행복 보고 적잖이 실망은 했지만 허진호 감독 팬으로서 편은 들어주고싶어요.^^하하...장면장면마다 기억에 남지만...툭툭 아무렇게나 던지는 대사들이 기억에 남아요.특히나 공효진이 했던 말들...

    봄날은 간다 까지 디비디를 소장하고있는데 아마도 이 작품도 사버릴꺼같아요.ㅡㅜ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7.10.06 00:0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아,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그런게 있었군요.
      전 홍상수 감독의 영화도 나름 좋아하는데, 흐.

      잘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저도 나중에 허진호 감독의 모든 작품을 DVD로 소장하려구요. 지금은 하나도 없어요.

      트랙백 겁니다. 그럼.

  6. Favicon of http://colorsuri.tistory.com BlogIcon 슈리 2007.10.29 09:0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봄날은 간다가 저도 과정은 슬프지만 과정을 이겨낸 상우의 관점에서 보낸 어느정도 행복함으로 나아가는게 아닌가 싶네요.

파리의 투안 두옹

이미지출처(http://kimsangsoo.com)

파리의 투안 두옹

 - 김상수 사진.산문집

 "파리의 투안 두옹". 김상수 사진, 산문집이라는 출간 당시에는 조금은 독특했던 형식의 책.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중에 제일 아끼는 책 중 하나다. 이 책이 출간된게 98년이니까 내가 고등학교 때였을 거다. 어느날 우연히 신문에 나온 책의 광고를 보고, 그 길로 서점으로 가서 책을 사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놓치지 않고 읽어 내렸다. 뭐랄까, 책이 자유롭기도 했고 그동안은 내가 잘 접하지 못했던 사진, 산문집이라는 독특한 구성도 신선했으며. 또 책에서 두 사람이 나누던 일상의 대화가 내겐 한마디, 한마디 모두 생생하고 깊게 다가왔다.

 그 뒤로 소중하게 간직해 오던 이 책은 간간이 꺼내서 다시 읽을 때마다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게 느껴지고 신선했다. 한번은 투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절절하게 다가왔다면 또 한번은 김상수씨가 고민하던 그 괴로움이 느껴지고, 또 다음에는 그들이 서 있는 그 파리의 모습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난 유럽 여행을 가기 전에 이 책을 다시 한번 꺼내 읽기도 했다.)

 파리에서 만난 한국의 한 예술가와 베트남 이민계 출신의 프랑스인 소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지만 어쩌면 이들의 만남은 시작부터 운명이었을 수도 있다. 우연히 만난 지하철 역에서 저자가 투안에게로 달려가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없었을테니까. 19살의 소녀 의학도와 한국의 예술가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하고, 때론 같은 고민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초판 이후로 절판이 된 책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아 더 소중하기도 하지만 또 책의 용지가 일반 책 종이가 아닌 재생지 느낌의 용지라 더 맛깔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있는 사진들은 때때로 정말 숨이 막힐 정도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은 그 사진들에서 그 흔들림의 순간은 정말 진하게 느껴지니까.

 책이 쓰여질 당시 19살의 의학도였던 투안은 몇년의 시간이 흐른 이제 성형외과 의사가 되었고, 그와 함께 한 새로운 작업은 몇년 전에 같은 이름의 책으로 나왔다. (새로운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나도 불과 며칠 전에 알아서 곧 새로 사 볼 생각이다. 잔뜩 기대된다.)

- 책 속에서...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들은

어디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는가?

어디에서 사람들은

정작 우리를 발견하고자 하는가?

정말로 우리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정작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어디에?

어디에?" - 23p

"미스터 킴. 나도 햇살을 좋아해요!
햇살에는 구김이 없어요. 근심도 사라지고요!
물기가 축축한 것도 금새 마르게 하고요. 풀잎을 보세요! 빛이 비치잖아요!
생 제르망 데프레 인도에 깔린 돌들도 더 단단하게 해 주고요!" - 156p

"소소하게 작은 일상을 생활한다는 것, 그걸 저는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난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당연한 것이 아니고
귀중한 것이라고 알고 있어야 하구요. 저는 제가 태어났고 공부할 수 있고
친구를 사귈 수 있고 또 미스터 킴 같은 외국 예술가도 알게 됐고.
이런 게 저는 행복한거라고 봐요." - 210p

"퐁드 마리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요." - 228p :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이 한 문장은 정말 숨이 막힐 정도다.



Posted by 바위풀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