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리스본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보는 리스본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눈부신 햇살, 그림 같은 집들, 드넓은 푸른 바다까지 모두 다. 몇 주 동안 우중충한 독일의 겨울 하늘만 보다가 이곳으로 오니 거의 지상 낙원에 온 기분이다. 한 겨울에 이런 햇살을 만끽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리라.

리스본

리스본, 햇살 좋은 날

 내 몸의 반만한 캐리어를 끌고 미리 예약해 둔 호스텔을 찾아 갔다. 여권을 받아 체크 인을 하던 카운터의 직원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나를 쳐다 본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야, 믿을 수 없는 걸? 생일 축하해!"
 "헤헤, 고마워."

 이국에서 보내는 생일. 집에서 생일을 보내 본 적이 언제였던지 가물가물하다. 몇 년 전에는 폼페이를 다녀 오는 기차 안에서 생일을 맞았고, 또 강원도에서, 다시 대륙의 서쪽 끝에 와서 생일을 맞이하고 있다. 이날 밤은 호스텔의 친구들과 가볍게 와인으로 생일을 축하했다. 일행과 기타는 하루, 이틀 정도가 더 지나야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리스본

골목길 산책

 크리스마스에는 리스본 구시가 이곳, 저곳을 거닐었다. 아마 우리 나라였다면 정신 없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곳은 한적하기 그지 없다. 이브에는 조용히 예배를 드리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크리스마스 날은 조용히 집에서 휴식을 갖는 것이 유럽의 대체적인 풍경이었다. 물론 밤새 술을 마시고 밖에서 시끄럽게 노는 젊은이들도 있긴 하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언덕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 리스본을 산책하는 것은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내 안에 들어 오는 모든 것들과 시선을 마주하며 거리를 걸었다. 해변을 따라 햇살을 받고 서 있는 파스텔 톤의 집들, 골목 중앙에 얼기설기 얽혀 있는 트램 라인들, 석양을 뒤로 한 채 어둠 속으로 가라 앉는 다리들.

리스본

동화 같은 파스텔톤의 집들

리스본

트램 라인

 숙소로 돌아 오니 일행과 기타가 도착해 있다. 이게 얼마 만인가. 기타와는 헤어진 지 한 달만에 만나는 것 같았다. 모두 무사했구나. 깁스한 손을 들고 기타와 인사를 나눴다. 왠지 멋쩍고도 반가운 웃음. 간만에 회포를 푸는 우리는 다들 이야기들이 한 가득이었다.
 
로카곶, 여정의 끝

 미리 와서 기다리기를 한 시간여쯤 지났을까? 위쪽에 일행과 기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끝이구나. 길었던 시간이었다.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 오는 일행들을 보며 "나도 저기에 함께 있었어야 했는데."라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잘했다. 스스로에게 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부끄럽지 않은 끝을 보았다.

로카곶

로카곶에 간 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

 로카곶 표지판을 지나치면서부터 울기 시작했다는 기타는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다. 그간의 시간이 스쳐 지나가는 모양이다. 다들 대륙의 서쪽 끝을 상징하는 비석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 보는 동안, 난 가만히 서서 바람을 맞아 보았다. 날씨도 좋았고, 하늘은 푸르르고, 바다는 적당히 고요했다. 오늘의 로카곶은 확실히 우리를 반겨 주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 바람이 만나고 싶어 그 먼 길을 달려 왔던 건가 보다. 대륙의 동에서 서까지 참 멀고도 험했던 그 길을......

로카곶

대륙의 서쪽 끝, 로카곶

 한동안 말 없이 바다를 바라 보았다. 때로는 분명히 힘들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즐거웠던 시간들이다. 새벽까지 계속되던 라이딩은 고요한 추억이 되었으며, 몇 겹을 껴 입고 달리던 발칸의 추위는 하얀 설경 속에 포근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언제 또 한 번 이런 시간, 이런 기회를 갖게 될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이 느낌만은 잊지 않고 내 가슴 속에 담아둘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와 같은 시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다시 만나게 되는 시간을 놓치진 않을 것이다.

기타

질질 짜던 기타도 사진 찍을 땐 멋진 포즈를 취했다

나

나도 한 컷,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가 완전 엉망이었다

연재를 마치며...

 많은 사람들이 이 여행에 대해 질문을 한다. "어땠어요?",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무엇을 얻었나요?"

 "좋았어요. 한 번쯤 해 볼만한 경험이었지요."
 "에이, 그게 다예요? 좀 더 길게 얘기 좀 해 봐요."

 그런데 막상 길게 얘기를 할까 하면 또 더 짧게 듣기를 바란다. 한마디로 어땠다라던지 라는 식으로. 하지만 길 위에서의 8개월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마주 했고 많은 생각들을 했다. 무언가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단정 지을 수 없는 경험과 시간들. 이곳에서의 소중한 기억만큼 저곳에서의 추억과 인연도 소중했다.

 시안의 유스호스텔, 파키스탄의 라시드와 소장님,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풍경들, 미로 같던 이란의 야즈드, 터키의 케난과 바키 할아버지, 기대만큼 사랑스러웠던 류블랴나...... 그 속내 하나하나까지 전부 말로는 적지 못한다. 아마 이 여행기는 사람들의 그런 질문에 대한 작은 대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남겨 두는 추억과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청장님이 처음 연재를 해 보자고 했을 때 사실 적잖이 놀랐다. 어디다 내 놓을 생각도 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일기들이었다. 처음 약속 드렸던 것처럼 끝까지 같은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해 죄송스럽다. 더불어 이런 지면을 할애하고 기회를 주신 청장님께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늘 시간에 맞추고자 노력했지만 가끔씩 원고를 늦게 보냈던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말씀 없이 잘 정리해 주시고 업데이트 해 주신 신영주님, 송정아님께도 감사 드린다.

 아울러 부족한 글 읽어 주신, 이곳을 찾아 오는 모든 분들께도 감사 드린다. 언젠가, 어디선가 또 다른 인연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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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damasworld.tistory.com BlogIcon 다마 2008.04.14 23:4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와우~ 직접 작성하신 기사인 모양이네요~ 힘은 좀 들겠지만, 진정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2. Favicon of https://raycat.net BlogIcon Raycat 2008.04.16 21:0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흐 멋진곳을 다녀오셨군여... 언제나 한번 가볼려나...

  3. TomCat 2008.04.18 00:5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수고 하셨어요~

  4. Favicon of http://blog.daum.net/punky_insun BlogIcon 낭만원숭 2012.06.08 08:3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우연히 들어와 여행기를 읽고 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했어요. 멋진 글 덕분에 기분 좋은 밤이었네요.
    감사합니다.^^

한밤의 공동 묘지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기타도 하루 일찍 떠나고, 일행도 무릎 상태 때문에 차량으로 이동을 하기로 결정해서 류블랴나부터 베네치아까지는 혼자서 라이딩을 해야 했다. 여기서부터 베네치아까지의 거리는 대략 300km가 조금 안됐으므로 넉넉히 잡아 3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틀이면 충분히 도착할 것 같았다. 일행과 베네치아에서 만날 호스텔을 정하고 아침 8시 길을 떠났다.
 
 류블랴나를 떠나 슬로베니아를 빠져 나가는 길은 예상 외로 힘들었다. 지도를 보면서 높은 언덕을 하나 정도 지나겠거니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래에서 시작해 꼭대기의 마을과는 고도 차이가 거의 1,000m 정도는 나지 않나 싶었다. 거기에 오르막길의 중간 지점부터 슬슬 끼기 시작한 안개가 정점을 찍은 이후에 굉장히 짙어져서 내리막길은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라이딩을 해야 했다. 마주 오는 차가 거의 5m 안에 들었을 때에야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형광색 조끼를 걸쳐 입고 후미등을 켠 후에 시속을 10km 안팎으로 유지하면서 천천히 내려 왔다.

안개

안개 낀 산길

 높은 고도와 안개 탓에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슬로베니아의 국경 도시에 도착했다. 이미 주변은 어둠이 잦아 들고 있었다. 이 곳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 지는데 내가 가야 하는 곳은 몬팔코네 방향이었다. 다른 쪽으로 가면 해안선을 타고 가 언덕은 없었지만 베네치아까지의 거리가 더 멀었다.

 몬팔코네로 가는 길은 왠지 모르게 스산했다. 오가는 차도 드물고 가로등도 거의 없어 내 랜턴 불빛에만 의지해야 했다. 그런데 그 스산함은 다 이유가 있었다.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길 옆 풀섶으로 들어가 볼 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자세히 살펴 보니 내 앞에 펼쳐진 것이 공동 묘지였다. 늘어서 있는 십자가들과 봉분들. 불빛도 없고 인적도 드문 곳에 공동 묘지라니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난 잽싸게 볼 일을 마친 후 얼른 다시 자전거에 올라 타고 페달을 밟았다. 주위를 둘러 보니 제법 많은 십자가들이 눈에 띄었다. 그 다음부터 몬팔코네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정신 없이 달리고 보니 어느 새 몬팔코네였다. 도대체 왜 그런 한적한 곳에 묘지터가 있었던 것 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적한 곳에서, 그것도 변변한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다시 달리고 싶지는 않던 길이었다.

"Venezia 10km"

 오후 6시,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 "Venezia 10km"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만났다. 드디어 도착이구나. 문득 벅찬 기분이 들었다. 3년 전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언젠가 꼭 다시 와야지 라고 다짐했다. 너무도 아름답고 마음에 들어서 꼭 한 번 더 찾아 오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짐처럼 다시 이곳 베네치아에 왔다. 하지만 사실 그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도대체 누가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제 저 앞에 보이는 다리만 건너면 베네치아였다. 일행은 먼저 도착해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약속했던 호스텔로 찾아 갔지만 그곳에 자전거를 끌고 온 한국인 여행객은 없었다. 게다가 빈 방마저 없어 난 결국 다른 숙소를 잡아야 했다. 화장실도 딸려 있지 않은 작은 방. 이틀 동안 장거리를 뛰느라 누적된 피로가 몰려 왔지만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베네치아에서 이 정도의 숙소라도 감지덕지였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근처 피자 가게에 들러 끼니를 때우고 3년 만의 베네치아 입성을 기념할 겸 이곳, 저곳을 거닐었다. 늦은 시간의 산 마르코 광장을 보고 싶어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는데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길을 찾기가 힘들고 인적도 드문 으슥한 골목길들을 혼자 다니기도 뭣해서 다시 숙소에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대운하

대운하의 밤 풍경

 웬만한 곳에 가서도 길을 잃는 다던지 헤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이곳 베네치아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던 곳이었다. 단지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사람 한 명 지나가기 힘든 좁은 골목길들에 그 끝에 불쑥 나타나곤 하는 수로까지 보고 나면 길을 잃고 정말 무슨 일을 당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운하

수로를 연결하는 수백 개의 다리들이 있다

골목

사람 하나 지나가기 힘든 좁은 골목길

 하지만 그러한 두려움은 곧 새로운 골목, 골목을 탐험하는 재미를 내게 안겨 주었다. 졸업하는 친구를 축하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을 만나고,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에 소품으로 쓰였다는 가면 가게를 만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방이라는, 문 밖으로 바로 수로를 바로 마주하고 있는 서점도 만날 수 있었다.

가면 가게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에 소품을 공급했다는 가면 가게.

베네치아 기행, 진정한 물의 도시

 벨기에의 브뤼헤, 중국의 소주 등은 때로 북유럽의 베네치아, 동양의 베네치아라는 칭호를 듣기도 하는 곳들이다. 그 도시들에도 도시 안을 따라 흐르는 운하들이 있었고 제법 물의 도시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진짜 베네치아에 와 본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네치아

베네치아 풍경

산 마르코 성당

사계절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산 마르코 광장과 성당

 좁은 물길을 연결해 주는 수 백 개의 다리들과 백여 개가 넘는 섬들. 대운하를 따라 운행하는 바포레토와 좁은 수로 사이를 누비는 곤돌라. 문을 열면 바로 배를 타고 외출할 수 있도록 수로와 잇닿아 있는 출입문. 모두 이곳이 아니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풍경들이었기에 "물의 도시"라는 칭호는 오직 이곳 베네치아만이 받을 자격이 있었다.

풍경

베네치아 풍경

곤돌라

곤돌라

곤돌라

곤돌라들은 화려한 장식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베네치아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산 마르코 광장과 성당, 매년 2월의 카니발 축제, 유리 공예로 유명한 무라노 섬,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 섬, 오~솔레미오를 부르는 곤돌리오네가 노를 젓는 곤돌라 등 유명한 관광 상품과 명소들이 많다. 모두 아름답고 멋진 풍경들이고 볼만한 가치가 있다.

카니발 가면

카니발 가면. 사람들은 가면을 썼을 때만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한 베네치안이 말했다

카니발 가면

형형색색의 카니발 가면은 이곳의 특산품이다. 종이로 만들어진 가면들은 굉장히 가벼우면서도 단단하다

 그 중에서도 나는 운하의 도시, 미로 같은 물의 도시라는 이곳 베네치아를 제대로 느껴 보고 싶다면 아무런 계획 없이 걷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곳, 저곳을 거닐면서 대운하를 건너는 3개의 다리도 모두 건너 보고 운하 사이사이로 들어 앉아 있는 집들도 구경하고 물과 공존하고 있는 이곳의 풍경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베네치아를 보는 길인 것이다.

흐린 날

흐린 날의 대운하 풍경. 대운하는 베네치아의 중요한 교통로이다

베네치아 풍경

베네치아 풍경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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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2012history.tistory.com BlogIcon 청춘이다 2008.03.09 01:3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베네치아 정말 신기하군요;;

슬로베니아에 들어오다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
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 시골길 풍경

 자그레브를 떠나 슬로베니아로 들어 오는 길은 골치 아픈 일의 연속이었다. 겨우 30km 남짓한 거리인데도 출발한지 네 시간 가까이 되어서야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탈 수 없었기 때문에 국경으로 향하는 국도를 계속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고속도로의 갓길로 국경까지 갔다. 그 와중에 끝까지 지방도를 찾아 봐야 한다는 기타랑 의견 충돌이 있었고, 또 고속도로로 들어 와서도 경찰에게 설명을 하고 오느라 이래저래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 그렇게 여차여차 해서 국경까지 왔지만 슬로베니아에서의 라이딩도 만만치 않았다. 이곳에서도 계속 지방도를 타고 가야 했는데 가지고 있던 지도와 도로 표지판이 잘 맞질 않아 한참을 헤맨 후에야 제대로 된 길을 찾곤 했다. 그렇게 슬로베니아에서 첫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해서 류블랴나에 들어온 시간은 밤 여덟 시가 다 되어서였다.

식당

국도변 휴게소 식당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류블랴나

드래곤 브리지

류블랴나의 상징, 드래곤 브리지

 이런저런 고생 끝에 류블랴나에 도착한 나는 작은 기대감에 차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광양의 지인 집에 들를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처음 보는 월간지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류블랴나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었다.

 "류블랴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도시가 간직한 그만의 아름다움 때문에 얼마 전부터 서유럽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광지로 주목 받기 시작하고 있는 곳이다."
 
 이 중에서 내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도시의 이름이 간직하고 있는 뜻이었다.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래서 난 전에는 들어 보지도 못했던 이 도시에 대한 작은 환상을 간직한 채로 이 곳에 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집

수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집들의 풍경

 그리고 류블랴나는 그런 나의 기대를 저 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작은 도시라 세 시간 정도면 전체를 다 보기에 충분할 거라고 얘기했지만 천천히 구석구석의 숨겨진 아름다움들을 보고 있자니 그 정도 가지고는 부족했다. 오래된 류블랴나 성에도 올라가 보고, 수로를 따라 걸으며 색색의 집들이 서 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중심가의 광장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파는 길거리 가게들, 맥도날드가 있는 시내 중심가도 재미 있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이곳 저곳에서 새로운 풍경들이 눈을 사로 잡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류블랴나

류블랴나 시내

농구장

호스텔 옆의 농구장은 온 벽이 그래피티로 가득 차 있었다

 오후 늦게 올라간 류블랴나 성에서는 얕게 깔려 있던 구름 사이로 새어 들어와 온 도시를 비춰 주는 햇살을 만났다. 마치 태양마저도 이 도시가 왜 사랑스러운 곳인지 알려 주려는 것 같았다. 구석구석에 따스한 햇살을 드리우면서 '여기 좀 봐 줘."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류블랴나

따뜻한 햇살이 도시를 비춰 주었다

베네통

거리를 걷다가 발견한 가게. 완전히 베낀 가짜인 줄 알았는데 진짜 베네통에서 나온 이너웨어 브랜드였다

안녕, 기타

 터키에서부터 3주 정도를 함께 했던 기타와 헤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류블랴나에서 하루 더 휴식을 취하는 동안 기타는 먼저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기타는 이곳을 떠난 후에 베네치아를 거쳐 피렌체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랑 경로도 조금 달라졌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기타를 붙잡고 밤에 미리 사 두었던 쵸콜렛 한 봉지를 비상 식량으로 쥐어 주었다. 제법 많은 얘기도 나누고 친해졌었는데 이렇게 헤어지려니 조금 아쉬웠지만 서로의 길이 있었기 때문에 붙잡을 순 없었다. 대신 모두 다 무사히 리스본에 도착해서 꼭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떠나는 기타를 배웅했다.

기타

기타가 떠나던 날 아침 함께 사진을 찍었다

조지아 주 아가씨, Chloe + Leah

도미토리

평화로워 보이던 도미토리의 아침 풍경

 호스텔의 도미토리에 커다란 기타를 둘러멘 아가씨 두 명이 들어 왔다. 낮에 시내에서 만났던 길거리 예술가들이었다.

 "안녕. 조지아에서 온 Chloe야."

 옆에 있던 친구가 말을 건넨다.

 "조르지아(그루지야 - 독립국가연합)?"
 "아니, 아니. 조지아 주(state). 미국에서 왔어."

 둘은 미국에서 온 자매였는데 간간이 공연을 하며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 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쾌활함으로 가득한 이들은 방에 들어 와서도 이리저리 인사를 하며 분주하더니 밤에 호스텔 뒤쪽의클럽에서 공연이 있다며 사람들을 초대했다. 활기차게 휘젓고 다니는 둘이 있으니 방 안의 분위기도 왠지 모르게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날 밤의 공연은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쌉싸름한 맥주 한 잔과 함께 감상한 둘의 음악은 컨츄리 뮤직부터 랩까지 다양했는데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실력도 괜찮았다.

Bar Ch.0

공연이 있던 Bar Ch.0

 이들의 다음 목적지는 이탈리아였는데 이곳 저곳 공연할 곳을 찾아 다니며 여행을 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으니 기타 하나 달랑 매고 떠나는 여행도 무척이나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음악 여행, 혹은 사진 여행처럼 목적이 있는 여행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음악과 함께 하는 여행, 사진이 있는 여행 정도가 적당한 표현일 것 같다. 음악이나 사진,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이들의 쾌활함은 둘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때로 이들처럼 주변 모두에게 즐거운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과의 만남은 간혹 여행에 지쳐 있던 다른 이들에게 작은 활력소가 되어 주기도 한다.

Chloe+Leah

조지아 주 아가씨, Chloe + Leah

  기타도 떠나고, 일행의 무릎 상태도 좋지 않아 이곳부터 베네치아까지는 혼자만의 라이딩을 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살짝 긴장해 있던 나에게 이 음악 자매와의 만남은 한 알의 비타민 같은 것이었다. 약간 경직되어 있던 몸도, 마음도 풀리고 새로운 기운으로 자신을 충전할 수 있었다. 그래, 이제 또 힘을 내서 달려 봐야지. 이곳만 떠나면 드디어 이탈리아, 이제 목적지인 리스본도 눈 앞에 보이고 있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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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코 크로캅의 고향, 크로아티아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고속 도로변의 숙소를 출발한 지 한 시간 만에 국경에 도착했다. K-1 선수 미르코 크로캅의 고향이기도 한 크로아티아는 같은 이유로 기타가 제일 기대하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 크로캅은 자국에서도 유명 인사인 모양이었는데 길에서 만난 한 꼬마는 자기가 크로캅의 팬이라며 말을 걸어 오고, 자그레브에서 만난 한 경찰은 크로캅이 자신의 무술 교관이었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실제로 크로캅은 경찰 출신이었기에 자신의 별칭을 그렇게 정했고, 크로아티아에서는 국민 영웅 정도의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기타

기타 노부유키, 크로아티아 입국 기념 킥!

  크로아티아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경찰들이 고속도로로 라이딩을 하는 것을 금지하여 국도로 라이딩을 해야 했다. 하지만 거리는 좀 더 멀어지고 길 상태는 안 좋아졌을지 몰라도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넉넉한 교외 풍경들과 동네 사람들을 만나는 맛은 더해졌다.
 
 입국 첫날은 국도 라이딩의 여파로 예정보다 거리가 길어져서 거의 40km를 넘게 더 달렸는데 야간 라이딩 중에 굉장히 멋진 풍경을 만났다. 분명히 달이고 어두운 하늘엔 별까지 떠 있었는데 달이 마치 석양처럼, 아니 그보다 더 붉게 물들어 있던 것이다. 그렇게 붉은 달을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사진만 언뜻 보면 마치 지는 해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붉은 달

붉은 달

 둘째 날은 함께 라이딩을 하던 일행의 무릎 상태가 많이 안 좋아져서 예정보다 일찍 숙소를 잡았다. 예전에 한 번 다친 적이 있는 무릎이라 했는데 계속된 라이딩 때문에 무릎에 피로가 누적되었던 것이다. 결국 다음 날은 기타와 나만 라이딩을 하고 일행은 차를 타고 이동한 후 자그레브에서 함께 합류하기로 했다.

 기타와 둘이서만 라이딩을 하다 보니 한국에서부터 함께 했던 일행이 얼마나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존재인지를 문득 깨닫게 되었다. 때론 서로 불편한 시간도 있었고 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을 함께 했던 지금까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힘이 되 주고 있던 것이다. 자그레브에 도착하면 다시 기운을 차려 꼭 함께 달려야지라고 생각하며 난 다시 힘차게 페달을 굴렸다.

당구

식사 시간을 이용한 당구 한 판. 지는 사람이 내는 거야?

한적한 일요일 아침의 자그레브

 자그레브에서 첫 산책을 시작한 아침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문을 연 가게도 적었고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몇몇 사람들과 트램을 기다리는 사람들 조금을 빼면 인적이 드물었다. 구름이 짙게 낀 하늘은 도시에 고색을 더하려는 것 같았지만 대개가 현대식으로 리노베이션된 건물들은 그다지 옛스러울 것이 없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터벅터벅 걷다가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시내 주변부에 있는 작은 성당이었다. 마침 내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미사가 시작되었는데 대여섯 명의 현지인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도시의 조용한 분위기에 빠져 있던 나도 잠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차분하게 앉아 있다가 성당 밖으로 나왔다. 오후에는 미리 팜플렛을 봐 두었던 <Nordic Cut>이라는 사진 전시회에 다녀 왔다. 많지는 않지만 다양한 스타일의 사진들을 보여 주는 전시회였는데 세가지 색의 아크릴판으로 한 장의 사진을 삼등분해 보여 주고 있는 사진과 거대한 숲 속에 조명을 비추고 나무들에 여러 다국적 기업들의 상징이 표시되어 있는 사진이 인상 깊었다. 두 명의 소녀가 높은 지붕 위에서 서로를 향해 질주하려 하고 있는 <Game #1>이라는 사진이 있었는데 작가 정보를 보니 곽현진, 한국 사람이다. 소속이 Helsinki School인걸 보니 아마 그쪽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인 듯 했다. 낯선 나라에서 이런 사진전을 본 것도 흥미로웠는데 마침 그 속에 한국인 작가도 있다니 더 재미있었다.

자그레브

자그레브 시내

 야경을 찍으러 시내 중심가를 돌아 다닐 때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한 떼의 단체 관광객을 만났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기에 별 신경은 쓰지 않고 지나갔는데 조금 더 걷다 보니 국내 최대 규모의 여행사 이름이 적혀 있는 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이런 곳까지 패키지 여행 상품이 있나 보다. 제법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인 관광객들을 만나니 조금은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정말 여행사를 통해 못 가는 곳이 없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수요가 있는 곳이면 상품을 만들어 팔기 때문에 찾아 보기만 하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다. 선택의 폭이 다양해진다는 점에서 좋기는 했지만 때로는 무작정 발 닿는 범위만 늘리는 것 같아서 걱정 되기도 한다.

자그레브

자그레브

 일행의 무릎 상태가 나아지질 않아서 이곳 자그레브에서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까지 다시 나랑 기타만 라이딩을 하기로 했다. 슬로베니아에서 일행과 합류할 숙소를 정한 후에 잠자리에 든 내 머리 속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곳에서는 다시 몸이 나아져서 함께 달렸으면 좋았을 텐데 계속 몸 상태가 나아지질 않으니까 걱정이 되었다. 기타랑도 류블랴나에서쯤 헤어질 예정이었고 이제는 다시 나랑 일행 둘만 남게 되니까 서로 잘 의지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오래 누적된 무릎의 피로가 쉽사리 풀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난 "며칠 더 쉬면 나아지겠지, 잘 될거야."라고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내일이면 슬로베니아로 입국한다. 아마 또 새로운 날을 맞고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겠지.

기타

기타. 크로캅을 추억하는 거야?

<어린 왕자> 컬렉션
 
 앙투앙 드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몇 번을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점을 발견하고 날 감동시켰다. 중국의 시안에 머무를 때, 문득 이번 여행에서 <어린 왕자> 책을 모으면 괜찮은 수집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각 나라에서 그 나라 말로 된 <어린 왕자> 책을 사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직접 그 나라에서 책을 사는 것이었기에 스스로에게 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잠깐의 생각으로 시작된 책 모으기는 크로아티아까지 이어졌다.

 자그레브를 떠나는 날 아침, 출발하기 전에 제일 먼저 책방에 다녀 왔다. 책방에는 세 종류의 <어린 왕자> 책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나라들 중에 종류도 제일 많고 책의 디자인도 예뻐서 고르기가 쉽질 않았다. 그 중에서 중간 크기에 하드 커버, 사이사이 칼라 삽화도 잘 들어가 있는 책을 고르고 나니 가격이 90 쿠르나. 오늘 크로아티아를 빠져 나갈 예정이었기에 마침 내게 남아 있던 돈은 89.95 쿠르나였다. 하지만 환전소가 문을 열려면 아직 1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고 또 출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생각하니 무작정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친절해 보이는 종업원에게 조금 부족한 돈으로 살 수 없겠냐고 물어 보니 흔쾌히 그렇게 하랜다. 내가 돈이 부족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가 미안하다며 책을 포장해 주는 직원과 원하는 책을 샀다는 기쁜 마음에 자그레브에서의 마지막 날은 기분 좋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선물이나 기념품, 더군다나 나 자신을 위한 물건은 거의 사지 않는 편이다. 여행 중에는 충동 구매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필요 없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왕자> 컬렉션은 지금까지 내 여행 중에 가장 잘 샀던 것들이라고 느끼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 컬렉션이 내 방에서 최상석에 자리하게 될 것이다. - 애석하게 이란 편은 우편 운송 중에 사라져 버리고 이제 한국을 포함해 13개 나라판만 있는데 앞으로 전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언어의 <어린 왕자> 책을 모으는 것이 소박한 한 가지 희망이다. - 여행을 할 때 면세점에서 기념품을 사는 것도 좋지만 <어린 왕자> 책처럼 자신에게 소중한 의미가 될 수 있는 물건을 한 가지 골라서 모아 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를 더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크로아티아 라이딩

One Fine Fall Day. 크로아티아 입국 첫 날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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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east2.tistory.com BlogIcon east 2008.02.02 06:0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어린왕자 책을 좋아하시는 군요.
    저도 여행하는 내내 읽을거리로 어린왕자를 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여행내내 영문판을 외우는것을 목표로 가지고 다녔는데 ^^
    나라별로 어린왕자 컬렉션 13개나 가지고 계시다니 부럽습니다.
    나만의 전리품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게 아쉽기도 하고요.. 여행기 잘보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02.02 19:0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잘 보고 계신다니 감사합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여유가 생기면 모은 책들을
      전시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갖고 싶어요.

  2. Favicon of http://grey-chic.tistory.com BlogIcon 필그레이 2008.02.03 01:1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헉...이런 반가운 연재를 하고 계셨군요.블로그 쉬느라 몰랐어요.좀 둘러보다 가겠습니다.^^

새벽의 라이딩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괴뢰메에서의 짧은 휴식을 끝내고 앙카라를 향해 출발한 시간은 오전 10시. 페이스를 높이지 않고 천천히 달려 첫 번째 호텔이 있는 도시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라이딩 거리도 80km 정도로 길지 않았다. 조금 고민하던 우리는 70km 정도 떨어져 있는 다음 도시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오늘은 컨디션도 좋았으니까 그 정도는 무리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 도시에 도착한 시간이 밤 11시. 이제는 라이딩 거리도 150km가 넘었고, 시간도 늦었다.

 그런데 지도 상에 표기 되어 있던 크기와 달리 도시의 규모가 작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이 곳에 있는 호텔은 단 하나. 할 수 없이 오늘은 거기서 자야만 했다. 그런데 물어 물어 찾아간 호텔의 주인 아저씨가 예상보다 비싼 가격을 불렀다. 깎아 주지도 않는다. 두 사람에 40이라고? 내가 보기엔 그것의 반만 받아도 충분한 호텔 규모인데.

 일행과 밖으로 나와 고민을 하고 있자니, 아까 길을 알려 주었던 사람들이 다가왔다.

 "호텔 찾았네. 왜 나와 있어?"
 "응. 생각보다 너무 비싼데요. 주인이 두 사람에 40(forty)을 달래요."
 "14(fourteen)라고? 그럼 정상 가격인데. 한 사람에 7(seven)씩."
 "응? 40(forty)이 아니라 14(fourteen)라고요?"

 이런, 일행과 나 모두 속에서 울컥한다. 호텔 주인은 도대체 몇 배를 더 부른 거야. 마침 뒤늦게 나와 얘기를 듣던 주인이 조금 멋쩍었던지 20으로 값을 내린다. 그 이하는 못 받겠단다.

 "제길, 웃기고 있네. 아저씨나 자."

 잔뜩 화가 난 우리는 결국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20~30km 정도 더 가면 국도변에 호텔이 하나 있단다. 시간은 이미 열 두시가 다 되었다. 별 수 없지. 저 호텔에서 잘 수는 없으니까. 근처 슈퍼에서 요기를 하고 다시 페달을 굴리기 시작했다.

 야심한 밤. 일행이 저 멀리 앞서 가고 나니, 들리는 건 내 숨소리와 멀리서 들려 오는 벌레 소리뿐이다. 앞서 가는 일행의 후미등이 가물가물해져 갔다. 차도 다니지 않는다. 완벽한 적막. 왼쪽으로는 누군가 불을 놓았는지 달빛 아래 불꽃이 너울대고 있었다. 잠시 페달을 멈추고 불꽃을 보았다. 왜지? 화전도 아니고 이런 곳에 불을 놓는 이유는. 작게 시작된 불꽃은 곧 크게 넘실대며 넓은 들판을 삼킬 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다시 페달을 굴려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다음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한 시가 넘어서였다. 국도변 휴게소에 함께 있던 작은 호텔. 라이딩 거리는 180km가 넘었다. 이제는 더 재고 할 것도 없었다. 호텔에 짐을 푼 우리는 곧 잠에 빠져 들었다.

 여담이지만 우리는 다음 날 아침 11시에 출발해서 오후 2시에 만난 첫 번째 호텔에 바로 짐을 풀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었다. 호텔을 만난 순간 서로 돌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으니까. 역시 새벽 라이딩의 여파는 컸다......

짙게 깔린 먹구름 아래의 이스탄불

이스탄불

짙게 깔린 먹구름 아래의 이스탄불

 동-서양의 가교. 한 도시 안에서 아시아와 유럽이 공존하는 곳. 성당이자 이슬람 사원인 아야 소피야와 그랜드 바자가 있는 곳. 차도르를 두른 부인과 미니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많은 수식어를 갖고 있는 곳, 이스탄불. 한국을 떠난 지 5개월 14일째, 드디어 이스탄불에 들어 왔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때는 마침 우기가 시작되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이스탄불에 머무르는 8일 동안 맑은 날보다는 흐린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아야 소피아 앞

아야 소피아 앞.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아저씨

밤 풍경

비에 젖은 이스탄불의 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이스탄불에 매혹 당해 버렸다. 비가 내리는 이 곳에서 나를 사로 잡은 건 유명한 아야 소피아도, 그랜드 바자도, 보스포러스 해협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비 내리는 이스탄불의 정경이었다.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사원의 모습들. 비에 젖어 반짝거리는 길 위의 돌들. 색색의 우산의 든 채 거리를 걸어 가는 사람들. 짙게 깔린 먹구름이 드리운 마르마라 해.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이스탄불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미 그것만으로 충분한 아름다움을 발한 채.

 4일째 되는 날은 잠시 해가 비쳐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순환하는 유람선을 탔다. 하지만 이미 흐린 날의 이스탄불에 푹 빠져 버린 내게 맑은 날의 이스탄불은 그리 와 닿질 않았다. 햇살이 비치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아름답다 해도 이미 내 마음 속엔 적당히 흐린 날의 이스탄불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루 모스크

아야 소피아에서 바라 본 블루 모스크

 물론 아야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 그랜드 바자와 보스포러스 해협 등도 이스탄불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곳이고 누군가는 단지 그곳을 보는 것만으로 이곳에 온 보람을 느낄 만큼 아름다운 곳들이다. 그저 이미 흐린 이스탄불에 사로 잡혀 버린 나에게 그만큼 와 닿지 않았을 뿐.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한국 사람들도 많이 오는 곳이기에 곳곳에서 한국인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고, 또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도 몇 군데 있다. 그런 곳을 찾아가면 여행 정보 등도 얻을 수 있고 오랜만에 우리 말로 실컷 떠들며 회포를 풀 수도 있다. 단, 한국인이라고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는 문제가 발생한 한국인 여행객으로 가장해 다른 한국인 여행객들을 등쳐 먹는 사례들이 가끔씩 보고 되고 있으니 조심하자.

수산물 시장

골든 혼 옆에 있는 수산물 시장

아가미 꽃

생선의 신선도를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인지, 마치 꽃처럼 아가미를 뒤집어 놨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 - 아야 소피아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에서 그랜드 바자와 함께 제일 유명한 곳일 것이다. 기원 후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에 의해 세워진 성 소피아 성당은 그 후 약 10C간 성당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 왔다. 그러다 15C 무렵,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이스탄불 - 당시는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후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 이 점령 당하면서 성 소피아 성당도 그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투르크 인들은 이 성당을 파괴하지 않았고 - 바로 이 투르크인들의 아량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멋진 건축물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 단지 몇 가지를 더하여 자신들의 회교 사원으로 사용했으며 근세까지도 아야 소피아는 중요한 회교 사원 중 하나였다.

아야 소피아 내부

아야 소피아 내부

 그렇게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예전의 기억들이 희미해져 가고, 이곳이 성당이었던지도 잊혀져 갈 즈음 우연히 드러난 회벽 안쪽에서 발견된 기독교 모자이크 벽화들이 이곳의 옛 역사를 현세에 되살려 주었다. 그리고 터키 정부는 이곳을 한 종교의 전유물로 두지 않고자 회교 사원도 성당도 아닌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참으로 멋진 결정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내부에서는 회벽에 뒤덮인 옛 기독교 모자이크 벽화들을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 계속 진행 중이며 이 곳을 보기 위해 일년 내내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다.

모자이크 벽화

벗겨진 회벽 사이로 드러난 모자이크 벽화는 굉장히 화려해서 당시 이 곳의 영광을 엿볼 수 있다

신성한 종교 의식 - 수피 댄스

 이스탄불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중의 또 하나는 수피 댄스이다. 이제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식당의 무대에서 저녁 공연으로 열릴 정도로 그 신성함과 가치가 격하되었지만 원래는 이슬람의 한 종파인 수피교의 수행자들이 추는 춤이다. 커다란 치마와 모자를 쓴 수행자들이 한 없이 빙글빙글 제자리를 도는 춤인데 짧게는 십분, 길게는 삼심분 가까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이때 한 손을 위로, 다른 한 손을 아래로 향하는 것은 하늘, 그리고 땅과의 교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행자들이 한 없이 돌며 춤을 출 때는 너풀거리는 옷자락이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데 그 아름다운 형태가 수피 댄스를 보고 싶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난 좀 제대로 된 수피 댄스를 감상하고자, 전통 종교 단체의 공연을 따로 예약해서 보았는데 제대로 된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만 빼면 들인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하나, 둘 씩 나오기 시작한 수행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끊임 없이 돌며 교감을 꾀하는 그 모습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수피 댄스 공연

수피 댄스 공연

 이스탄불에서는 상당히 많은 곳에서 수피 댄스 공연을 광고하고 볼 수 있는데, 주점의 무대에나 올라오는 공연보다는 조금 더 제대로 된 공연을 보기를 추천한다. 그 중 하나는 지금은 운행이 중단된 오리엔탈 특급 열차의 종착지였던 중앙 기차역에서 하는 공연이다. 이곳은 카메라 셔터 소리조차 방해가 될 만큼 경건한 분위기에서 제대로 된 수피 댄스를 느껴 볼 수 있다.

수피 댄스 공연

수행자들은 쉴 새 없이 빙글빙글 돌면서 무아지경에 빠져 들고 하늘과의 교감을 꾀한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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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jjajan.tistory.com BlogIcon 짜잔형 2007.12.22 10:5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자전거 여행을 하시나봐요... 자유로운 영혼이 부럽습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7.12.24 23:2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게 제 희망사항 중 하나예요~
      지금은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터키에 들어 오다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터키 입국

터키 입국 기념. 저 멀리 트럭이 보이는 곳이 국경이다

 오루미예를 출발해 터키와 이란의 국경인 세로 검문소를 지나 터키에 들어 왔다. 사실 이란에서 라마단 - 이슬람력으로 아홉째 달은 아침 해가 뜬 후부터 저녁 해가 지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이슬람의 금식/금욕 기간 - 이 시작하기 전에 터키에 들어 오려고 며칠간 조금 더 피치를 올려 달려 왔다. 터키도 이슬람 국가이지만 정교 분리가 정식 정책인 국가이니 라마단 기간이라도 이란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란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시골 지역들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라마단이라도 여행자들은 예외가 되긴 하지만 실제적으로 문을 열고 음식을 파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터키 입국 후 첫날의 목적지는 국경에서 40km 정도 떨어진 유세코바였다. 그런데 국경을 넘으면서 생각보다 오르막길이 많아 체력이 많이 떨어졌고 이후에도 포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길들이라 계속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오후 세 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볼 일도 보고 싶고 슈퍼에 들러서 먹을 것도 좀 살 요량으로 길 옆에 있던 마을 안쪽으로 무작정 들어 갔다. 그런데 안쪽으로 들어가도 가게 같은 건 보이질 않고 그냥 집들뿐이다. 호텔이라고는 당연히 없는 곳이고.

 어찌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마침 마을 안쪽으로 승용차 한 대가 들어 간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시선을 교환한 우리는 운전자에게 하룻밤만 재워 줄 수 있냐고 손짓, 발짓을 해 가며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운전자가 오케이를 했다.

바키 할아버지네 집

바키 할아버지네 집.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자, 손녀까지 모두 한 집에 살고 있다

 알고 보니 그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이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손녀, 손자들까지 온 가족이 한 집에 함께 살고 있었다. 집 안의 어른인 바키 할아버지는 말도 제대로 안 통하고 행색도 이상하게 생긴 외국인들 두 녀석이 와서 재워 달라고 하는데도 선뜻 반겼다. 따로 방을 내주고 식사도 챙겨 주고, 또 차까지 주면서 극진한 손님 대접이다. 밤에는 쌀쌀할지 모르니 두꺼운 이불을 덮으라며 챙겨 주기까지 했다. 비록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조금 서먹서먹하긴 했지만 잘 대해 주려는 마음만은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바키 할아버지의 가족 사진

아침 식사

할아버지와 함께 한 아침 식사. 요거트, 난, 차이

 다음 날 아침, 이것 저것 대접 받은 것들이 고마워서 떠나기 전에 가족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러자 온 가족들이 들떠서 사진 찍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통에 서먹할 틈도 없다. 아이들은 어른들 손에 이끌려 열심히 꽃 단장을 하고 딸들도 예쁜 옷을 챙겨 입느라 바빴다. 러닝 차림으로 아침을 함께 했던 바키 할아버지도 어느새 말끔히 차려 입었다. 게다가 가족들뿐만이 아니었다. 밖에 나가니 할아버지의 동네 친구들 몇 분까지 사진을 찍기 위해 와 있었다.

가족 사진

할아버지네 가족과 동네 아저씨들까지 다 같이 모였다

가족 사진

할아버지와 친구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함께

 모든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사진을 찍으려 하니 프레임 안에 꽉 차는 것이 정말 대가족이다. 그것도 아들들은 다 나온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가족들끼리 한 컷, 할아버지와 동네 아저씨들과 또 한 컷, 또 아이들과 할아버지들만 한 컷. 가족들 독사진도 찍어 주었다. 모두들 너무 즐거워하면서 사진을 찍으니 받은 만큼은 못해도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딸

인자한 표정의 할머니와 딸

할머니

조금 닮은 것 같다

손녀 딸

부끄러워 하면서도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귀여운 손녀딸

쿠르드족 양치기 청년 케난

 바키 할아버지네 집을 떠나 또 열심히 달렸지만 오늘도 목적지는 멀어만 보인다. 오후 5시가 다 되었는데 아직까지 목적지까지는 20km 정도가 남은 상황이었다. 어제의 성공에 고무되어 있던 우리는 또 민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주변을 둘러 보니 저 멀리 들판에 양떼를 몰고 가는 청년이 보인다. 좋아. '헤이~. 여기~. 우리 하루만 재워줄 수 있겠니?'

케난

케난. 내 자전거 헬멧을 쓰고 기념 사진을 찍고 싶어해서 사진을 찍어 줬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친구가 바로 양치기 청년인 케난이었다. 재워 달라는 우리의 말에 별 고민도 없이 선뜻 승낙한다. 케난이 사는 곳은 터키 동남부의 작은 마을 '오메로와'라는 곳이었다. 딱 보기에도 도시 문명과는 거리가 먼 시골 국도변의 작은 마을이었다. 우리가 케난을 따라 자전거를 끌고 그의 집으로 가는 동안 동네 꼬마 녀석들이 신기한 구경 거리가 생겼다는 듯 우리를 졸졸 따라 왔다. 녀석들 눈에는 커다란 자전거와 짐 꾸러미를 끌고 들어오는 외국인 녀석들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케난과 마을 어른들의 호통 몇 번에 쫓겨 나긴 했지만 그 동안에도 우리로부터 호기심 어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오는 외국인이 아닐까 싶었다.

동네 청년들

우리를 보기 위해 모인 동네 청년들과 함께. 마침 정전이 되어 가스등을 켜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궁금했던 건 동네 꼬마 녀석들만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케난의 집에는 온 동네 청년들이 우리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 들었다. 완전히 동네 사랑방이 된 것이다. 다 같이 모여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들이 쿠르드족임을 알았다. 알고 보니 이 마을은 쿠르드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케난네 집은 케난과 누나, 남동생 그리고 어머니가 한 집에 살고 있었다. 케난의 어머니와 누나는 낯선 이방인들이 불쑥 찾아 갔는데도 거리끼지 않고 우리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케난네 집은 한눈에 보기에도 어려운 살림이었는데 우리 때문에 모여든 동네 청년들에게까지 식사 대접을 하느라 오히려 우리가 미안해졌다. 하지만 또 힘들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우리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려는 케난과 식구들의 마음은 정말 너무 고마웠다.

오메로와 마을의 동네 사진사

 다음 날 아침에도 우리는 여전히 마을의 최대 관심거리였는데, 난 아침 일찍부터 마을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준다는 명목하에 끌려 다니며 온 동네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 집에 들어 가서 가족 사진을 찍어 주고, 또 저 집으로 옮겨서 가족 사진을 찍어 주었다. 집 공사를 하고 있던 마을 이맘 부부의 사진도 찍어 주고, 포경 수술을 하고 침대에 누워 있던 꼬맹이 녀석들의 기념 사진까지 난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그날 아침 난 완전히 오메로와 마을의 동네 사진사였다.

동네의 이맘 부부

마을의 이맘 부부

그네

그네를 타던 아버지와 딸

엄마와 딸

엄마와 딸. 정말 많이 닮았다

포경 수술

포경 수술을 하고 침대에 누워 있던 두꼬마 녀석. 녀석들은 꼼짝도 않고 가만히 누워 앞에 있는 TV만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곳을 여행해 봤지만 이 곳 사람들처럼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처음이었다. 동부의 쿠르드족들뿐만 아니라 터키 전역에서 그랬다. 길 옆에서 땅을 파고 있던 공사장 인부도 사진을 찍어 달라 조르고, 가게에서 옷을 팔고 있던 점원도 갑자기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터키 사람들의 특성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사람들이 렌즈를 의식하지 않아 수월한 면도 있었고, 또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담을 수 있어 좋았다.

트럭 만물상

마을에는 만물상 트럭이 가끔씩 들어 왔다

아이들

트럭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동네 아이들

쿠르드족과 PKK

 얼마 전 터키 정부가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을 토벌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쿠르드족 문제가 또 한동안 이슈로 떠올랐었다. 흔히 쿠르드족 문제 하면 제일 먼저 사람들의 뇌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PKK(쿠르드 노동자당)이다.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는 단체로서 특히 터키 동부 지역에서  터키군에 대항해 오랜 투쟁을 벌여 오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난 바키 할아버지와 케난네 가족은 언론에서 보여 주는 쿠르드족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만난 것은 그저 우리와 똑같이 정 많고, 친절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방송에서 보여 주는 총을 들고 투쟁을 외치는 쿠르드족의 모습은 이들의 일부일 뿐 결코 전부가 될 순 없는 것이다.

 물론 바키 할아버지와 케난 모두 스스로 터키 사람이라 말하면서도 또 쿠르드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단지 그들은 피를 보는 투쟁보다는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들에게서, 또 그들이 모여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언론에 나오는 쿠르드족의 모습을 찾는 건 친절한 쿠르드족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바키 할아버지, 그리고 케난. 비록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서 많은 얘기 나누지 못했지만 잘 해주고 싶어하는 두 사람의 마음만은 정말 잘 받았어요. 오랜 여행에 지쳐 있던 내게 두 사람의 호의는 정말 큰 힘이 되었답니다. 내가 언젠가 꼭 다시 찾아 갈께요. 그때까지 두 사람 모두 건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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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강도였던 거야?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이란에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신용 카드나 현금 카드 등을 사용할 수가 없고 오직 현금만을 환전해 쓸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란 입국 전에 미리 한 사람에 몇 백 달러씩을 준비했다. 예상대로라면 넉넉히 이란을 빠져 나갈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체류 기간이 계획보다 길어지고, 지방 숙소들의 물가가 생각보다 비싸면서 문제가 생겼다.

 당장 하루치의 숙소비를 쓰고 나니 물 한 통 사 마실 돈마저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하루하고 반나절은 더 걸려야 테헤란에 들어 가는데 이대로는 잠자리는커녕 밥조차 굶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테헤란까지만 들어 가면 알고 지내는 교민분이 계셔서 그 분을 통해 한국에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내일 아침 도시를 빠져 나간 후에 테헤란까지 히치를 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아침 40km 정도를 달려 도시의 외곽으로 빠져 나와 히치를 시도했다. 몇 대의 차가 그냥 지나간 후에 화물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우리는 잽싸게 기사에게 달려가 테헤란, 테헤란을 외치며 자전거와 짐을 가리켰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는 우리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 저 앞에 가면 경찰서가 있다고만 계속 이야기했다. 아마 우릴 태워 주는 게 문제가 되진 않을지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우린 여권에 있는 이란 비자를 확인 시켜 주면서 "아저씨, 폴리스 노 프라블럼. 비자, 비자."라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계속 고민하던 아저씨는 마침내 우리 보고 짐을 싣고 차에 올라 타란다. 아저씨 맘이 변하기 전에 빨리 타야지 하고 잽싸게 짐을 실은 후 조수석에 앉았다. 차가 출발한 후, 기사 아저씨가 조수석 앞에 있던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자신의 목에 들이 대는 시늉을 하면서 뭐라, 뭐라 얘기하더니 칼을 자기 쪽으로 치운다.

 "와, 참 친절한 아저씨네. 아무 차나 얻어 탔다간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얘기구나."

 신경 써 주는 아저씨가 고마웠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달렸을까, 차가 도로 옆에 있는 경찰서 앞에 멈춰 섰다. 우리는 비자도 여권도 문제가 없었기에 별 문제가 없겠지 생각하고 마음 편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가 경찰과 얘기를 좀 나누더니 우리 보고 내리란다. 경찰들은 이미 화물칸에서 우리 짐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뭐야, 무슨 문제지?" 라고 생각하며 경찰과 얘기를 나눠 보려고 해도 도대체 말이 통하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짐을 다 내린 채 경찰들에게 붙들려 있고 트럭은 다시 출발했다. 하지만 경찰들하고 계속 얘기해도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아, 테헤란의 교민 분께 전화를 해 통역을 부탁했다. 그 내막을 알고 보니 사실은 경찰들이 우리를 붙든 게 아니었다. 우릴 태워 줬던 트럭 운전수가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불안해서 계속 태워줄 수 없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아까 운전수 아저씨가 목에 칼을 들이 대면서 했던 얘기는 결국 본인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이었다. 우리가 강도 짓을 할 지도 모른다고. 거 참, 고마운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보고 강도라고 한 것이었다니.  참 씁쓸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기분이 묘했다. 내 평생 어디 가서 또 강도 취급을 당해 보겠나......

테헤란의 사히드 형

 곡절 끝에 테헤란에 도착했다. 테헤란에는 나와 같이 다니는 일행이 한국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이란인 친구 사히드 형이 있었다. 사히드 형이 한국에 일을 하러 왔을 때 알게 된 친구였는데 우린 형의 초대로 그 집에 가서 하루를 머무르게 되었다. 테헤란에서도 유명한 부촌에 위치한 형의 집은 3층짜리 건물에 수영장까지 딸려 있는 집이었다. 형의 말에 따르면 동네에서는 제일 작은 집이었는데, 그 동네에는 대문부터 으리으리한 궁궐 같이 생긴 유명한 이란 축구 선수의 집도 있었다.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는 선수였다.

사히드 형.

사히드 형네 집에서. 사히드 형과 나와 군 입대를 기다리고 있는 사촌 동생

  우리 나라처럼 이란도 대가족 문화가 익숙한지 사히드 형 집은 형과 큰 형 내외가 함께 살고 있었고, 사촌이니 조카니 외삼촌이니 하는 사람들이 늘 들락날락 해서 집안이 북적북적했다. 우리가 머무를 때만이 아니라 항상 가족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는 것 같았다. 이쪽은 조카, 이쪽은 사촌, 또 저쪽은 마도로스인 외삼촌 등등. 여기 저기 인사하면서 조금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또 함께 둘러 앉아 게임도 하고 차도 마시면서 조금씩 친해졌다.

사히드

사히드 형의 큰 형인 알리 형의 딸. 정말 너무 귀여웠다

  마침 우리가 사히드 형 집에 머무를 때 마침 한국과 이란의 축구 국가 대표 경기 시합이 있었다. 다들 즐겁게 보자는 생각으로 TV 앞에 모여 앉았는데 왠지 모를 그 긴장감이란 어쩔 수 없었다. 서로 자기편 플레이에 크게 내색하지 못하고, 어색한 분위기. 다행히도 경기는 막판에 한국이 골을 넣으면서 무승부로 끝났다. 경기가 무사히 끝나고 나자 모두 괜스레 멋쩍어진 우리는 서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칸도반, 이란의 카파도키아

 타브리즈에서의 출발을 하루 미루고, 칸도반에 다녀 왔다. 이란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칸도반은 그 독특한 지형으로 이란의 카파도키아 - 터키 중부 지역. 각종 기암 괴석들이 자리한 독특한 지형으로, 특히 스타워즈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 라고 불리는 곳이다.

칸도반

칸도반 전경

칸도반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생겼다

  동화 속에서 나올 법한 동굴 집들. 멀리서 보면 마치 개미굴 같아 보이기도 한다는 이 곳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직도 동굴 집에서 실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높다란 돌 벽에 문과 창을 내고, 집 밖으로는 각종 전기줄과 전선이 널려 있다. 관광객들을 모아 집 안내를 하던 한 주민은 이 곳의 집들은 천연 냉난방이 잘 되어 여름에는 더 시원하고, 겨울에는 포근하다고 했다.

칸도반 풍경칸도반 풍경
칸도반 풍경

칸도반 골목골목

칸도반 풍경

빨래가 널려 있는 풍경

  외국인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이란 내국인들에게도 명소인 이 곳은 비수기임에도 제법 많은 여행객들이 보였다. 몇몇 주민들은 관광객들에게 집 내부를 구경 시켜 주고 돈을 받고 또 차나 숙소를 제공하면서 생계를 벌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주민들은 이 관광객 무리가 여간 귀찮은 모양이었다. 특히나 외국인 관광객들은 아무데나 와서 카메라를 들이대려 하고, 자꾸 기웃기웃하고 다니니까 신경이 쓰이는 건가 보다.

동굴 집 내부

동굴 집 내부

동굴 집 내부

카페트가 깔려 있는 건 다른 집들과 똑같다

소쿠리

소쿠리가 걸린 풍경은 우리네 시골과 비슷하다

당나귀

경사가 심한 칸도반에서 나귀는 중요한 운송 수단이다

  이 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른 또 하나는 바로 여인들의 차도르 복장이었다. 이란의 다른 지역에서는 검은 색의 차도르를 제외하고는 다른 색을 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칸도반에서는 노인이건 젊은 여인이건 할 것 없이 모두 다양한 무늬가 있는 비교적 화려한 차도르를 둘렀다.

차도르

여인의 화사한 차도르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칸도반은 타브리즈에서 하루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내면서 그 곳의 정취를 느껴 보고 싶은 사람들은 방을 빌릴 수 있는 곳이 몇 곳 있으니 원한다면 며칠을 묵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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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 들어 오다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넉 달 만에 드디어 이란에 들어 왔다. 사실 처음에 이란에 들어 오기 전에는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었다. 내가 언론에서 보아온 건 강경 반미 시위대가 늘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뿐이었으니까 이란이라는 나라는 그저 '과격한 반미주의자 무슬림'들의 나라 정도로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독실한 이슬람 국가이니 어디 함부로 카메라를 놀렸다가는 손목이라도 잘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걱정은 이란에 들어온 후 친절한 사람들과 잘 정돈된 깨끗한 거리를 마주하면서 차츰 사라져 갔다. 또 개혁과 보수가 공존하는 이란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이곳 역시 그저 우리랑 똑같은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여권이 강력한 곳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듯이 거리 곳곳에 차도르를 쓴 여성들이 활보하고 있었고 운전을 하고 있는 여성들까지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옆의 파키스탄만 해도 운전을 하는 여성은 매우 드문드문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니까 비교가 되는 모습이었다.

 사실 내가 이란에 들어 와서 무엇보다도 제일 놀랐던 건 바로 코카 콜라와 펩시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란에서 미국 제품을, 그것도 미국 문화의 상징적 아이콘이랄 수 있는 콜라를 본다는 건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아주 버젓이, 곳곳에서 팔리고 있었다.

석양

이슬람의 상징과도 같은 모스크 저 멀리 뒤편으로 해가 지고 있다.

이란에서의 라이딩

낙타 조심

제주도에서는 노루 조심, 중국에서는 야크 조심, 그리고 이란에서는 낙타를 조심해야 한다.

 이란에 들어온 지 열흘 정도가 지나 야즈드에 도착했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야즈드에서 30km 정도 전인 메리즈에서 하루를 묵고 올 예정이었으나, 숙소가 없어서 결국은 야즈드까지 들어 왔다. 이란은 길이 잘 닦여 있는 건 좋았지만 웬만한 규모의 도시가 아니면 숙소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 하루 이동 구간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몇 십 km를 달려야 물이라도 사 마실 수 있는 가게가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실정이어서 라이딩 하면서 쉴 곳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파키스탄에서는 가까운 거리에 하나씩 주유소가 있었고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는 건 기본이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이란은 주유소가 별 장사가 안 되는 품목이라 그런지 아주 띄엄띄엄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오직 주유소만 있는 경우가 많아서 뭘 사 먹을 곳도 없었다. 하기는 기름 1리터에 우리 돈 80원 정도 밖에 안 하니 그다지 남는 장사는 아니겠다.

올드 시티를 거닐다

카펫

이란산 카펫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야즈드의 실크로드 호텔 벽에 걸려 있던 카펫. 무희? 여신? 왠지 모를 처연함이 느껴지던 그림.

 질 좋은 비단의 생산지로도 알려져 있는 야즈드에서 내가 제일 끌렸던 것은 오래된 흙벽으로 미로처럼 이루어진 야즈드의 구시가(올드 시티)였다. 한 낮의 강렬한 태양을 피해 미로 같은 그 길을 거닐다 보면 어느새 탁 트인 정원이 나오기도 하고 다시 미로를 헤매이다가 보면 이름 모를 모스크 앞에 이르기도 했다. 양 옆으로 높이 쌓인 흙벽을 따라 좁은 골목길을 혼자 거닐다 보면 때론 이 곳에 나만 홀로 존재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문득 이러다가 이곳에서 영영 헤매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 때쯤이면 넓은 곳을 찾아 나갔다. 그런 후에 자메 모스크의 첨탑을 찾으면 됐는데 어디서나 보이는 높은 미나렛이 이 구시가 방랑자들의 등대 역할을 해 주었다.

올드 시티올드 시티

고요함 속에서 골목의 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태양이 남긴 자국을 따라 구시가를 걷는 일은 야즈드에서 할 수 있는 제일 매력적인 일 중 하나임에 틀림 없다.

올드 시티
전경

해 질 무렵의 야즈드 전경.

 야즈드는 구시가 말고도 많은 역사 유적들과 문화재가 남아 있는데 12C에 지어진 자메 모스크와 함께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본산으로서 5C부터 계속 불꽃을 지켜 오고 있다는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사원과 시 외곽의 침묵의 탑이 유명하다. 그리고 한 여름의 태양이 강렬한 야즈드의 기후적 특성에 맞춰 예전부터 바람탑이라는 독특한 건축 양식이 발달했는데 이는 더운 날에 건물 내부를 시원하고 해주고 자연 통풍이 이루어지게 한 구조물로서 구시가를 걷다 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야경

자메 모스크의 야경.

이란의 결혼식 풍경

 야즈드에 머물던 마지막 날 밤, 내가 머물고 있던 실크로드 호텔의 외국인 손님들 모두가 한 동네 사람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다. 원래 신랑이 호텔 직원들과 친분이 있었는데 호텔 직원들을 초대하면서 손님들도 함께 초대한 것이다. 기쁜 일이니 함께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외국인 손님들을 결혼식에 초대함으로써 은근히 자신의 세를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뭐, 아무려면 어떠랴. 결혼식 초대를 받은 것에 조금 들뜬 우리들은 카메라를 챙기고, 나름 옷을 챙겨 입고 하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밤 9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호텔 직원들과 우리를 데려갈 미니 버스 한 대가 왔고 족히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일행들은 앉을 자리가 부족해 통로까지 가득 메운 후에야 식장으로 출발했다. 버스 안은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크로아티아, 캐나다, 네덜란드, 그리고 대한민국까지 국적은 다양했지만 모두 즐거운 파티에 간다는 마음으로 들떠 시끌벅적했다.

결혼식장

남자 하객들의 결혼식장. 모두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드디어 밤 10시 식장에 도착.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를 약간 기운 빠지게 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남자 손님들과 여자 손님들이 서로 다른 식장으로 안내된 것이었다. 우린 결혼식장에 가면 이란의 아가씨들도 만나볼 수 있겠구나 했었는데 너무 기쁜(??) 마음에 이곳이 특별한 남녀 유별 국가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손님들과 분리된 남자 손님들의 식장으로 안내된 우리들은 한 줄로 서서 신랑과 볼 키스 인사를 주고 받고 식장으로 들어섰다.

우리들

그 넓은 식장에서 샌달에 면바지, 티셔츠를 걸친 사람들은 우리들뿐이었다.;;;

  사실 식장이라기보다는 넓은 식당 같은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그 후 새벽부터 다시 파티를 벌인다고 했다. 하객들이 모두 신랑과 일일이 인사를 마치고 첫 식사가 나온 시각은 밤 열 한시. 결혼식에 온다고 저녁을 안 먹은 일행들이 태반이었던 우리는 허겁지겁 식사를 시작했다. 이미 이때는 기다리는데 모두 지쳐 있어서 기운들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 신부 얼굴도 보지 못했다. 도대체 신부는 언제 볼 수 있는 거냐고......

파티장 이동

파티장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시끌벅적.

 식사를 마치고 식장을 나온 시간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 있던 우리는 이제 곧 가든 파티장으로 이동한다는 말에 모두들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가든 파티에서는 남녀 하객들이 함께 어울려 논다고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좀 이란의 젊은 아가씨들을 볼 수 있겠구나 했던 것이다. 다시 미니 버스를 타고 파티장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한시. 우리가 도착한 때는 곧 신랑, 신부 입장이 시작할 찰나였다.

 왠 향을 피운 할머니가 들어 오시자 신랑과 신부가 그 가루를 조금씩 집어서 서로의 머리 위에 조금씩 뿌려주는 것으로 입장이 시작 되었다.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라는 그 향 의식은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되는 것이었는데 할머니는 무대 중앙의 신랑, 신부 옆 쪽에 쭈그리고 앉아 계속 향을 피우고 있었다.

신랑, 신부

신랑, 신부의 모습

향 할머니

계속 향을 피우던 할머니. 무섭게 생겼다.

 난 가든 파티라기에 넓은 정원에 삼삼오오 모여 잔을 부딪히면서 이야기를 하는 풍경을 상상했는데 실은 잘 정렬된 의자에 하객들이 앉고 중앙의 무대에서 사람들이 밴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며 즐기는 것이었다. 신랑과 신랑 친구들이 함께 춤을 추고 또 결혼식이라고 한껏 차려 입은 꼬마 손님들도 무대 한 구석을 차지하고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젊은 여자 손님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 건 볼 수 없었는데 딱 한 명 아가씨가 나와서 춤을 추다가 무슨 제지가 있었던 것인지 곧 자리로 돌아갔다.

 이러한 춤사위는 새벽 세시가 넘어서도록 계속 되었고 다음 날 체크 아웃을 해야 할 일행들이 대부분이었던 우리는 다시 호텔로 돌아 왔다. 파티는 우리가 식장을 떠날 때까지도 계속되었는데 호텔 직원의 말에 따르면 보통은 밤새 파티가 계속된다고 했다. 조금 피곤해서 마지막까지 파티를 즐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란의 결혼식 문화와 풍경을 접할 수 있었던 건 좋은 경험이었다. (다음에는 아가씨들이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다는 그 여자 식장 안을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호텔의 여자 손님들 말에 의하면 차도르 안에는 입은 옷들은 다른 나라의 젊은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데 우리가 이란에서 그런 걸 볼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모르겠다.)

결혼식장 풍경.

신랑과 친구들이 춤을 추고 있다.

결혼식장 풍경.

한껏 차려 입은 아이들도 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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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혜연 2009.06.23 22:1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사우디나 예멘, 오만, 아프간등같은 보수적인나라에서는 아얘 여자들의 모습을 아얘 찍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그런나라에서도 결혼식이나 파티때만큼은 한껏 멋을내며 짙은화장에 화려한드레스를 입고 한답니다! 저기 이란아이들이 춤추는 모습 제가봐도 귀여워요~ *^^*

파괴 되어 가는 유적지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하라파 유적지

파괴 되어 가는 하라파 유적지

 하루를 지내고 출발하기로 했던 사히왈에서 일행의 몸 상태가 좋질 않아 하루를 더 쉬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은 우리가 머물던 인더스 호텔 주인 아저씨와 그 친구와 함께 인더스 문명의 주요 유적지 중 한 곳이라는 인근의 하라파 유적지에 다녀 왔다. 하지만 인더스 문명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유적지는 그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는데 유물을 전시해 놓은 유적지 내의 작은 박물관은 거의 시장판 수준의 전시 상태를 보여 주었고, 유적지 내 한 쪽에는 집이 없는 빈민들이 살면서 그 안에서 구걸을 하고 돌아 다니고 있어서 과연 이 곳이 제대로 보존될 수 있을런지 심히 의심스러운 지경이었다. 또 이미 영국 식민지 시절에 당시 사람들이 집을 짓는 데 사용하기 위해 유적지의 벽돌이나 흙 등을 가져 가면서 많이 파괴가 되었단다. 세계 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꼽히는 인더스 문명을 알기 위한 중요한 자료인데 이런 식으로 파괴가 되고 있다니 안타까웠다. 얼마 전에는 파키스탄 북쪽 탈레반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 무장 세력들이 오래된 석불을 폭파 시키려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기사도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파키스탄의 국력이 문화 유적의 보존과 관련한 문제들을 신경 쓰기에는 많이 부족한가 보다.

도요타

호텔 주인 아저씨의 75년산 도요타 짚차를 타고 유적지에 다녀 왔다. 돌아 오는 길에는 짚차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하는데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총알 목걸이

미안 찬누에 들어 오던 날 길에서 만난 경찰 아저씨. 가지고 있던 진짜 총알로 만든 목걸이를 내가 마음에 들어 하자 선물로 주었다.


미안 찬누의 라시드 아저씨

 사히왈에서 휴식을 취한 후 출발한 오후엔 미안 찬누에 도착했다. 미안 찬누에서는 경찰서의 소개로 샬리마르 호텔에 갔는데, 호텔 겸 식당의 주인인 라시드 아저씨는 자전거 여행을 하는 우리를 무척이나 반겨 주었다. 자기가 랜스 암스트롱과 뚜르 드 프랑스의 열렬한 팬이라면서 자신의 호텔에 오는 자전거 여행자들은 머물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무료로 머물 수 있다고 하셨다. 주인 아저씨는 방뿐만 아니라 식사까지도 무료로 주려 하셨는데 우리가 그것까지는 차마 미안해서 받지를 못했다. 그래도 작은 지방 도시에서 이런 행운을 만나다니 암스트롱한테 조금은 빚을 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주인 아저씨의 환대를 받고 편한 마음으로 쉬고 있던 것도 잠시뿐, 나는 밤새 계속된 설사로 화장실을 들락 날락 거리면서 온 몸의 진이 다 빠져 버렸다. 페샤와르에서부터 계속 되던 설사를 그냥 단순한 물갈이이겠거니 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미안 찬누에서는 물 한 잔만 마셔도 바로 탈이 날 정도로 상태가 악화 되어서 뭐든 먹을 수조차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 지방 도시의 병원이란 것이 너무 열악해서 병원 건물에 들어 서는 순간 내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다시 숙소로 가서 쉬고 싶다는 것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은 커녕 천장에 붙어 있는 몇 대의 선풍기조차 전기가 나가서 작동하질 않았고, 병실이라고 하는 것도 그냥 텅 빈 방에 딱딱한 침대 몇 개 가져다 놓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따로 진찰실이랄 것도 없어서 의사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내게 와서 대강 증상 설명을 듣고 링겔을 처방해 주었는데, 링겔을 맞고 잠이 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라시드 아저씨

미안 찬누 샬리마르 호텔의 라시드 아저씨(왼쪽)와 그 친구분. 내가 아플 때 그토록 많이 챙겨 주었던 아저씨의 친절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몸이 아프면서 주인 아저씨가 더 고마웠던 건 내가 많이 아프니까 친구를 소개해 주어 병원까지 데려다 주고, 또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아저씨는 따로 문병을 와서 상태를 보고 가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이다. 게다가 링겔을 다 맞고 숙소로 돌아 갔을 때 아저씨는 집의 부인에게 부탁해 내가 따로 먹을 닭고기 죽을 만들어서 가져다 주었다. 외딴 타지에서 몸이 아파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지쳐 있던 나에게 아저씨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니 너무나 고마웠다.

삼부 토건의 고선홍 소장님

고선홍 소장님

파키스탄 카네왈 삼부 토건 사무소의 고선홍 소장님.

 두 번째로 만난 고마운 인연은 미안 찬누 근처의 카네왈에서였다. 우리는 내 몸의 상태가 많이 좋질 않아서 미안 찬누에서 물탄으로 가는 차량을 수배하기로 결정을 했다. 처음에는 경찰서에 도움을 청하러 갔으나 그쪽에서는 딱히 시큰둥한 반응 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라시드 아저씨가 근처 카네왈에 한국 건설 회사의 사무소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한국인 직원들도 있고 말이 통하니까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일행을 카네왈의 사무소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렇게 일행이 막 사무소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일을 보기 위해 사무소를 빠져 나가고 있던 고선홍 소장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아마 그때 서로 지나쳤더라면 만나지 못했을테니 그것도 인연인지도 몰랐다. 일행에게 우리의 사정을 들으신 소장님은 흔쾌히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겠다 하시고, 아픈 나를 위해 미안 찬누에서 카네왈의 사무소까지 차로 데려가 주시고 에어컨이 딸린 숙소에 전속 요리사가 만든 한국 음식과 김치까지 대접해 주셨다.

 파키스탄의 사무소에서만 십 년이 훌쩍 넘게 근무 중이신 소장님은 이제 이곳에 완전히 자리를 잡으신 파키스탄 통이었는데 얼마 전에는 한국에 있던 가족들까지 전부 불러 들여 가족들이 모두 같이 살고 있었다. 요리사가 해 준 맛난 한국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신선한 과일까지 얻어 먹어 기운을 차린 우리는 소장님, 사모님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소장님이 네팔에서 근무할 때 만나신 인도인 사모님은 한국에서 오래 사셔서 그런지 말씀하시는 것이 완전 한국 아줌마였는데 소장님의 자녀들 얘기부터 시작해서 살아 오셨던 이야기도 듣고, 또 우리들 여행까지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서로 반가워 많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족

소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아이들. 사무소 마당 한 켠 그네에서.


 나중에 알고 보니 카네왈의 삼부 토건 사무소는 파키스탄을 여행하는 한국 여행자들에게 제법 알려진 모양이었는데 근처를 지나 가던 여행자들이 도움을 받으면서 입 소문이 퍼졌고, 한번은 선교를 왔던 단체 손님들까지 찾아 와서 묵어 가기도 했던 적이 있었단다.

9.11 이후의 부동산 폭등과 파키스탄의 기독교 차별에 관해

 소장님에게 들은 얘기 중에 파키스탄과 관련해 흥미 있던 것은 9.11 이후 파키스탄의 부동산 시장 폭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9.11 이후 미국으로 들어가기 힘들어진 아랍권의 자본이 같은 이슬람권인 파키스탄 등지로 몰려 들면서 테러 이전 한국의 집 한 채 가격이면 너끈히 구할 수 있던 집 값이 폭등해 이제는 서울의 집 한 채로는 라호르의 괜찮은 집은 구경도 못 할 정도로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는데 테러 직전에 파키스탄에 근무하던 한 한국 업체의 파견 직원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당시 서울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라호르에 집을 한 채 구했단다. 집 값의 차익을 노린 것이라기보다는 파키스탄에 아예 터를 잡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9.11이 터지면서 오른 집 값으로 또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었고 덕택에 그는 이제 몇 채의 집을 가진 부호가 되었단다. 그런 것이 사람 운이라는 것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참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소장님이 데리고 계신 파키스탄인 요리사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라호르의 한국 식당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해서 제법 한국 음식 솜씨가 좋은 그는 이슬람권에서는 만나기 힘든 기독교인이었다. 물론 파키스탄에서 공식적으로 종교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진 않지만 기독교인은 아무래도 사회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하는 등의 기본적인 사회 생활에 있어서 차별과 제약이 많이 따른다고 한다. 이 곳 사무소의 요리사도 음식 솜씨도 좋고 사람도 성실했지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직장을 구하지도 못하고 하고 있는 것을 소장님이 사람을 보고 데려와 숙소도 제공하면서 데리고 있는 것이었다.

 혹 이런 사례를 보고 기독교를 홀대하는 이슬람이라고 흥분할 사람들이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례가 비단 이슬람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많은 종교들에서 참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런 점이다.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과 이해의 부족.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의식에서 드러난 문제도 바로 이런 점이었다. 다른 종교를 믿진 않더라도, 배척하지는 않는 정도의 관용만 가져도 지금 여러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적 갈등은 훨씬 줄어 들텐데 지금의 종교인들에겐 그게 너무 없지 않나 싶다.

발루치스탄을 지나다

 카네왈에서 푹 휴식을 취한 후에 사무소의 트럭을 타고 소장님의 소개로 미리 예약해 둔 물탄의 숙소로 왔다. 이제 우리가 지나가야 할 곳은 발루치스탄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제일 걱정이 되던 지역이고 이곳 파키스탄에 들어와서도 제일 많이 조언을 들은 곳이었다. 발루치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이란과 바로 국경을 접하고 있고 정부에 대항하는 종족 갈등으로 많은 폭동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여 치안이 굉장히 불안한 곳이었다. 혹자는 그곳 근처를 지나가는 기차를 타게 되면 잠깐씩 서는 역이라도 절대 내릴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고, 또 퀘타에서 십년 넘게 근무했다던 경찰은 자신도 경찰이지만 그곳만큼 무법 천지인 곳은 처음 봤다며 겁을 잔뜩 주니 우리는 그 근처인 물탄에만 와서도 이미 잔뜩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우리는 물탄에서 퀘타까지 기차를 이용한 후에 퀘타에서 이란 국경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물탄 마우솔레움

물탄에서 휴식을 취하던 저녁, 시내의 마우솔레움에 다녀왔다.


 물탄에서는 다시 한 번 소장님의 도움으로 기차표를 예매하고 하루의 휴식을 취했다. 그 후 퀘타로 이동한 우리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버스를 타고 무사히 국경에 도착해 이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퀘타에서는 버스표를 구하기 위해 삼륜 택시를 타고 시내를 돌아 다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따다닥 하는 소리가 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작은 폭죽 소리였던 것 같은데 그 때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순간적으로 몸을 숙이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만큼 극도로 긴장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차 저차 하면서 무사히 발루치스탄을 통과한 지 삼 주 후에 퀘타에서 정부군과 반란군 간의 교전으로 몇 명이 사망하고 도시 전체에 계엄령이 내려져 아무도 들고 날고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난 우리가 정말 위험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짐꾼

물탄 기차역에서. 우리의 짐을 날라 주던 짐꾼.


 한국을 떠나기 전에 어떤 분이 발루치스탄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 길을 가는데 제일 큰 장애물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구나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자연 환경과의 싸움은 사람의 의지로 헤쳐 나갈 수도 있겠지만, 종교, 민족 갈등 등으로 분쟁을 겪고 있는 위험 지역의 장애물은 다름 아닌 바로 사람이었다. 발루치스탄을 지나 오면서 나는 그 말씀이 새삼 맞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 발루치스탄에서 더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총을 든 사람이었으니까...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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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gertip.com BlogIcon Zet 2007.10.04 16:3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멋진 글과 사진들 잘보았습니다. :)

  2. Favicon of http://pustith.tistory.com BlogIcon 맨큐 2007.10.04 23:4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우와~
    멋져요! ^^
    전 몽골여행 이후로는 휴식 컨셉의 여행만 다니고 있습니다. ㅎㅎ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7.10.05 09:4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흐. 저도 이 여행 이후로는 당분간 익스트림한 여행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몽골 좋네요. 언젠가 가 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예요.

여기가 수도라고?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
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훈자를 떠나 일주일만에 도착한 이슬라마바드에 대한 첫 인상은 솔직히 여기가 과연 한 나라의 수도가 맞나 하는 것이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비교적 번화한 상업 지역 중 하나라는 Blue Area는 우리 나라 용산의 낡은 상가 건물들이나 종로의 오래된 낙원 상가 건물 같은 것들이 몇 채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 사이에 있는 외국 은행의 지점이나 패스트푸드 체인이 이 곳이 그나마 중심가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들이었다. 이런 곳이 번화가라니 그럼 다른 곳은 도대체 뭐가 있다는 것인가.

 사실 이슬라마바드는 지금까지 보아온 파키스탄의 다른 도시들, - 북쪽의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따라 늘어선 길기트, 베샴, 다수, 하리푸르 등등 - 또 그밖에 파키스탄의 여러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도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정돈되고 깨끗한 도시였다. 단지 그간 지나온 도시들에 내가 워낙 실망하고 있었기에 - 특히 길기트 같은 도시는 정말 단 하루도 더 머물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 처음 가 본 Blue Area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 것이다.

 현재의 이슬라마바드는 규모면에서 보자면 남쪽의 카라치와 라호르에 이은 파키스탄의 세 번째 도시이다. 원래는 지방의 작은 도시였으나 1960년대, 대통령인 Ayub Khan이 국토의 남쪽 카라치에만 치중되어 있는 개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균형적인 발전을 꾀하기 위한 이유 말고도 이슬라마바드는 여러모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우선 해안선을 접하고 있어 인도 등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취약한 카라치와 달리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했다. 또 기후 조건에 있어서도 카라치보다는 훨씬 생활하기 나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이슬라마바드는 파키스탄의 새로운 수도가 될 수 있었다.
 
이란 비자 받기 Tip

 육로를 통해 여행을 하면 이란으로 들어가는 경로가 터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의 몇가지 경우가 있는데 보통 이란 국경에서 일주일짜리 트랜짓 비자를 바로 발급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길게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따로 한달짜리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하는데 파키스탄에서는 이슬라마바드의 이란 대사관과 페샤와르에 있는 이란 관공서에서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다.

 이때 꼭 페샤와르로 가서 비자를 발급 받기를 추천하는데 이슬라마바드의 대사관에서는 보통 2주, 더 늦으면 아예 기한 없이 걸리기도 하지만 페샤와르에서는 빠르면 2~3일, 중간에 휴일이 껴 있어도 최대 5일 정도면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란에 들어간 이후에는 별 무리 없이 비자 연장을 받을 수 있으므로 처음에는 한달짜리 관광 비자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란 비자를 발급 받을 수는 있는데 초청장 대행 업체 등을 통해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고, 또 비용도 적지 않게 들어가므로 육로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나중에 인접국에서 비자를 발급 받거나 국경에서 트랜짓 비자를 발급 받을 계획을 짜는 것이 편할 것이다.

이란 비자.

페샤와르에서 발급 받은 이란 비자. 여기에는 분명히(??) 내 이름도 적혀 있다.


파키스탄의 심장, 라호르

 백제의 고도인 공주와 부여, 그리고 신라 천년의 수도인 경주는 내가 우리 나라에서 특히 좋아하는 도시들이다. 모두 한 때는 한 나라의 영광과 번영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현재까지도 그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도시 곳곳에 간직하고 있는 곳들이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의 심장'이라고도 불리는 라호르는 파키스탄에서 바로 그런 위치를 점하고 있는 도시이다. 라호르는 고대 무굴 제국의 지배 하에 번영을 구가했는데, 지금도 라호르 곳곳에는 그 시절 번영의 흔적이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도시의 중앙에 자리한 라호르 포트와 바드샤히 모스크 등이 그 당시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역사의 유산이며 또 무굴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정원들도 여러 곳에 남아 있어 당시의 번영과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바자

라호르 올드 바자의 밤 풍경.


 무굴 제국이 쇠퇴한 이후 19C말에서 20C 초, 파키스탄은 영국의 식민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당시 영국은 무굴 제국의 양식과 고딕, 빅토리아 양식 등을 혼합한 건축을 선보이면서 라호르에 아름다움을 더했고 이 시기에 라호르 박물관과 GPO, 대학 등이 지어졌다.

 라호르에 들어온 첫 날에는 이 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제일 기대하고 있던 라호르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민 지배 시대에 지어진 박물관의 외관은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고 있었는데 전시된 유물들은 우리 교과서에도 나오는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굴된 신석시 시대의 유물부터 시작해서 무굴 제국 시대, 시크 지배 시대, 그리고 식민 시대까지의 여러 유물들과 파키스탄 독립 역사를 알려 주는 전시실, '굶고 있는 붓다의 상'으로 유명한 간다라 미술품들, 또 파키스탄의 현대 미술 작품들까지 다양한 시대, 장르, 역사를 망라하고 있었고 이는 외국인의 입장료가 내국인의 열배에 달하는데 대한 내 불만을 모두 사라지게 할 만큼 훌륭한 소장품들이었다.

라호르 박물관

1894년에 설립된 라호르 중앙 박물관은 파키스탄 제일의 박물관이자 남아시아 지역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의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소장품은 다양한 장르를 통틀어 수십 만점에 달하는데 수많은 소장품들 중에서도 특히 보리수 나무 아래의 붓다를 표현한 '굶고 있는 붓다의 상'이 유명하다.


 한가지 단점이라면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서인지 넓은 전시장 안에 조명 시설도 열악하고 더구나 무더운 한 여름에 냉방 시설마저 열악해서 천장에 달려 있는 몇 대의 대형 선풍기가 냉방 시설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잦은 정전으로 꺼지는 바람에 조금 둘러 보고 잠시 선풍기 밑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다시 기운을 차려 둘러 보고 해서야 무사히 박물관 견학을 마칠 수 있었다.

미술

박물관의 현대 미술품 중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바드샤히 모스크, 붉음에 압도당하다

근위병

모스크 앞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

 라호르 포트 옆에 있는 바드샤히 모스크를 마주한 첫 느낌은 거대한 붉음이었다. 인도의 타지마할이 모두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져 웅장한 흰색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면, 이곳 바드샤히 모스크는 입구부터 시작해서 돔을 제외한 모든 외벽이 붉은 색으로 둘러 싸여 보는 이를 압도했다. 어찌 보면 붉은 타지마할을 보는 것 같기도 했는데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의 아들이 이 바드샤히 모스크를 지었으니 그 인연일지도 모르겠다.

 바드샤히 모스크는 무굴 제국이 쇠약해진 이후, 시크 지배 시대와 영국 식민 시대를 지나면서 많은 수난을 겪고 파괴되었으나 이후 오랜 기간의 노력을 거쳐 다시 복원되게 되었으며 지금은 파키스탄에서 두 번째로 큰 모스크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곳에는 한가지 재미 있는 현상이 숨어 있는데 모스크 마당의 양쪽을 따라 둘러서 있는 회랑에 보면 정사각형의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의 한쪽 구석 기둥에 가서 기둥을 향해 작게 속삭이면 반대쪽 대각선의 기둥 쪽에 서 있는 사람이 그 말소리를 들을 수가 있는 것인데 소리가 천장의 돔을 타고 이동하기 때문이다.




모스크의 입구.

모스크의 입구.


바드샤히 모스크

한 번에 5만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모스크의 전경. 붉은 색이 인상적이다.


기도하는 곳

모스크 중앙의 기도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기도 했다.

나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 반바지를 입고 있던 내게 왠 가이드 할아버지가 다가와 누더기 사리 하나를 둘러 주었다. 그래서 기념 사진 한 컷.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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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서의 하룻밤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공안 사무소

공안 사무소 마당에서 맞이한 아침. 이곳에 텐트를 치고 잤다.

 밤 열 한시, 거리계는 어느새 167km를 찍었건만 목적지인 바오지는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숙소가 있을만한 도시도 보이질 않는다. 이때까지 저녁도 먹지 못하고 지쳐 있던 우리는 무작정 길 옆에 있던 공안 사무소의 커다란 대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하룻밤만 재워 주세요."
"응?"
"우리 신문에 나온 이 사람들이예요."
 우리 기사가 나온 신문을 보여 주며 도움을 청했다. 일단은 들어 오라며 문을 열어준 공안들이지만 조금은 난처한 눈치다. 재워 주고는 싶지만 방이 없단다.

"아, 괜찮아요. 우리 텐트 있어요, 텐트. 아저씨, 저기 마당에 텐트 치고 자도 되죠?"
"아, 그래? 텐트가 있다면 괜찮아."

 하루 종일 쌓인 흙먼지를 화장실에서 대강 씻어 내고, 가지고 있던 라면으로 늦은 끼니를 때웠다. 공안들은 우리가 마냥 신기한 모양인지 식사를 하는 모습마저도 열심히 쳐다 본다. 뭐, 이런 녀석들이 있나 싶은가 보다.
 한국에서도 한번도 안 가본 경찰서인데, 중국까지 와서 경찰서에서의 하룻밤이라니 별걸 다 해본다. 일행들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난 건물의 처마 밑에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렇게 자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예전에 여행을 할 때는 매트리스 하나와 침낭, 그리고 새벽 이슬을 피할 처마만 있다면 완벽한 잠자리가 됐었다. 그땐 친구에게 엽서를 쓰거나 풀벌레 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곤 했었는데, 오늘은 며칠 만의 라이딩이 피곤했던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사람들

쭈뼛거리는 손자들 손을 잡고 카메라 앞에 선 할아버지.

사람들

뭘 자꾸 찍는거야?


칭장 철도의 출발지, 시닝

칭하이 성

칭하이 성. 고원, 호수, 산.

 시안을 출발해 바오지를 거쳐 란저우, 그리고 드디어 칭하이성의 성도인 시닝에 들어왔다. 이곳을 지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칭하이 후로 향하는 길이 시작된다. 시닝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평소에 입는 옷만 입고 걸어 다녀도 저 사람들은 외국인이구나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 못 사는 곳이었다 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서부 대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정부가 집중적인 투자를 해 도시를 발전시켰고, 또 7월이면 티벳이 있는 시장성과 연결되는 칭장 철도가 개통되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닝은 지속적인 성장의 단꿈에 부풀어 있는 곳이다.


칭장 철도

이 철길은 앞으로 티벳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까.

 중국이 칭장 철도를 개통시키는 이유 중의 하나는 칭하이와 시장의 발전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바로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티벳의 염원을 분쇄시키려는 욕구일 것이다. 시닝에서 오래 생활을 하신 한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중국의 대 티벳 정책이 정말 무서울 정도로 교묘하다 한다. 그걸 보고 있자면 티벳의 독립은 결국 꿈으로 끝날 것 같다고. 중국은 자국 화폐인 위안화에 티벳 라싸의 포탈라 궁을 도안으로 삼았고, 중국 내의 티벳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임명한 판첸 라마를 따를 것을 강요하고 있다. 게다가 칭장 철도가 본격적으로 개통되면 한족들의 시장성 유입이 더 많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이는 문화적, 정신적으로도 티벳을 점령하기 위한 고도의 수단이다. 최근에는 달라이 라마도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의식한 탓인지 완전 독립이 아닌 자치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가 달라이 라마의 망명 정부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니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이런 모든 상황들을 보자면 수십 년 후에는 티벳이 원래 중국이 아니라 독립을 주장하던 독립 국가였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아예 잊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때묻지 않은 자연, 칭하이 후

해발 3,817m

해발 3,817m. 지난 밤 내린 비가 눈이 되어 쌓였다. 지금은 6월이다.

 시닝을 떠나 본격적으로 칭하이 후로 향하는 라이딩을 시작했다. 고도가 높아 6월임에도 불구하고 쌀쌀한 날씨였지만 걱정했던 고산 증세도 없었고 그럭저럭 할만한 라이딩이었다. 호수 면의 높이가 해발 3,000m가 넘는 칭하이 후는 그 넓이가 제주도 두 개를 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큰 중국 최대의 염호인데, 오랜 기간 미개발 지역이었기에 때묻지 않은 자연 환경과 아름다운 주변 풍광으로 최근에 새로이 떠오르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멀리 호수의 북쪽으로는 만년설이 쌓인 설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넓게 펼쳐진 고원에는 유목민들이 양이나 야크 떼를 방목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넓디 넓은 호수와 양과 야크 떼가 있는 한적한 초원의 풍경,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설산까지. 그 풍경을 옆에 낀 채로 라이딩을 하다 보면 몇 시간이 지나도 질리질 않았다.

야크

가까이서 본 야크는 생각보다 순하게 생겼다.

유목민

양과 야크떼를 방목하는 유목민들

 사실 내 머리로는 이렇게 높은 곳에 이런 호수와 평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잘 실감이 나질 않았는데 과연 내가 지금 달리고 있는 것이 어디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곳이 진정 해발 3,000m가 넘는 곳이 맞는 건가. 이 높이면 이미 우리 나라에서는 제일 높은 곳을 한참 더 지나 올라온 것인데. 그렇게 높은 곳에 이런 넓은 평원과 커다란 호수가 있다는 게 가능한 건가. 내가 서 있으면서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목민 텐트

간단한 요기거리를 팔던 유목민의 텐트에서.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한 이들은 우리가 마땅히 먹을 것이 없어 그냥 나오려 하자,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한 사람에 5위안씩 사진 찍은 값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룽다를 지키던 할아버지.

부적을 하늘에 흩뿌리며 기원을 한다.

 칭하이성에는 시장성 쪽에서 넘어온 티벳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티벳 사람들이 들어 오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도 흘러 들어 왔는데, 허이마허로 들어가는 길에는 호수 옆에 작은 움막을 세워 놓고 혼자 룽따를 지키며 지내시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바람의 말이라는 뜻의 룽따는 티벳인들이 부처님의 말씀이 바람을 따라 널리 퍼지기를 기원하며 라마 불교 경전의 글귀들을 적은 부적을 달아 놓은 곳이다. 아마 그렇게 매달아 놓은 부적들이 강한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보면서 바람의 말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테다. 움막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저 멀리 호수 중간에 보이는 산의 여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것이라며 우리에게도 부적을 주고 여신에게 경배를 드리고 기원을 하라 하였다. 우린 작은 부적들을 하늘에 흩뿌리면서 기원을 했다. "고시레~" "모두들 끝까지 건강하게 해 주세요/" "그 사람이 늘 행복하게 해 주세요." "얼마 전에 시험을 본 형이 합격하길 빌어요."









룽따

바람의 말, 룽따

중국인 아주머니 라이더

 칭하이 후 주변의 작은 마을들은 사실 마을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곳들이었다. 국도변을 따라 불과 일, 이백 미터도 채 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 안에 건물들이 양 옆으로 나란히 늘어서 있었고, 그것이 다였다. 다행인 것은 그런 도시라도 잠을 잘 숙소는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말 그대로 잠잘 곳만 있을 뿐 기본적인 샤워 시설조차도 없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그거라도 우리에겐 감지덕지였다.

아주머니 라이더

허이마허에서 만난 58세의 중국인 아주머니 라이더.

 시닝을 떠난 지 삼일 째 되는 날, 허이마허에서 혼자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는 중국인 아주머니를 만났다. 58세라는 이 중국인 아주머니는 1년에 한번씩 자전거로 여행을 한다고 했다. 작년에는 남쪽에서 한달 정도 여행을 했단다. 혼자만의 라이딩이 외로웠던 것인지 우리가 함께 라이딩을 하자고 하자 무척 기뻐하신 아주머니는 우리가 전부 자기 아들들 같다며 일일이 챙겨 주셨다. 식당에서는 어떤 음식이 체력 보강에 좋다며 주문을 해주고, 숙소를 잡을 때는 미리 나서서 싼 값에 숙소를 잡아 주었다.

 중국에서는 숙소를 잡을 때 처음부터 영어로 인사를 하는 것과 인사말이라도 중국어로 하는 것, 그리고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경우에 따라 숙소의 가격 차이가 엄청 많이 난다고 한다. 사실 이들에게 공지된 가격표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너희는 외국인 티를 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말을 한 후, 먼저 가격 흥정을 해서 숙소를 잡아 주었다. 라이딩 도중에는 우리 중 한 명이 뒤쳐지면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걱정이 돼서 기다려 주고, 이것저것 간식도 챙겨 주었다.

 그렇게 함께 며칠의 라이딩을 하다가 헤어질 때가 되자 아주머니는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우리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셨다. 자식들 같은 우리가 고생하면서 먼 길을 갈 것이 안쓰럽기도 하시고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멀리서 잠시 만난 이방인들이 뭐가 그리 걱정되시는 것인지 그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서 헤어지는 우리가 아주머니께 미안할 정도였다.

길

끝 없이 이어지던 길.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하지만 길 위의 인연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닐까. 길 위에서의 만남은 늘 헤어짐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아주머니를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며칠 뒤면 드디어 중국 대륙의 서쪽 끝 신장성으로 들어간다. '돌아올 수 없는 사막'이라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신장성은 중국 대륙 횡단의 마지막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마지막 힘을 내어 더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이제 이 큰 중국도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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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허를 만나다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국도변에서

해질 무렵의 국도변. 자전거, 휴식을 취하다.

 5월의 중국은 황사가 너무 심해서 하루 종일 라이딩을 한 후 샤워를 하면 흙탕물이 줄줄 흘러 나왔다. 옷에서, 짐에서, 몸에서 온 사방이 다 흙먼지투성이니 이건 마치 모래밭에서 씨름이라도 한 사람 같다. 게다가 베이징을 떠나 지방으로 올수록 도로의 상태도 점점 나빠졌다. 포장 상태도 좋지 않은데다 도로 상에 모래도 많고 울퉁불퉁해서 화물차라도 한번 지나가면 작은 돌맹이들이 온 사방으로 튀었다. 대륙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지형도 변해 처음에는 완전한 평지에서 차츰 낮은 구릉으로 바뀌더니 점차 산이 되었고, 더불어 라이딩도 점점 힘들어졌다. 산먼샤에 들어가던 날은 라이딩 도중 쏟아지는 비를 만나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기도 했는데, 때문에 다음 날은 짐을 말리고 자전거 정비를 하느라 꼬박 하루를 다 보내야 했다. 한 지방 일간지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가던 우리 일행을 쫓아와 인터뷰를 하고, 신문의 일면에 내보내 주었다. 그 덕분에 다음날 신샹의 숙소에서는 신문 기사를 본 호텔의 주인 아저씨가 유명 인사라며 하룻밤 공짜로 재워 주기도 했다.

소나기

갑작스레 쏟아진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길 옆의 동굴로 들어갔다.

내기 당구

길 옆의 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동네 사람들과 내기 당구판이 벌어졌다.

 라이딩 도중의 끼니는 주로 시골 마을의 장터나 국도변의 기사 식당 같은 곳에서 해결을 했는데, 의사 소통은 안되고 메뉴가 있다 해도 그림은 없고 글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우리는 무작정 찍기가 일쑤였다. 시장판의 만두처럼 미리 준비가 되어 있거나 먼저 먹고 있는 손님들이 있으면 살짝 보고 시킬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많아 일단 시키고 보는 것이다. 이건 무슨 복권을 사는 기분이었다. 운이 좋으면 괜찮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때로는 정말 아차 싶은 음식들도 있었다. 결국 며칠 전에는 직접 주방장을 따라 주방에 들어가 이 고기, 저 야채 등등을 가리키며 주문을 했다. 조리법은 몰라도 일단 재료만은 고르고 보자는 것이었는데 다행히도 음식은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었다.

신문 기사

중국 신문에 나온 우리의 기사. 네 명의 전사라고 써 있다.


 신샹을 지나 정쩌우로 가던 도중엔 황허를 만났다. 황허는 이름 그대로 정말 거대한 흙탕물의 흐름이었다. 누런 흙탕물이 강을 가득 메운 채 거대한 기세로 흐른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 중 한 곳이 바로 이 황허다. 가만히 서서 황허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거대함에, 그 오랜 흐름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곳에서부터 문명이 시작됐음이리라.

황허

황허, 그 거대한 흐름과 마주하다.

 정쩌우를 지나 시안으로 가는 길에는 중국 무술의 본산 소림사가 위치한 숭산과 옛 한 나라의 수도였던 뤄양이 있다. 소림사 하면 세 살 어린 아이라도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 보았을, 중국 무술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소림사가 처음이었던 나는 높게 세워진 통나무 사이를 물지게를 지고 뛰어 다니는 스님들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이제 소림사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무술 씨디를 파는 스님들과 방송국에서 무술 스타를 모집한다는 대형 팜플릿, 그리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무술 쇼를 하는 무술학교 학생들뿐이다. 관광지가 되어 버린 소림사를 지나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고승들의 사리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탑의 숲'을 만날 수 있다. 내가 간 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이백여개가 넘는 탑 사이를 고즈넉히 걷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만약 소림사에 올 계획이라면 조금 더 걸어 꼭 이 탑의 숲에 와 보기를 추천한다.

무술 스타

쿵후 스타를 모집한다는 방송사의 광고.

탑의 숲

사리를 모셔 놓은 탑의 숲


 삼국지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동탁이 망해가는 한나라의 어린 황제를 데리고 도망을 치며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 그 도시를 기억할 것이다. 뤄양(낙양)이 바로 그 곳이다. 예전에는 번영을 구가하던 곳이지만 지금의 뤄양은 그러한 번화함이나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뤄양 근처에는 룽먼 석굴이 있는데 높다란 절벽들에 커다란 석굴을 만들고 대형 석불들을 새겨 놓았다. 이 룽먼 석굴에는 석굴이 잘 보이는 자리에 옛날 국민당의 장제스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별장이 있다. 허나 지금은 그 별장이 공산당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르겠다.

룽먼 석굴

룽먼 석굴.


시안, 실크로드의 출발점

 베이징을 떠난 지 보름째 되는 날, 드디어 시안에 도착했다. 시안을 마주한 첫 느낌은 교황의 유배지로 유명한 프랑스의 아비뇽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당나라 시대의 것을 기초로 명 대에 증축한 성벽과 해자가 도시 중심부를 둘러 싸고 있는데 이 겉모습이 역시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비뇽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안의 모습은 전혀 달라서 아비뇽이 작은 시골 마을의 느낌이었다면 시안은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었다. 시내 중심가는 명품관부터 시작해서 대형 나이트클럽에 고급 호텔과 상점 등 없는 것이 없었고 많은 사람과 차들로 거리가 분주했다.

종루

시안 시내 중심의 이정표가 되는 종루.

 당의 수도인 장안 시절, 시안은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며 최고의 번영을 누렸었다. 서역으로 가는 출발점이자 서역에서 오는 대상들의 종착지로서 당시의 사람과 돈, 문화가 모두 몰려오던 곳이 바로 이 곳 장안(시안)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과 문화가 몰려 왔던 흔적은 지금도 남아 회회(이슬람)인들이 모여 있는 이슬람 거리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 등이 바로 시안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영원한 번영은 없는 법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나라가 바뀌면서 수도도 바뀌었고, 동시에 장안의 옛 영광도 사그라 들었다. 시안은 지금은 단지 중국 한 성의 성도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옛 영광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도시의 한 켠에는 이 곳이 고대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음을 알리는 거대한 조형물이 서 있었다.

이슬람 거리

이슬람 거리 야경.


슈위안

슈위안 유스호스텔.

 시안에서는 슈위안 유스호스텔에 여장을 풀었다. 론니 플래닛에도 소개가 되어 있는 슈위안은 건물 중앙의 정원을 중심으로 방이 들어선 낡은 건물로 편안한 분위기와 친절한 직원들 때문에 배낭 여행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은 곳이었다. 슈위안의 젊은 매니저인 폭스는 다운힐 자전거 매니아였는데, 덕분에 우리는 괜찮은 자전거 가게를 소개 받아 수리도 하고 필요한 부품도 살 수 있었다. 시안을 떠나기 전날 밤에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친해진 매니저 폭스와 폭스의 여자 친구이자 호스텔 직원인 제시카, 그리고 관리인 아저씨와 함께 삼겹살에 소주를 준비해 술자리를 가졌다. 비가 많이 오는 밤이었는데, 우린 옥상에 커다란 파라솔을 펼쳐 놓고 새벽까지 계속 잔을 부딪혔다.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를 캬 소리를 연발하며 먹는 우리를 보며 폭스와 제시카는 소주가 왜 독하다는 건지 모르겠단다. 사실 중국이야 맥주 도수만 해도 우리의 두 배가 넘으니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게 당연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처음으로 삼겹살에 소주를 먹어 본다는 제시카는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소주와 삼겹살을 먹으면 어떤 맛일까 늘 궁금했는데 덕분에 먹어보게 됐다며 즐거워했다.

슈위안

비 오는 옥상에서의 삼겹살 만찬

 밤이 깊어가면서 서로의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의 지금 목표는 무엇보다도 지금 가는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이었고, 슈위안 말고도 다른 호스텔의 매니저를 겸하고 있는 폭스는 어서 돈을 모아서 고급 다운힐 자전거를 사는 것이 목표였다.우린 서로의 안녕과 목표를 이루기를 기원하며 술잔을 부딪혔다.
시안을 떠나는 날 아침에는 실크로드의 시작점 조형물이 있는 곳부터 갔다. 낙타 떼를 타고 이동하는 한 무리의 대상들을 묘사한 조형물이었는데 그 의미가 가벼이 와 닿지 않았다. 이곳에서부터 출발이었다. 옛 대상(캐러번)들의 숨결을 간직한 고대의 실크로드를 따라 우리도 나아가는 것이다. 우린 이 곳에서 파이팅을 외치며 다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출발했다. 당장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있을 건지도 모른 채.

실크로드 조형물.

이곳이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을음 알리는 조형물. 낙타 떼를 타고 가는 대상들의 표정이 비장하다.

 예전에 실크로드학의 세계적 대가인 정수일 교수는 고대의 실크로드가 한반도의 경주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증거로 경주에서 출토되는 이슬람 풍의 각종 유리 장식품들을 들었다. 아직까지 넓은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고대 실크로드의 한 축으로서 당당히 교역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왠지 뿌듯한 일이다.

 '비석의 숲'이라는 이름이 참 인상적인 비림은 시안 시내에 자리하고 있는데, 야외에 펼쳐진 드넓은 비석 숲을 상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대부분의 비석들이 보존을 위해 건물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비석들 사이에 들어가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숲 속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밖에 예전부터 시의 중심 역할을 하던 종루와 고루, 옛부터 회회인들이 모여 살던 이슬람 거리, 당나라 시대에 지어진 이슬람 사원 등도 시안에서 여행자들의 눈길을 끄는 곳들이다.

비림

비림. 대다수의 비석들이 보존을 위해 실내에 있다.

 시안 주변에는 중국 사람들이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진시황의 병마용이 있다. 시안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가야 하는 병마용은 그 규모만으로 보는 이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곳이다. 지금까지 오랜 발굴이 이루어졌지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이 발 밑에 아직도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 병마용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병마용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 많은 흙 인형들이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수많은 병마용들이 모두 다른 표정의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이 곳의 만든 사람들의 장인 정신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렇게 거대한 릉을 만든 진시황의 힘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병마용

병마용. 끝도 없이 늘어선 흙 병사들의 행렬.

병마용

다양한 표정의 병마용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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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7.11.03 11:2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와우.. 정말 멋지군요.. 왜 이제서야 알았을까... ^^

2006년 5월 2일, 대륙 횡단의 출발지 텐진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새벽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2006년 5월 2일, 오늘은 바로 그 동안 준비해 왔던 여행의 출발일이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과연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망설였지만 결국 난 지금 텐진으로 가는 배 앞에 서 있다. 넉넉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자전거와 체력 훈련을 하고 두꺼운 책과 자료들을 읽으며 공부를 해왔던 시간들을 지나 드디어 출발이다. 배웅 나온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 하고 배에 올랐다. 정오에 출발 예정이던 배는 도크를 빠져 나가는데만 세시간이 넘게 걸린 끝에 드디어 뱃고동을 울리며 망망대해로 나선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꼬박 하루가 걸려서야 도착한 텐진은 도착부터 시련을 안겨 주었다. 함께 간 일행 자전거의 주요 부품이 운송 중에 분실된 것이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던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 헤메고 있는데 다행히 주변에 계시던 한국분들이 바쁘신 와중에도 이것저것 도움을 주셨다. 무역업을 하며 텐진에 상주하시는 분들이 수하물을 찾으러 항에 왔다가 통역도 해 주시고, 여기저기 연락도 해 주신 것이다. 덕택에 무사히 한국에 추가 부품을 주문하고, 텐진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 하고 보내는 중국에서의 첫 밤.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첫 날부터 액땜이라도 한 걸까. 왠지 앞으로 갈 길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견하는 듯 했다.

고문화 거리

텐진의 고문화 거리

 텐진은 베이징, 상하이, 충칭과 함께 중국의 4대 직할시 중 하나로 중국 공업의 중심 도시이기도 하다. 관광 도시는 아니지만 난까이 대학과 텐진 대학, 그리고 고문화 거리와 골동품 시장 등은 이 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잘 가는 곳들이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텐진 대학과 난까이 대학은 넓은 교정을 연못과 분수 등으로 잘 꾸며 놓아 연인이나 가족 단위의 소풍객도 많이 찾아오는 이곳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다. 고문화 거리는 이젠 관광객들을 유혹하기 위한 싸구려 상품들이 잠식해 버린 곳이지만, 외국인들, 특히나 서양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아직은 흥미를 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국 어디를 가든 노천 시장이나 기념품 가게 등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마오쩌둥 관련 상품이다. 젊은 시절부터 장년까지의 마오쩌둥 사진이 인쇄된 상부터 시작해서 자기로 만든 작은 두상, 그리고 마오쩌둥의 얼굴이 새겨진 가방이나 지갑도 있다. 일부에서는 잔인한 학살자로 그를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마오쩌둥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우러름의 대상인 듯 하다.

마오쩌둥 상품

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마오쩌둥

마오쩌둥

관련 상품들.

골동품 시장

골동품 시장에선 핸드폰이 계산기 대신 흥정의 수단이다. "아저씨, 이 정도면 싼 거야."


하계 올릭픽의 개최지, 베이징

 부품 때문에 예정에 없던 며칠 간의 텐진 체류를 마친 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베이징을 향해 출발했다. 첫 날 이동거리 158.3km에 순수 라이딩 시간 9시간 17분. 잘 포장되어 있고 완만한 도로는 장거리 라이딩을 하기에는 좋은 조건이었지만, 첫 정식 라이딩인데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짐의 무게 때문에 쉽진 않았다. 게다가 베이징 외곽에 도착한 후에도 중심가까지는 거의 30km나 더 들어가야 했기에 우리 일행은 밤 열한시가 다 되어서야 베이징 역 앞의 한 호스텔에 자릴 잡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숙소에 짐을 푼 후에 간단히 씻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겨 버렸다. 그때까지 저녁을 먹지 못한 우리는 역 근처에 있는 24시간 분식점을 찾아 늦은 끼니를 때웠다.

베이징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 D-823

 베이징의 호스텔은 예상 밖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2008년 하계올림픽의 개최지인 베이징은 도시 전체가 올릭핌 준비로 분주했는데 도시의 입구부터 시작해 거리 곳곳에는 올림픽기가 나부끼고 있었고, 시내 곳곳은 도로 확장, 조경 등의 공사가 한창이었다. 천안문 광장 바로 옆에는 커다란 올림픽 카운트다운 시계를 세워 놓고 사람들에게 올림픽을 홍보하는 일도 열심이었다. 아마 숙소의 정비도 이런 올림픽 준비의 일환일 것이다.  또 베이징 시내의 곳곳엔 무슨 용도의 건물들을 짓는 것인지 우리나라 고층 빌딩 두, 세 채는 너끈히 들어갈법한 대형 빌딩들의 공사가 많이 눈에 띄었다. 그 공사들을 보면서 중국이라는 나라는 올 때마다 참으로 내게 두려움을 갖게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9년 이후 세 번째로 온 중국이지만, 이곳은 다시 올 때마다 도대체 그 발전 속도를 종잡을 수가 없어서 때론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BRICs, 그 중에서도 넓은 땅덩어리와 인구로 더 주목을 받고 있는 중국이다. 미래에는 중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초강대국이 될 거라는 견해도 많다. 그리고 몇 년 새에 직접 마주한 중국의 발전 속도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출퇴근 시간의 자전거 행렬.

출퇴근 시간의 베이징에서 자전거의 행렬은 아직까지도 흔히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한때 자전거 통행의 천국이었던 베이징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난 자동차로 인해 자전거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한다.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 날엔 배를 타고 오는 중에 휘어진 자전거 바퀴의 림을 수리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호스텔의 직원에게 부탁해 “수리”라고 한자로 적은 쪽지 한 장을 들고서다. 천안문 쪽으로 방향을 잡은 후, 천천히 걸으며 자전거 가게를 찾기 시작했지만 자전거 가게는 눈에 띄질 않았다. 그렇게 한 손에는 종이 쪽지, 다른 한 손에는 자전거의 림을 들고 한 시간 정도를 헤맸을 무렵, 옆을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말을 건냈다. 내가 자전거 바퀴를 들고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그랬던 모양이다. 손에 든 쪽지를 내미니, 골목 안쪽 구석을 가리킨다. 할아버지가 가리킨 곳으로 가니 나온 것은 골목 외진 곳에 작은 의자와 공구 상자 하나 놓고 자전거를 수리하고 있는 수리상이었다. 비록 의자 하나에 공구 상자 하나가 다였지만 사람들은 연신 그에게 와서 자전거를 수리해 갔다. 나도 사람들 틈에 끼어 림과 쪽지를 내밀었다. 쪽지와 바퀴를 본 그는 한눈에 상태를 파악하고 휘어진 림을 교정해 준다.

후하이 호수의 석양.

베이징 북쪽에 있는 후하이 호수의 석양. 호수 주변에는 분위기 좋은 고급 바들이 자리하고 있다.

 무사히 수리를 마친 후 슬슬 거리를 배회하던 나는, 어스름이 질 무렵 후미진 골목 구석의 꼬치 가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환기가 안돼 꼬치 굽는 연기가 자욱하고, 테이블은 조금 더러울지언정 혼자만의 만찬을 즐기기엔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외국인인 내가 신기했던지 어려 보이는 직원들은 내 옆에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넌 어디서 왔니?"
"신장에서 왔어."

 온 가족이 신장에서 넘어온 이 17살의 위구르족 아이는 가족들의 생계를 이 꼬치 가게로 이어가고 있었다. 형제들은 서빙을 하고 부모님들이 꼬치를 굽는다. 한창 얘기를 나누며 세 병째의 맥주를 비우고 있을 때 가게 밖 골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가게 밖으로 나가보니 왠 아주머니와 아저씨 하나가 싸움이 붙었다. 그들은 서로 언성을 높이더니 주먹 다짐을 시작했고 끝내는 골목 구석에 쌓여있던 쓰레기 더미 위를 뒹굴었다. 직원들과 함께 싸움 구경을 하며 시간은 흘러갔고, 난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조차 잠시 잊은 채 이들 속으로 스며 들었다.

골목 구석의 꼬치 가게에서.

골목 구석의 꼬치 가게에서. 어린 위구르족 점원들.

 베이징에 머무르는 일주일 동안 난 베이징 구석구석을 걸어 다녔다. 처음 왔을 때는 전세 버스에 실려 관광지만 돌아다닌 터라 이번이 두 번째임에도 왠지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내 발로 직접 이 도시를 걸어 다니니 이제야 이 곳을 조금은 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내 몸으로 직접 보고 느낀 후에야 이 곳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곳이 되었고 나를 조금씩 받아들여 주었다. 낯선 곳을 걸으면서 얻는 또 하나의 기쁨은 바로 일상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일상을 일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여행자의 보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길을 걸으면서 마주하게 되는 이들의 많은 일상들이 내겐 또 하나의 즐거움이자 여행의 작은 선물이었다.

인력거 후퉁 투어.

인력거를 타고 후퉁 투어를 하는 관광객들.

 판에 박힌 현대식 건물들과 요란한 네온 사인 간판들이 있는 풍경은 많은 아시아권 나라들의 번화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모습이 된지 오래다. 오랜 식민 강점의 역사는 많은 나라들에게 자신들만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는 법을 지워 버렸다. 베이징의 번화가도 마찬가지인데 맥도날드 매장부터 시작해서 버거킹, KFC에 밤이 되면 켜지는 현란한 네온 사인들은 한국의 번화가와 다를 바가 없다.

 만약 여러분이 제대로 된 베이징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혼잡스런 번화가에서 벗어나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자. 후퉁이라 불리는 베이징의 뒷골목들은 그네들 예전의 삶을 그대로 간직한 곳들로 모두 똑같은 현대의 삶이 아닌 이들의 삶을 살짝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또 걔 중 몇 곳은 최근에는 새로운 관광 코스로 개발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천안문 야경.

천안문 야경. 거대한 마오쩌둥의 그림이 걸려 있다.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대륙의 자긍심이었다.

 베이징 혹은 중국 하면 제일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도 천안문과 자금성, 그리고 만리장성일 것이다. 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일약 유명해진 천안문 광장은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의 광장으로 베이징 시내의 한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매일 아침과 저녁에는 국기 게양식을 보려는 사람들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광장의 주변은 인민대회의장과 박물관이 둘러 싸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천안문을 거쳐 들어갈 수 있는 자금성이 자리하고 있다. '금지된 성'이라는 뜻이 인상적인 자금성은 첫 번째로 그 규모에 놀라게 되고 두 번째로 인파에 놀라게 된다. 엄청난 크기의 자금성은 그 크기만큼이나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대강 거닐면서 둘러본다 해도 족히 세 시간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중국 최고의 권력자였던 마오쩌둥은 “장성에 오르지 않은 자, 대장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장성은 중국인들에게는 곧 대륙의 자긍심이었다. 이 만리장성에 대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잘못 알고 있는 거짓말 중 하나가 바로 "인공위성에서도 보이는 지구 상의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오래 전에 어떤 학자가 방송에서 만리장성의 크기를 과장해서 설명하려다가 쓴 말인데 그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통용되게 되었다. 사실 인공 위성에서 보이는 지구상의 건축물은 없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만리장성은 보는 이를 무릎 꿇리기에 충분한 위용을 가지고 있다. 세월의 쇠락으로 많이 무너지긴 했어도 여전한 그 웅장함을 바라보며 장성이 끝도 없이 이어졌을 그때를 떠올리다 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올 것이다.

자금성

휴일 오후의 자금성. 저 멀리 보이는 천안문부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자금성 2

황제의 거처였던 자금성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은 담으로 둘러 싸여 있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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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omCat 2007.06.24 01:0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오 흥미로워요 ^^

길을 떠나다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
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섬진강에서.

한국을 떠나기 전. 섬진강에서 라이딩 연습 도중.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길을 떠나고, 여행을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을 끌어 당기는 여행의 매력은 대체 무엇일까? 누군가는 일상 탈출의 즐거움과 재충전을 여행을 하는 이유로 꼽기도 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문화와의 조우를 여행을 떠나는 제일의 이유로 꼽기도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단지 길을 떠난다는 그 자체에서 기쁨과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여행의 매력은 이렇듯 다양해서 한마디로 규정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열 명의 사람이 있으면 열 가지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거제 명사 해수욕장.

거제 명사 해수욕장. 간밤의 캠핑을 마치고 다시 출발하다.

 그렇다면 내게 있어 길을 떠난다는 것은, 여행이란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스무 살의 여름, 처음으로 떠났던 강릉으로의 기차 여행부터 시작해서 그간 난 많은 여행을 해왔다. 그리고 이렇게 여행을 하는 도중에, 또 긴 여행을 마친 후에 내가 보았던 것은 한 뼘씩 성장해 가는 나의 모습이었다. 여행 중에 마주쳤던 많은 풍경들, 사람들, 그리고 생각들. 여행을 하면서 내 마음 속에 흘러 들어왔던 모든 것들이 그만큼 나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나는 과정에서 난 내 안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내 안의 나를 마주하고, 나를 키우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길을 떠나는 이유이다.

슈위안에서

여행이란 나를 만나는 것이기에, 때론 숙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일기를 쓰는 것도 내겐 여행의 일부가 된다.


자전거로 대륙을 가로 지르다

 대륙의 동쪽 끝 중국에서부터 서쪽 끝 포르투갈까지를 자전거로 잇는 여행. 그냥 가도 먼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니 어찌 보면 참으로 무모해 보이는 여정이었다. 그런데 왜 자전거였을까? 사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내가 해 본 자전거 여행이라고는 제주도 일주가 전부였다. 딱히 엄청난 자전거 매니아이거나 예찬론자이었던 것도 아니다. 처음에 자전거는 단지 내게 여행을 하는 수많은 방법 중의 하나였다. 걸어서도 하고, 버스를 타고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도 할 수 있는 것. 이런 것처럼 자전거를 타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여행이었다. 하지만 자전거와 함께 7개월의 시간을 보낸 지금, 내게 있어 자전거는 더 이상 옛날의 그냥 자전거가 아니다. 이제 나와 자전거 사이에는 많은 의미와 시간들이 놓여져 있다.

크로아티아

2006년 11월 크로아티아. 지는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라이딩을 하다.

 자전거는 무엇보다도 정직하다. 내가 페달을 구르는 만큼만, 꼭 그만큼만 움직인다. 페달질을 멈추면 자전거도 멈추고, 페달질을 다시 하면 자전거도 나아간다. 스스로가 노력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다. 내가 흘린 땀방울의 양만큼 그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자전거이다. 자전거는 자유롭다. 나의 의지대로 서고 나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내 자유에 따라 자전거는 서고 가기를 결정한다. 다른 이의 의지에 따라 내 자전거가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렇게 자전거는 내게 자유를 선사한다. 자전거는 자연이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는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태양이 내리 쬐면 그 태양을 받는다. 자전거 위에 있는 나와 자연 사이에는 어떠한 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전거는 내게 자연이라는 선물을 준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의 이야기

 어느덧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도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가족과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하던 때가 불과 얼마 전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 7개월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창 속력이 붙었던 내리막길에서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 정말 눈 앞에 살아온 날들이 스쳐 지나가는 경험을 하기도 했고, 햇살이 따가워야 할 6월에 눈 쌓인 해발 3,800 m 고지를 넘기도 했다. 새벽 한시에 풀벌레 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국도변에서 라이딩을 하며 한 없는 고독을 만끽했고, 눈이 내리는 발칸 반도에선 꽁꽁 언 손을 비벼가며 양말을 두, 세 겹씩 겹쳐 신고 라이딩을 했다. 또 그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도 만났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에서 만난 4명의 스페인 아저씨 라이더들, 58살의 중국인 아주머니 라이더, 우리와 같은 길을 가던 일본인 라이더 기타 노부유키, 파키스탄의 라시드 아저씨와 고 소장님, 터키의 바키 할아버지와 케난까지. 모두 다른 곳에서는 쉽게 만나지 못할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중국인 아주머니 라이더.

칭하이 성에서 만난 중국인 아주머니 라이더.

라시드 아저씨.

파키스탄 미안 찬누의 라시드 아저씨와 친구.

기타.

터키에서 만난 일본인 라이더 기타 노부유키.

케난.

쿠르드 족 양치기 청년 케난.

 어렸을 적에 난, 내가 커서 글을 쓰게 될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독후감이라면 학을 띄었고, 작문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나다. 그랬던 내가 지금 이렇게 여행기를 쓰려 하고 있다. 참 많이 부족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내 눈에 담고, 가슴 속에 담아 왔던 이야기들을 사람들 앞에 풀어 놓고, 그래서 내가 느꼈던 것들을 조금이라도 다른 이들이 함께 할 수 있다면 이 부끄러움이 조금은 가실지도 모르겠다. 그럼 앞으로 연재될 자전거 여행 기사를 기대해 주시기를 바라며 여기서 첫 회를 마칠까 한다. 다음 회부터는 톈진에서의 첫 라이딩부터 시작해 본격적인 여행 이야기를 풀어 놓아 보겠다. 모두들 그때까지 안녕하시길...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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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ubit.tistory.com BlogIcon SUBIT 2008.08.07 21:0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우와. 정녕 이런일을 해내신 거랍니까. 대단 +_+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ㅋ 우왕 ㅋ 굳

돌아올 줄을 알고 떠나는 것은 여행이요,
그 끝을 알지 못한 채 떠나는 것은 방랑이라는 말이 있다.
길을 떠난다는 점에 있어서 여행과 방랑은 다르지 않다. 차이라면 방랑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그렇지 않다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때로는 지쳐 쓰러진 후에도 여정을 계속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내게 있어 길을 떠난다는 건 곧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여정을 뜻한다.
그동안 난 길 위에서 많은 것들을 만나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곤 했다. 나를 알기 위한,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한 길이 내겐 여행이요, 방랑이다.

이번 여정에서 난 내가 가는 그 길 위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사람을 만난다는 건 삶을 만난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난 바로 그 길 위의 삶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결코 쉽지 않을 이번 길에 이렇게 발을 디뎠다.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그 길을 가는동안 사람을 만나고, 삶을 만나고...
그리고 또 그렇게 나 자신을 만나고.
이 길이 끝나면 난 한층 스스로에게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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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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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lee431743.tistory.com BlogIcon pascal_1 2007.05.22 20:0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맞는 말씀인거 같아요.
    여행은 목적지가 아닌 지나가는 길목..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그 안에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