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리스본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보는 리스본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눈부신 햇살, 그림 같은 집들, 드넓은 푸른 바다까지 모두 다. 몇 주 동안 우중충한 독일의 겨울 하늘만 보다가 이곳으로 오니 거의 지상 낙원에 온 기분이다. 한 겨울에 이런 햇살을 만끽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리라.

리스본

리스본, 햇살 좋은 날

 내 몸의 반만한 캐리어를 끌고 미리 예약해 둔 호스텔을 찾아 갔다. 여권을 받아 체크 인을 하던 카운터의 직원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나를 쳐다 본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야, 믿을 수 없는 걸? 생일 축하해!"
 "헤헤, 고마워."

 이국에서 보내는 생일. 집에서 생일을 보내 본 적이 언제였던지 가물가물하다. 몇 년 전에는 폼페이를 다녀 오는 기차 안에서 생일을 맞았고, 또 강원도에서, 다시 대륙의 서쪽 끝에 와서 생일을 맞이하고 있다. 이날 밤은 호스텔의 친구들과 가볍게 와인으로 생일을 축하했다. 일행과 기타는 하루, 이틀 정도가 더 지나야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리스본

골목길 산책

 크리스마스에는 리스본 구시가 이곳, 저곳을 거닐었다. 아마 우리 나라였다면 정신 없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곳은 한적하기 그지 없다. 이브에는 조용히 예배를 드리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크리스마스 날은 조용히 집에서 휴식을 갖는 것이 유럽의 대체적인 풍경이었다. 물론 밤새 술을 마시고 밖에서 시끄럽게 노는 젊은이들도 있긴 하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언덕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 리스본을 산책하는 것은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내 안에 들어 오는 모든 것들과 시선을 마주하며 거리를 걸었다. 해변을 따라 햇살을 받고 서 있는 파스텔 톤의 집들, 골목 중앙에 얼기설기 얽혀 있는 트램 라인들, 석양을 뒤로 한 채 어둠 속으로 가라 앉는 다리들.

리스본

동화 같은 파스텔톤의 집들

리스본

트램 라인

 숙소로 돌아 오니 일행과 기타가 도착해 있다. 이게 얼마 만인가. 기타와는 헤어진 지 한 달만에 만나는 것 같았다. 모두 무사했구나. 깁스한 손을 들고 기타와 인사를 나눴다. 왠지 멋쩍고도 반가운 웃음. 간만에 회포를 푸는 우리는 다들 이야기들이 한 가득이었다.
 
로카곶, 여정의 끝

 미리 와서 기다리기를 한 시간여쯤 지났을까? 위쪽에 일행과 기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끝이구나. 길었던 시간이었다.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 오는 일행들을 보며 "나도 저기에 함께 있었어야 했는데."라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잘했다. 스스로에게 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부끄럽지 않은 끝을 보았다.

로카곶

로카곶에 간 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

 로카곶 표지판을 지나치면서부터 울기 시작했다는 기타는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다. 그간의 시간이 스쳐 지나가는 모양이다. 다들 대륙의 서쪽 끝을 상징하는 비석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 보는 동안, 난 가만히 서서 바람을 맞아 보았다. 날씨도 좋았고, 하늘은 푸르르고, 바다는 적당히 고요했다. 오늘의 로카곶은 확실히 우리를 반겨 주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 바람이 만나고 싶어 그 먼 길을 달려 왔던 건가 보다. 대륙의 동에서 서까지 참 멀고도 험했던 그 길을......

로카곶

대륙의 서쪽 끝, 로카곶

 한동안 말 없이 바다를 바라 보았다. 때로는 분명히 힘들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즐거웠던 시간들이다. 새벽까지 계속되던 라이딩은 고요한 추억이 되었으며, 몇 겹을 껴 입고 달리던 발칸의 추위는 하얀 설경 속에 포근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언제 또 한 번 이런 시간, 이런 기회를 갖게 될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이 느낌만은 잊지 않고 내 가슴 속에 담아둘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와 같은 시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다시 만나게 되는 시간을 놓치진 않을 것이다.

기타

질질 짜던 기타도 사진 찍을 땐 멋진 포즈를 취했다

나

나도 한 컷,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가 완전 엉망이었다

연재를 마치며...

 많은 사람들이 이 여행에 대해 질문을 한다. "어땠어요?",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무엇을 얻었나요?"

 "좋았어요. 한 번쯤 해 볼만한 경험이었지요."
 "에이, 그게 다예요? 좀 더 길게 얘기 좀 해 봐요."

 그런데 막상 길게 얘기를 할까 하면 또 더 짧게 듣기를 바란다. 한마디로 어땠다라던지 라는 식으로. 하지만 길 위에서의 8개월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마주 했고 많은 생각들을 했다. 무언가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단정 지을 수 없는 경험과 시간들. 이곳에서의 소중한 기억만큼 저곳에서의 추억과 인연도 소중했다.

 시안의 유스호스텔, 파키스탄의 라시드와 소장님,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풍경들, 미로 같던 이란의 야즈드, 터키의 케난과 바키 할아버지, 기대만큼 사랑스러웠던 류블랴나...... 그 속내 하나하나까지 전부 말로는 적지 못한다. 아마 이 여행기는 사람들의 그런 질문에 대한 작은 대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남겨 두는 추억과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청장님이 처음 연재를 해 보자고 했을 때 사실 적잖이 놀랐다. 어디다 내 놓을 생각도 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일기들이었다. 처음 약속 드렸던 것처럼 끝까지 같은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해 죄송스럽다. 더불어 이런 지면을 할애하고 기회를 주신 청장님께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늘 시간에 맞추고자 노력했지만 가끔씩 원고를 늦게 보냈던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말씀 없이 잘 정리해 주시고 업데이트 해 주신 신영주님, 송정아님께도 감사 드린다.

 아울러 부족한 글 읽어 주신, 이곳을 찾아 오는 모든 분들께도 감사 드린다. 언젠가, 어디선가 또 다른 인연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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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damasworld.tistory.com BlogIcon 다마 2008.04.14 23:4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와우~ 직접 작성하신 기사인 모양이네요~ 힘은 좀 들겠지만, 진정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2. Favicon of https://raycat.net BlogIcon Raycat 2008.04.16 21:0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흐 멋진곳을 다녀오셨군여... 언제나 한번 가볼려나...

  3. TomCat 2008.04.18 00:5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수고 하셨어요~

  4. Favicon of http://blog.daum.net/punky_insun BlogIcon 낭만원숭 2012.06.08 08:3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우연히 들어와 여행기를 읽고 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했어요. 멋진 글 덕분에 기분 좋은 밤이었네요.
    감사합니다.^^

이탈리아도 선진국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풀밭 위의 식사

풀밭 위의 식사

 
이탈리아 하면 일반적으로 먼저 떠오르는 것들은 로마, 피렌체, 밀라노 등의 유명한 관광지들과 세리에 A 축구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피자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선진국이라는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그들이 선진 8개국의 모임인 G8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이탈리아 하면 조금은 감정적이고 게으른 남유럽 국가가 떠오르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왠지 유럽의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조금은 뒤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제노바

제노바는 바다와 산이 마주하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그런데 이런 이탈리아도 선진국이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해 주는 일을 겪게 되었다. 제노바를 빠져 나가던 날 오전이었다. 앞서 가던 일행이 충돌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길 옆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갑자기 문을 열면서 부딪친 것이다. 차 문이 심하게 찌그러져서 제대로 닫히지 않을 정도로 충격이 큰 사고였다. 운전자는 곧 우리를 데리고 근처의 경찰서로 갔다.

 그리고 그 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운전자가 경찰서에 가서 한 일이라고는 자신의 보험 번호와 연락처를 적어 놓고 간 것뿐이었다. 이후 병원에 가고 추가 숙박비 및 진료비, 자전거 수리비, 위로금을 지불해 준 것은 보험 회사였다. 물론 요즘 우리 나라도 교통 사고가 나면 보험 회사들이 이것저것 출동해서 해결해 주고 하기는 한다. 하지만 자전거와 차와의 사고였고 게다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이래 저래 복잡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는 오직 사고 운전자의 보험 가입 번호만 알고 있음으로써 여러 일을 손 쉽게 다 처리할 수 있었다.

앰뷸런스

병원으로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한 컷

  선진국이 선진국이라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경제력도 중요한 요인이겠지만 기본적인 사회 제도와 규칙이 잘 정비되어 있고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운전자가 좋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바로 경찰서로 가 사고를 신고해 주고 외국인인 우리도 큰 어려움 없이 여러 처리가 바로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이탈리아의 제도와 의식이 높은 수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뒷골목

제노바 항 근처의 뒷골목은 한낮에도 혼자 다니기엔 조금 겁이 나는 곳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창녀들이 문간에 서 있으면 살찐 아저씨들이 그들의 손을 부여 잡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2006년 12월 1 저녁 7시

 제노바를 떠나면서부터는 남 프랑스의 환상적인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면서 오랜만에 라이딩을 만끽했다. 11월 말의 코트 다쥐르는 라이딩 하기 좋은 햇살로 가득 차 있었고 따뜻한 미풍도 불어 주었다. 하지만 이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2006년 12월 1 저녁 7, 주위는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많은 차들이 다녔다. 왕복 2차선, 좁은 산길인 이 언덕만 넘으면 오늘의 목적지였다. 기운을 내 힘차게 오르막길을 오르던 때였다.

 갑자기 "" 소리와 함께 눈 앞으로 작은 조각들이 흩뿌려졌다. ", 무슨 일이지?"라고 생각한 건 한 순간이었다. 난 곧바로 손을 부여 잡고 쓰러져 버렸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무슨 일인지도 잘 몰랐다. 내 옆을 지나가던 흰색 트럭이 저 앞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앞서 가던 일행이 비명 소리를 듣고 정신 없이 내게로 달려 왔다. 주위도 어두웠고, 놀라서 무슨 일인지 파악하는 것만도 시간이 걸렸다. 내 옆을 지나가던 차가 날 치고 지나가면서 사이드 미러가 부서져 버린 것이었다. 경황이 없던 나는 앉아서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지나 가던 차들이 자전거가 쓰러져 있으니까 차를 세우고 몰려 오기 시작했다. 나를 친 차량은 저만치 앞에 차를 세운 후, 차에서 내려 우릴 지켜 보고 있었다. 앉아서 손만 부여 잡고 있던 나는 그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곧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몇 분이나 지났을까, 한참을 기다려도 멀리서 바라 보기만 할 뿐 이쪽으로 올 기미가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내가 몸을 일으켜 세워 그쪽으로 다가가려 할 바로 그때였다. 내가 일어나 다가 오는 것을 본 운전자가 잽싸게 차를 몰고 떠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제길!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리길래 당연히 올 줄 알고 기다렸더니 그 자식이 상황을 살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난 정신이 없던 터라 내 옆에 있던 일행에게 앞에 서 있던 차가 날 친 차라고 말하지도 못했었다. 그저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망할 놈의 자식이 도망가 버린 것이다.

코트 다쥐르

코트 다쥐르의 해안 도로. 이곳을 달리는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부러졌어요?

 다행히 다른 운전자들이 교통 정리를 해 주고, 경찰과 앰뷸런스를 불러 주어 난 무사히 병원에 올 수 있었다. 앰뷸런스에 자리가 없어서 경찰서로 먼저 갔던 일행이 뒤늦게 병원으로 오고, X-ray를 찍은 후에 진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이야 정신이 없어서 아픈 것 같았지만 병원으로 오는 앰뷸런스 안에서 안정을 되찾은 나는 큰 부상은 아니겠거니 하는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큰 통증도 없었고 별다른 느낌도 없었다. 뼈가 다친 것만 아니라면 며칠 쉬다가 다시 달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이 때 의사가 X-ray 사진을 들고 들어 왔다.

 "부러졌어요."

 난 두 번, 세 번을 되물었다.

 "부러졌어요? 통증도 그다지 없고 별로 느낌도 없는데?"
 "
이 사진을 봐요. 여기 보이죠? 이 부분이 부러졌어요."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던 일행과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뼈가 부러지는 건 우리가 가정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뼈가 붙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라이딩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의사의 말로는 4~5주 이상은 걸릴 거라고 했다.

 그날 밤, 지친 몸을 추스르고 숙소를 잡은 우리는 둘 다 말이 없었다. 자리에 누워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방 안은 무거운 적막감만 감돌았다. 서로 먼저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이제 난 더 이상 라이딩을 할 수 없었고 일행은 혼자 남은 길을 가야만 했다.

 밤새 쉽사리 잠이 들질 않아 뒤척였다. 한국을 떠난 지 7개월째였다. 이제 남 프랑스에 들어 왔으니 리스본은 정말 코 앞에 있었다. 그런데 난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뼈가 부러진 것만 아니었다면 억지로라도 라이딩을 해 보았을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정말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수 많은 힘든 시간들을 보내면서 이곳까지 왔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뺨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

 며칠 간 사고 처리를 위해 더 머무른 후 일행과 헤어지게 되었다. 난 친척집에 가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고, 일행은 기타와 연락해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해둔 상태였다. 난 같이 달릴 수는 없는 대신 뒤에서 백업맨이 되어 주기로 했다. 리스본에 도착할 즈음의 숙소와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편을 미리 예약하고 그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기차에서 먼저 내려 일행을 배웅하고 난 북쪽으로, 일행은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프랑스 경찰은 CSI가 아니다

 사고 다음 날 몇 가지 처리를 위해 경찰서로 찾아 갔을 때, 난 경찰이 당연히 범인을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전날 사고 차량에서 떨어져 나온 사이드 미러를 경찰에게 증거로 주었다. 사고가 난 곳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대사관에 전화를 했을 때 오히려 우리에게 지도 상의 위치를 물어 올 정도로 지방의 소도시였고, 사고가 난 길은 두 도시를 오가는 출, 퇴근 차량들이 늘 오가는 길이었다. 거기다가 차에서 떨어져 나온 사이드 미러도 있었으니 부품 번호를 조회해서 차량을 알아낸다 던지 근처 정비소 몇 곳만 뒤져도 바로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경찰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 플라스틱 조각으로 어떻게 범인을 찾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어두워서 차량 번호도 보지 못했고, 명확한 차종도 알지 못하니 도리 없다는 투였다. 나중에 대사관의 이야기를 들으니 프랑스 경찰의 반응은 귀찮음이 가장 큰 이유였던 듯 했다. 아주 큰 부상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었기에 정식 사고 접수를 하고 수사에 착수하는 것은 그들에게 일거리 하나만 늘려 주는 꼴이었던 것이다.

 아마 CSI라면 부서진 사이드 미러 조각에서 무언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과학 수사의 환상에 빠져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결국 그렇게 사건은 영구 미제(??) 뺑소니가 되어 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고 운전자는 우리가 외국말로 떠드는 것을 보고 도망가지 않았나 싶다.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이고 하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가끔씩은 그 사람이 혹시 불법 체류자는 아니었을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래서 사고를 낸 것이 덜컥 겁이 났을 것이고 두려웠을 것이다.

 
, 좋게 생각하자면 좋은 쪽일 수도 있으니까 이제는 찾지도 못할 범인을 탓하고 있을 노릇도 아니다. 반은 우스개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프랑스에서 뺑소니 사고를 당한다는 것도 쉽사리 하지 못할 경험이기에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어디 하룻밤 술자리 안주 거리 정도는 되지 않겠나.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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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eydude.tistory.com BlogIcon 오만과 편견 2008.03.21 21:3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와 너무 부러워서 역주행 하면서 읽었어요.

    저도 너무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포기했었는데..

    저는 자전거 보다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가고 싶었거든요.

    너무 재밌고 부럽네요 ^^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03.22 11:0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아핫, 역주행 하셨군요~

      그런데 오토바이나 자동차였나요?

      그쪽도 재미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자동차 같은 경우에는 경비 소요가 장난 아니었던 듯.

  2. Favicon of http://jellyspace.tistory.com BlogIcon 젤리빈 2008.03.26 13:5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놀러왔다가 흥미로운 여행기길래 (전 자전거를 못타거든요 으하하;;; 균형을 잘 못잡아서인지 무서워서..) 읽었는데 많이 안다치셨다니 다행이예요ㅠㅠ 친구분과 부딪힌 운전자가 좋은 사람이라 아래 언급된 사람도 좋은 사람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였군요. 에잇 몹쓸사람!

한밤의 공동 묘지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기타도 하루 일찍 떠나고, 일행도 무릎 상태 때문에 차량으로 이동을 하기로 결정해서 류블랴나부터 베네치아까지는 혼자서 라이딩을 해야 했다. 여기서부터 베네치아까지의 거리는 대략 300km가 조금 안됐으므로 넉넉히 잡아 3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틀이면 충분히 도착할 것 같았다. 일행과 베네치아에서 만날 호스텔을 정하고 아침 8시 길을 떠났다.
 
 류블랴나를 떠나 슬로베니아를 빠져 나가는 길은 예상 외로 힘들었다. 지도를 보면서 높은 언덕을 하나 정도 지나겠거니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래에서 시작해 꼭대기의 마을과는 고도 차이가 거의 1,000m 정도는 나지 않나 싶었다. 거기에 오르막길의 중간 지점부터 슬슬 끼기 시작한 안개가 정점을 찍은 이후에 굉장히 짙어져서 내리막길은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라이딩을 해야 했다. 마주 오는 차가 거의 5m 안에 들었을 때에야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형광색 조끼를 걸쳐 입고 후미등을 켠 후에 시속을 10km 안팎으로 유지하면서 천천히 내려 왔다.

안개

안개 낀 산길

 높은 고도와 안개 탓에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슬로베니아의 국경 도시에 도착했다. 이미 주변은 어둠이 잦아 들고 있었다. 이 곳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 지는데 내가 가야 하는 곳은 몬팔코네 방향이었다. 다른 쪽으로 가면 해안선을 타고 가 언덕은 없었지만 베네치아까지의 거리가 더 멀었다.

 몬팔코네로 가는 길은 왠지 모르게 스산했다. 오가는 차도 드물고 가로등도 거의 없어 내 랜턴 불빛에만 의지해야 했다. 그런데 그 스산함은 다 이유가 있었다.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길 옆 풀섶으로 들어가 볼 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자세히 살펴 보니 내 앞에 펼쳐진 것이 공동 묘지였다. 늘어서 있는 십자가들과 봉분들. 불빛도 없고 인적도 드문 곳에 공동 묘지라니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난 잽싸게 볼 일을 마친 후 얼른 다시 자전거에 올라 타고 페달을 밟았다. 주위를 둘러 보니 제법 많은 십자가들이 눈에 띄었다. 그 다음부터 몬팔코네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정신 없이 달리고 보니 어느 새 몬팔코네였다. 도대체 왜 그런 한적한 곳에 묘지터가 있었던 것 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적한 곳에서, 그것도 변변한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다시 달리고 싶지는 않던 길이었다.

"Venezia 10km"

 오후 6시,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 "Venezia 10km"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만났다. 드디어 도착이구나. 문득 벅찬 기분이 들었다. 3년 전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언젠가 꼭 다시 와야지 라고 다짐했다. 너무도 아름답고 마음에 들어서 꼭 한 번 더 찾아 오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짐처럼 다시 이곳 베네치아에 왔다. 하지만 사실 그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도대체 누가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제 저 앞에 보이는 다리만 건너면 베네치아였다. 일행은 먼저 도착해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약속했던 호스텔로 찾아 갔지만 그곳에 자전거를 끌고 온 한국인 여행객은 없었다. 게다가 빈 방마저 없어 난 결국 다른 숙소를 잡아야 했다. 화장실도 딸려 있지 않은 작은 방. 이틀 동안 장거리를 뛰느라 누적된 피로가 몰려 왔지만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베네치아에서 이 정도의 숙소라도 감지덕지였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근처 피자 가게에 들러 끼니를 때우고 3년 만의 베네치아 입성을 기념할 겸 이곳, 저곳을 거닐었다. 늦은 시간의 산 마르코 광장을 보고 싶어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는데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길을 찾기가 힘들고 인적도 드문 으슥한 골목길들을 혼자 다니기도 뭣해서 다시 숙소에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대운하

대운하의 밤 풍경

 웬만한 곳에 가서도 길을 잃는 다던지 헤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이곳 베네치아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던 곳이었다. 단지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사람 한 명 지나가기 힘든 좁은 골목길들에 그 끝에 불쑥 나타나곤 하는 수로까지 보고 나면 길을 잃고 정말 무슨 일을 당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운하

수로를 연결하는 수백 개의 다리들이 있다

골목

사람 하나 지나가기 힘든 좁은 골목길

 하지만 그러한 두려움은 곧 새로운 골목, 골목을 탐험하는 재미를 내게 안겨 주었다. 졸업하는 친구를 축하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을 만나고,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에 소품으로 쓰였다는 가면 가게를 만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방이라는, 문 밖으로 바로 수로를 바로 마주하고 있는 서점도 만날 수 있었다.

가면 가게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에 소품을 공급했다는 가면 가게.

베네치아 기행, 진정한 물의 도시

 벨기에의 브뤼헤, 중국의 소주 등은 때로 북유럽의 베네치아, 동양의 베네치아라는 칭호를 듣기도 하는 곳들이다. 그 도시들에도 도시 안을 따라 흐르는 운하들이 있었고 제법 물의 도시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진짜 베네치아에 와 본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네치아

베네치아 풍경

산 마르코 성당

사계절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산 마르코 광장과 성당

 좁은 물길을 연결해 주는 수 백 개의 다리들과 백여 개가 넘는 섬들. 대운하를 따라 운행하는 바포레토와 좁은 수로 사이를 누비는 곤돌라. 문을 열면 바로 배를 타고 외출할 수 있도록 수로와 잇닿아 있는 출입문. 모두 이곳이 아니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풍경들이었기에 "물의 도시"라는 칭호는 오직 이곳 베네치아만이 받을 자격이 있었다.

풍경

베네치아 풍경

곤돌라

곤돌라

곤돌라

곤돌라들은 화려한 장식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베네치아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산 마르코 광장과 성당, 매년 2월의 카니발 축제, 유리 공예로 유명한 무라노 섬,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 섬, 오~솔레미오를 부르는 곤돌리오네가 노를 젓는 곤돌라 등 유명한 관광 상품과 명소들이 많다. 모두 아름답고 멋진 풍경들이고 볼만한 가치가 있다.

카니발 가면

카니발 가면. 사람들은 가면을 썼을 때만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한 베네치안이 말했다

카니발 가면

형형색색의 카니발 가면은 이곳의 특산품이다. 종이로 만들어진 가면들은 굉장히 가벼우면서도 단단하다

 그 중에서도 나는 운하의 도시, 미로 같은 물의 도시라는 이곳 베네치아를 제대로 느껴 보고 싶다면 아무런 계획 없이 걷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곳, 저곳을 거닐면서 대운하를 건너는 3개의 다리도 모두 건너 보고 운하 사이사이로 들어 앉아 있는 집들도 구경하고 물과 공존하고 있는 이곳의 풍경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베네치아를 보는 길인 것이다.

흐린 날

흐린 날의 대운하 풍경. 대운하는 베네치아의 중요한 교통로이다

베네치아 풍경

베네치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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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2012history.tistory.com BlogIcon 청춘이다 2008.03.09 01:3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베네치아 정말 신기하군요;;

슬로베니아에 들어오다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
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 시골길 풍경

 자그레브를 떠나 슬로베니아로 들어 오는 길은 골치 아픈 일의 연속이었다. 겨우 30km 남짓한 거리인데도 출발한지 네 시간 가까이 되어서야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탈 수 없었기 때문에 국경으로 향하는 국도를 계속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고속도로의 갓길로 국경까지 갔다. 그 와중에 끝까지 지방도를 찾아 봐야 한다는 기타랑 의견 충돌이 있었고, 또 고속도로로 들어 와서도 경찰에게 설명을 하고 오느라 이래저래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 그렇게 여차여차 해서 국경까지 왔지만 슬로베니아에서의 라이딩도 만만치 않았다. 이곳에서도 계속 지방도를 타고 가야 했는데 가지고 있던 지도와 도로 표지판이 잘 맞질 않아 한참을 헤맨 후에야 제대로 된 길을 찾곤 했다. 그렇게 슬로베니아에서 첫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해서 류블랴나에 들어온 시간은 밤 여덟 시가 다 되어서였다.

식당

국도변 휴게소 식당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류블랴나

드래곤 브리지

류블랴나의 상징, 드래곤 브리지

 이런저런 고생 끝에 류블랴나에 도착한 나는 작은 기대감에 차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광양의 지인 집에 들를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처음 보는 월간지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류블랴나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었다.

 "류블랴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도시가 간직한 그만의 아름다움 때문에 얼마 전부터 서유럽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광지로 주목 받기 시작하고 있는 곳이다."
 
 이 중에서 내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도시의 이름이 간직하고 있는 뜻이었다.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래서 난 전에는 들어 보지도 못했던 이 도시에 대한 작은 환상을 간직한 채로 이 곳에 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집

수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집들의 풍경

 그리고 류블랴나는 그런 나의 기대를 저 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작은 도시라 세 시간 정도면 전체를 다 보기에 충분할 거라고 얘기했지만 천천히 구석구석의 숨겨진 아름다움들을 보고 있자니 그 정도 가지고는 부족했다. 오래된 류블랴나 성에도 올라가 보고, 수로를 따라 걸으며 색색의 집들이 서 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중심가의 광장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파는 길거리 가게들, 맥도날드가 있는 시내 중심가도 재미 있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이곳 저곳에서 새로운 풍경들이 눈을 사로 잡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류블랴나

류블랴나 시내

농구장

호스텔 옆의 농구장은 온 벽이 그래피티로 가득 차 있었다

 오후 늦게 올라간 류블랴나 성에서는 얕게 깔려 있던 구름 사이로 새어 들어와 온 도시를 비춰 주는 햇살을 만났다. 마치 태양마저도 이 도시가 왜 사랑스러운 곳인지 알려 주려는 것 같았다. 구석구석에 따스한 햇살을 드리우면서 '여기 좀 봐 줘."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류블랴나

따뜻한 햇살이 도시를 비춰 주었다

베네통

거리를 걷다가 발견한 가게. 완전히 베낀 가짜인 줄 알았는데 진짜 베네통에서 나온 이너웨어 브랜드였다

안녕, 기타

 터키에서부터 3주 정도를 함께 했던 기타와 헤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류블랴나에서 하루 더 휴식을 취하는 동안 기타는 먼저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기타는 이곳을 떠난 후에 베네치아를 거쳐 피렌체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랑 경로도 조금 달라졌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기타를 붙잡고 밤에 미리 사 두었던 쵸콜렛 한 봉지를 비상 식량으로 쥐어 주었다. 제법 많은 얘기도 나누고 친해졌었는데 이렇게 헤어지려니 조금 아쉬웠지만 서로의 길이 있었기 때문에 붙잡을 순 없었다. 대신 모두 다 무사히 리스본에 도착해서 꼭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떠나는 기타를 배웅했다.

기타

기타가 떠나던 날 아침 함께 사진을 찍었다

조지아 주 아가씨, Chloe + Leah

도미토리

평화로워 보이던 도미토리의 아침 풍경

 호스텔의 도미토리에 커다란 기타를 둘러멘 아가씨 두 명이 들어 왔다. 낮에 시내에서 만났던 길거리 예술가들이었다.

 "안녕. 조지아에서 온 Chloe야."

 옆에 있던 친구가 말을 건넨다.

 "조르지아(그루지야 - 독립국가연합)?"
 "아니, 아니. 조지아 주(state). 미국에서 왔어."

 둘은 미국에서 온 자매였는데 간간이 공연을 하며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 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쾌활함으로 가득한 이들은 방에 들어 와서도 이리저리 인사를 하며 분주하더니 밤에 호스텔 뒤쪽의클럽에서 공연이 있다며 사람들을 초대했다. 활기차게 휘젓고 다니는 둘이 있으니 방 안의 분위기도 왠지 모르게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날 밤의 공연은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쌉싸름한 맥주 한 잔과 함께 감상한 둘의 음악은 컨츄리 뮤직부터 랩까지 다양했는데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실력도 괜찮았다.

Bar Ch.0

공연이 있던 Bar Ch.0

 이들의 다음 목적지는 이탈리아였는데 이곳 저곳 공연할 곳을 찾아 다니며 여행을 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으니 기타 하나 달랑 매고 떠나는 여행도 무척이나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음악 여행, 혹은 사진 여행처럼 목적이 있는 여행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음악과 함께 하는 여행, 사진이 있는 여행 정도가 적당한 표현일 것 같다. 음악이나 사진,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이들의 쾌활함은 둘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때로 이들처럼 주변 모두에게 즐거운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과의 만남은 간혹 여행에 지쳐 있던 다른 이들에게 작은 활력소가 되어 주기도 한다.

Chloe+Leah

조지아 주 아가씨, Chloe + Leah

  기타도 떠나고, 일행의 무릎 상태도 좋지 않아 이곳부터 베네치아까지는 혼자만의 라이딩을 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살짝 긴장해 있던 나에게 이 음악 자매와의 만남은 한 알의 비타민 같은 것이었다. 약간 경직되어 있던 몸도, 마음도 풀리고 새로운 기운으로 자신을 충전할 수 있었다. 그래, 이제 또 힘을 내서 달려 봐야지. 이곳만 떠나면 드디어 이탈리아, 이제 목적지인 리스본도 눈 앞에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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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코 크로캅의 고향, 크로아티아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고속 도로변의 숙소를 출발한 지 한 시간 만에 국경에 도착했다. K-1 선수 미르코 크로캅의 고향이기도 한 크로아티아는 같은 이유로 기타가 제일 기대하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 크로캅은 자국에서도 유명 인사인 모양이었는데 길에서 만난 한 꼬마는 자기가 크로캅의 팬이라며 말을 걸어 오고, 자그레브에서 만난 한 경찰은 크로캅이 자신의 무술 교관이었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실제로 크로캅은 경찰 출신이었기에 자신의 별칭을 그렇게 정했고, 크로아티아에서는 국민 영웅 정도의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기타

기타 노부유키, 크로아티아 입국 기념 킥!

  크로아티아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경찰들이 고속도로로 라이딩을 하는 것을 금지하여 국도로 라이딩을 해야 했다. 하지만 거리는 좀 더 멀어지고 길 상태는 안 좋아졌을지 몰라도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넉넉한 교외 풍경들과 동네 사람들을 만나는 맛은 더해졌다.
 
 입국 첫날은 국도 라이딩의 여파로 예정보다 거리가 길어져서 거의 40km를 넘게 더 달렸는데 야간 라이딩 중에 굉장히 멋진 풍경을 만났다. 분명히 달이고 어두운 하늘엔 별까지 떠 있었는데 달이 마치 석양처럼, 아니 그보다 더 붉게 물들어 있던 것이다. 그렇게 붉은 달을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사진만 언뜻 보면 마치 지는 해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붉은 달

붉은 달

 둘째 날은 함께 라이딩을 하던 일행의 무릎 상태가 많이 안 좋아져서 예정보다 일찍 숙소를 잡았다. 예전에 한 번 다친 적이 있는 무릎이라 했는데 계속된 라이딩 때문에 무릎에 피로가 누적되었던 것이다. 결국 다음 날은 기타와 나만 라이딩을 하고 일행은 차를 타고 이동한 후 자그레브에서 함께 합류하기로 했다.

 기타와 둘이서만 라이딩을 하다 보니 한국에서부터 함께 했던 일행이 얼마나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존재인지를 문득 깨닫게 되었다. 때론 서로 불편한 시간도 있었고 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을 함께 했던 지금까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힘이 되 주고 있던 것이다. 자그레브에 도착하면 다시 기운을 차려 꼭 함께 달려야지라고 생각하며 난 다시 힘차게 페달을 굴렸다.

당구

식사 시간을 이용한 당구 한 판. 지는 사람이 내는 거야?

한적한 일요일 아침의 자그레브

 자그레브에서 첫 산책을 시작한 아침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문을 연 가게도 적었고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몇몇 사람들과 트램을 기다리는 사람들 조금을 빼면 인적이 드물었다. 구름이 짙게 낀 하늘은 도시에 고색을 더하려는 것 같았지만 대개가 현대식으로 리노베이션된 건물들은 그다지 옛스러울 것이 없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터벅터벅 걷다가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시내 주변부에 있는 작은 성당이었다. 마침 내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미사가 시작되었는데 대여섯 명의 현지인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도시의 조용한 분위기에 빠져 있던 나도 잠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차분하게 앉아 있다가 성당 밖으로 나왔다. 오후에는 미리 팜플렛을 봐 두었던 <Nordic Cut>이라는 사진 전시회에 다녀 왔다. 많지는 않지만 다양한 스타일의 사진들을 보여 주는 전시회였는데 세가지 색의 아크릴판으로 한 장의 사진을 삼등분해 보여 주고 있는 사진과 거대한 숲 속에 조명을 비추고 나무들에 여러 다국적 기업들의 상징이 표시되어 있는 사진이 인상 깊었다. 두 명의 소녀가 높은 지붕 위에서 서로를 향해 질주하려 하고 있는 <Game #1>이라는 사진이 있었는데 작가 정보를 보니 곽현진, 한국 사람이다. 소속이 Helsinki School인걸 보니 아마 그쪽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인 듯 했다. 낯선 나라에서 이런 사진전을 본 것도 흥미로웠는데 마침 그 속에 한국인 작가도 있다니 더 재미있었다.

자그레브

자그레브 시내

 야경을 찍으러 시내 중심가를 돌아 다닐 때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한 떼의 단체 관광객을 만났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기에 별 신경은 쓰지 않고 지나갔는데 조금 더 걷다 보니 국내 최대 규모의 여행사 이름이 적혀 있는 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이런 곳까지 패키지 여행 상품이 있나 보다. 제법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인 관광객들을 만나니 조금은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정말 여행사를 통해 못 가는 곳이 없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수요가 있는 곳이면 상품을 만들어 팔기 때문에 찾아 보기만 하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다. 선택의 폭이 다양해진다는 점에서 좋기는 했지만 때로는 무작정 발 닿는 범위만 늘리는 것 같아서 걱정 되기도 한다.

자그레브

자그레브

 일행의 무릎 상태가 나아지질 않아서 이곳 자그레브에서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까지 다시 나랑 기타만 라이딩을 하기로 했다. 슬로베니아에서 일행과 합류할 숙소를 정한 후에 잠자리에 든 내 머리 속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곳에서는 다시 몸이 나아져서 함께 달렸으면 좋았을 텐데 계속 몸 상태가 나아지질 않으니까 걱정이 되었다. 기타랑도 류블랴나에서쯤 헤어질 예정이었고 이제는 다시 나랑 일행 둘만 남게 되니까 서로 잘 의지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오래 누적된 무릎의 피로가 쉽사리 풀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난 "며칠 더 쉬면 나아지겠지, 잘 될거야."라고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내일이면 슬로베니아로 입국한다. 아마 또 새로운 날을 맞고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겠지.

기타

기타. 크로캅을 추억하는 거야?

<어린 왕자> 컬렉션
 
 앙투앙 드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몇 번을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점을 발견하고 날 감동시켰다. 중국의 시안에 머무를 때, 문득 이번 여행에서 <어린 왕자> 책을 모으면 괜찮은 수집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각 나라에서 그 나라 말로 된 <어린 왕자> 책을 사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직접 그 나라에서 책을 사는 것이었기에 스스로에게 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잠깐의 생각으로 시작된 책 모으기는 크로아티아까지 이어졌다.

 자그레브를 떠나는 날 아침, 출발하기 전에 제일 먼저 책방에 다녀 왔다. 책방에는 세 종류의 <어린 왕자> 책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나라들 중에 종류도 제일 많고 책의 디자인도 예뻐서 고르기가 쉽질 않았다. 그 중에서 중간 크기에 하드 커버, 사이사이 칼라 삽화도 잘 들어가 있는 책을 고르고 나니 가격이 90 쿠르나. 오늘 크로아티아를 빠져 나갈 예정이었기에 마침 내게 남아 있던 돈은 89.95 쿠르나였다. 하지만 환전소가 문을 열려면 아직 1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고 또 출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생각하니 무작정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친절해 보이는 종업원에게 조금 부족한 돈으로 살 수 없겠냐고 물어 보니 흔쾌히 그렇게 하랜다. 내가 돈이 부족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가 미안하다며 책을 포장해 주는 직원과 원하는 책을 샀다는 기쁜 마음에 자그레브에서의 마지막 날은 기분 좋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선물이나 기념품, 더군다나 나 자신을 위한 물건은 거의 사지 않는 편이다. 여행 중에는 충동 구매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필요 없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왕자> 컬렉션은 지금까지 내 여행 중에 가장 잘 샀던 것들이라고 느끼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 컬렉션이 내 방에서 최상석에 자리하게 될 것이다. - 애석하게 이란 편은 우편 운송 중에 사라져 버리고 이제 한국을 포함해 13개 나라판만 있는데 앞으로 전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언어의 <어린 왕자> 책을 모으는 것이 소박한 한 가지 희망이다. - 여행을 할 때 면세점에서 기념품을 사는 것도 좋지만 <어린 왕자> 책처럼 자신에게 소중한 의미가 될 수 있는 물건을 한 가지 골라서 모아 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를 더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크로아티아 라이딩

One Fine Fall Day. 크로아티아 입국 첫 날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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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east2.tistory.com BlogIcon east 2008.02.02 06:0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어린왕자 책을 좋아하시는 군요.
    저도 여행하는 내내 읽을거리로 어린왕자를 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여행내내 영문판을 외우는것을 목표로 가지고 다녔는데 ^^
    나라별로 어린왕자 컬렉션 13개나 가지고 계시다니 부럽습니다.
    나만의 전리품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게 아쉽기도 하고요.. 여행기 잘보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02.02 19:0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잘 보고 계신다니 감사합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여유가 생기면 모은 책들을
      전시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갖고 싶어요.

  2. Favicon of http://grey-chic.tistory.com BlogIcon 필그레이 2008.02.03 01:1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헉...이런 반가운 연재를 하고 계셨군요.블로그 쉬느라 몰랐어요.좀 둘러보다 가겠습니다.^^

발칸에 내리는 눈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세르비아

세르비아 입국 3km 전. 나라 이름은 바뀌었는데 표지판은 아직 바뀌질 않았다

 세르비아에 들어 온 둘째 날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넷째 날부터는 조금씩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제 막 11월에 들어섰을 뿐인데 발칸 반도의 겨울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 눈을 맞으면서 하는 라이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이 살짝 얼어서 미끄러웠기 때문에 잘못 속도를 내다가는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양말 두 켤레, 바지 두 벌, 장갑 역시 두 켤레, 여기에 상의는 네 벌이나 껴 입었는데도 전혀 따뜻하질 않았다. 발칸 반도에서의 추위는 어느 정도 각오했지만 이 정도로 추울 줄은 몰랐다. 거기에 눈까지 내리니 라이딩의 어려움은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세르비아

세르비아 국경을 코 앞에 두고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라이딩을 하면서 드는 생각은 어서 빨리 발칸 반도를 빠져 나간 뒤 이탈리아를 지나 따뜻한 남 프랑스로 가자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라이딩을 하다가는 서유럽에 들어 가기도 전에 몸이 다 축날 것 같았으니까.

디미트로그라브

25kg. 저를 사 주세요~. 디미트로그라브

다락방

다락방 숙소에서. 디미트로그라브

 니쉬로 들어가던 날에는 하루 종일 내린 진눈깨비로 클릿 슈즈가 다 젖어 버려서 신발을 고어 텍스로 갈아 신어야만 했다. 그런데 바닥이 미끄러운 고어 신발이 자꾸 클릿 위에서 미끄러지는 통에 라이딩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도 장갑이 다 젖어 버려서 계속 시려 왔다. 여기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이딩 도중에 일행들과 길을 엇갈리게 타는 바람에 다섯 시간이 넘게 쉬지도 않고 혼자 달려서 겨우 니쉬에 도착했다. 만약 이날 밤에 도시로 들어오던 일행들과 우연히 다시 마주치지 못했더라면 밤새 여러 숙소를 돌아 다니며 일행들을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사냥꾼

점심을 먹던 식당에서 만난 사냥꾼 부부. 전리품을 들고 한 컷

베오그라드에 들어 오다

 2006년 11월 5일,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옛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고 5월에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몬테네그로가 투표를 통해 독립하면서 베오그라드는 이제 세르비아의 수도가 되어 있었다.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복잡한 발칸 반도의 정세만큼이나 나라 상황도 복잡하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베오그라드에 들어온 것이 소피아를 떠난 지 정확히 5일만이었으니까 그 동안의 일정에 비교하면 굉장히 빨리 들어 왔다. 동유럽은 나라의 크기들이 작아서 한 나라를 통과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모두 통과하는데 한 달 정도면 넉넉한 일정이니까 한 나라를 평균 일주일 정도면 가로 지를 수 있었다.

베오그라드

베오그라드

 베오그라드는 남동 유럽에선 네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이지만 시내 중심가에 가도 대도시라는 느낌보다는 한적한 중소도시에 온 느낌이 났다. 그리고 그런 점이 오히려 이 도시의 매력인 것 같았다. 정신 없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매력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레메그단 요새

낙엽으로 가득한 칼레메그단 요새

 사바 강과 도나우 강의 합류 지점에 있는 칼레메그단 요새는 이제 공원이 되어 있었는데 오래된 성벽의 잔해들과 군데군데 놓여 있는 대포들만이 이곳이 옛 요새였음을 알려 주었다. 요새는 며칠 간 내린 부슬비로 땅이 촉촉히 젖어 흙 내음이 가득 느껴졌는데, 그 때문에 난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다. 강원도 인제에서 살 때 내가 제일 좋아하던 것이 바로 비에 젖은 흙 내음이었다. 부슬비가 내리고 난 후에 적당히 젖은 흙과 풀 내음이 섞여 느껴지던 그 느낌은 힘들었던 당시 생활의 커다란 활력소였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인데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고된 라이딩과 추운 날씨 덕에 차츰 지쳐 가던 내게 오랜만에 맡는 흙 내음은 정말 큰 힘이 되는 것이었다.

 베오그라드는 요새와 대성당을 포함한 몇몇 관광 명소들뿐만 아니라 국립 박물관을 필두로 하여 훌륭한 박물관들이 다수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국립 박물관, 국회 의사당을 포함해서 여러 종교 사원들, 호텔 건물들까지 아르누보, 네오 클래식, 낭만주의 등 여러 사상과 기조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건축물들은 베오그라드의 풍경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곳에서 또 하나 유명한 것은 바로 나이트 라이프이다. 인근의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등에서 주말 손님들이 몰려들 정도로 베오그라드의 바와 클럽들은 인기가 좋다. 종류도 학생들이나 젊은 층이 몰려 드는 클럽부터 전통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바까지 다양하고 가격도 싸다.

베오그라듯

시내를 걸어 다니다가 만난 그림. Will you marry me?

중앙 기차역

중앙 기차역에서. 베오그라드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로 떠나는 열차편이 잘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나토 공습의 잔해들 - 분쟁의 기억

 베오그라드를 떠나던 날 아침에 길가에 잠시 자전거를 세운 기타가 내게 물었다. "다운, 여기 주변을 둘러 봐.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주변을 둘러 보니 오래 되어서 무너진 것인지 폐허처럼 보이는 건물 몇 채가 서 있었다. "여기가 바로 1999년 옛 유고 연방 시절에 나토와 미군이 공습을 가했던 곳이야. 아마 저 건물들이 당시 공습을 받았던 건물일거야." 그렇구나. 그래서 이렇게 흉물스런 잔해들이 남아 있는 것이구나. 한적하고 아늑한 시내의 분위기에 취해 있던 나는 이곳에 아직까지 저런 건물들이 남아 있는 줄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99년이면 이제 10년밖에 지나지 않은 기억들이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잊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이곳은 분쟁의 역사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세르비아와 발칸 반도 내 주변 여러 나라들의 분쟁은 많이 안정되었다 해도 여전히 진행형이었고, 그 완전한 끝을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칸의 분쟁은 인종, 종교, 민족, 정치 등의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발칸 반도가 나아가야 할 길은 막막하기만 한 것 같다. 현재 발칸의 평화는 사실상 평화 유지군에 의해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태이다. 몬테네그로가 독립을 하였으니 다른 나라의 요구도 더 거세지게 될 테고, 보스니아, 코소보 등의 상황도 더 불안해질지 모른다. 사실상 언제 어느 때 다시 내전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 지구 상에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전쟁이 없던 시간은 단 32년에 불과하다고 한다. 수백,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사람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았던 시간이 그만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여러 분쟁과 전쟁의 흔적들을 - 비록 밖에서만이지만 - 보아 왔다. 그럴 때마다 늘 드는 생각은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이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만, 아니면 그 누군가가 없어져야만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왜 꼭 전쟁을 하고 내전을 일으켜 피를 보아야 하는 것일까? 사실상 그 모든 것은 단지 한 끝만큼의 생각의 차이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 한 끝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서로 죽고 죽여야만 한다는 사실은 역시 날 서글프게 한다. 과연 내가 죽기 전에 이 지구 상에 모든 갈등과 분쟁이 없는 날이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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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만나다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이스탄불을 떠나던 날은 아침부터 비가 많이 올 거라던 일기 예보와 달리 잔뜩 구름만 낀 하루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점심 무렵이 되면서부터 장대비가 쏟아진 통에 우리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고, 결국은 예정보다 가까운 실리부리에 숙소를 잡았다. 잔뜩 젖은 짐들을 정리하고 씻은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에 한 작은 호텔의 입구에 놓여져 있는 자전거를 발견했다. 한눈에 보기에 여행자의 느낌이 나는 자전거.

기타

실리부리에서 만난 일본인 라이더, 기타 노부유키

 그래서 무작정 그 호텔로 들어가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기타였다. 일본에서 온 기타는 4월경부터 시작해 우리랑 비슷하게 대륙을 가로 질러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늘 혼자 다녔다던 기타는 우리에게 당분간 라이딩을 같이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새로운 인연이 반가웠던 우리 또한 그 제안을 받아 들였다. 해서 다음 날부터 함께 하게 된 우리들의 인연은 생각지도 못하게 리스본까지 이어졌다.

기타 노부유키 이야기

 류블랴나에서 잠시 헤어지게 되기 전까지 함께 지냈던 약 3주 동안 기타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와 본격적인 라이딩을 시작한 기타는 파키스탄, 이란을 거쳐 온 우리와 달리 중국에서 중앙 아시아 쪽으로 넘어가 터키로 들어 오는 경로를 따라 왔다. 기타가 계획한 경로는 일단 리스본까지 간 후에 다시 파리로 올라가 일본으로 돌아 가는 것이었다. 기타는 이번 여행을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 했다. 대륙을 가로 지르는 자전거 횡단을 스스로 해낼 수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기타는 자동차의 진동 설계와 관련한 엔지니어였는데 망가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비디오 게임과 온라인 게임을 좋아하는 어찌 보면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일본 사람 타입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농구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었다는 기타는 또 보기와 달리 굉장히 감수성이 예민한 타입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 영화 중에서 <엽기적인 그녀>를 제일 좋아해서 이 영화만 네, 다섯 번 정도 봤는데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했다. 특히 전지현이 산에 올라가 "견우야, 미안해......"를 외치는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울게 된단다. 기타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러브 레터>의 "오겡끼 데스까?"를 잘 따라 하는 것처럼 전지현의 저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점심

기타가 가지고 있던 일본 카레로 점심을 해결했다

 또 기타는 원폭 피해를 직접 겪은 일본인으로서 일본이 핵을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것만 빼고는 정치적으로 극우 성향이었다. 야스쿠니 신사나 그 외 아시아 나라들과 갈등을 겪고 있는 일본 내 몇몇 정치인들의 문제에 관해서도 기타는 극우 경향을 보여 주었다. 신사에는 다른 조상들도 있기 때문에 참배를 하는 것이며 그것을 다른 나라들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기타와 우리는 같이 지내기 상당히 힘든 사이일 수도 있었는데 우리가 함께 지내는 동안은 전혀 그런 걸 의식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는다고 할 때 사람들을 편견 짓게 하는 여러 고정 관념들을 벗어 버린다면 그때야 말로 참된 인간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사람들이 만나 관계를 맺을 때 학교는 어디인지, 지역은 어디인지를 따지며 그에 따른 편견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나 또 특히 일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싫어라고 외치는 것도 바로 그런 고정 관념의 영향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행 중에 인간 관계를 맺는 방식을 선호하는데 - 같은 나라 사람이든, 다른 나라 사람이든 간에 - 여행 중에는 여러 고정 관념이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자 대 여행자로서의 만남. 때로는 그 관계가 더 깊어질 수도 있고 또는 잠시 스쳐가는 사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순수한 마음으로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하나의 까닭이다.

앤디패디

라이딩 도중에 만난 영국인 친구 앤디와 패디. 이들은 런던에서 이스탄불까지 5개월째 도보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불가리아 입성, 가을을 느끼다

 지형적으로는 이스탄불의 서쪽부터 유럽인지 모르겠지만 불가리아에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유럽에 들어 왔다는 느낌이 났다. 에디르네를 떠나 불가리아로 입국하던 날 아침은 짙은 안개가 껴 있었는데 그 풍경이 내 뇌리 속에 있는 동유럽의 느낌을 더해 주었다. 낮부터는 날씨가 맑아져서 오랜만에 고글도 검은 색 렌즈로 바꾸었는데, 간만에 따뜻한 햇살 아래서 라이딩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쉬코브

하쉬코브. 노랗게 물든 은행이 가을이 다가 왔음을 알려 주었다

 첫날 머무른 하쉬코브에서는 시내 주변의 수로를 따라 쌓여 가는 낙엽들이 부쩍 다가온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 주었다. 국경 하나 지났을 뿐인데 터키에서는 가을이 왔다는 걸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 왔었다. 한국을 떠날 때가 봄의 절정인 5월이었는데 어느 새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 이후 하쉬코브, 파르디직, 이흐티만을 지나 소피아까지의 시간은 짙어 가는 가을과 함께한 라이딩이었다.

하쉬코브

하쉬코브

  하지만 가을의 정취를 즐기는 것과 함께 걱정도 따라 왔다. 얼마 안 있으면 낙엽도 다 지고 발칸에는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 전에 발칸을 빠져 나가야 할텐데 처음 예정보다 일정이 계속 늦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정대로라면 이미 이탈리아 북부에 진입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동유럽에 들어 왔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눈 내리는 가운데 라이딩을 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니까 어서 이 곳을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달려야 했다.

부고

불가리아의 독특한 풍경 하나. 이 곳에서는 부고를 이런 식으로 동네에 알렸다

이흐티만

소피아 들어 가기 전날 묵었던 이흐티만.

이흐티만

도시 전체를 신비한 마력이 감싸고 있는

이흐티만

듯한 묘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과 하겐 크로이츠

 아침 일찍 찾아간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은 아직 찾아온 사람들이 없어 한적했다. 내가 혼자 안으로 들어서자 기념품 가게를 지키고 있던 할머니가 긴 양초 하나를 건네 주며 기도를 하라고 일러 주었다. 비록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성당에 오면 늘 차분해지는 걸 느꼈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으로 초를 켜고 기도를 했다.

 성당 앞에서는 작은 골동품 시장이 열리고 있었는데 각종 낡은 물건들 - 사실 별로 진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물건들이 태반이었다 - 이 눈에 띄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었던 건 바로 나치의 상징물인 하겐 크로이츠가 새겨져 있는 각종 기념품들이었다. 배지나 메달부터 시작해서 반지, 펜던트, 라이타, 담배갑 심지어는 가짜 라이카 카메라에 새겨진 나치의 문양까지 하겐 크로이츠와 관련해서 없는 게 없었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

소피아의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나치의 문양이라면, 더더군다나 유럽에서는 피해야 할 상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렇게 버젓이 팔리고 있다니. 호기심이 생긴 나는 머물고 있던 호스텔의 주인 아저씨에게 골동품 시장의 나치 기념품들에 대해 물어 보았다.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물건이 가짜이지만 아주 가끔씩 진짜 나치 시대의 물건이 들어 오기도 한다고 했다. 불가리아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 편에 서 있었는데 그런 연유로 이런 물건들이 흘러 나오는 것이란다. 그는 이 물건들이 다른 유럽 국가 사람들에게 좋은 기념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나치 관련 상징물들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구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것들이 좋은 기념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긴 논쟁은 원치 않았기에 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지만 2차 대전 당시의 불가리아를 이야기하는 아저씨를 보면서 살짝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치가 승리했더라면 불가리아도 승전국이 될 수 있었을 꺼라며 주인 아저씨가 순간적으로 아쉬움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아저씨의 생각을 받아 들일 수는 없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니쇼우키(욱일 승천기 - 일제 시대의 일장기)가 기념품이 될 수가 있을까? 마찬가지로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점령 하에 있던 혹은 연합군이었던 다른 유럽 국가 사람들에게 하겐 크로이츠가 어찌 기념품이 될 수가 있겠는가. 물론 독일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독일은 전후 자체 청산을 제일 열심히 한 나라이기도 하고, 여전히 나치와 관련한 사항들은 독일에서 굉장히 금기시되는 것들이다. 최근 들어서 네오 나치니 스킨 헤드니 하는 정신 나간 세력들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유럽에서 나치는 여전히 피해야 할 대상이었다.

 소피아의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은 19C 후반 불가리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던 여러 나라의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성당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 점령 당해 있던 불가리아를 위해 러시아와 동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의 군인들이 함께 싸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간 군인들을 위해 세워진 성당 앞에서는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나치의 기념품이 팔리고 있다니...... 조금은 슬픈 기분이 들었다.

EU 가입

내가 불가리아에 머물던 때는 불가리의 EU 가입이 63일 남아 있었다. 그들의 오랜 숙원이었기에 다들 조금은 들떠 있었지만, 그 전에 확실한 역사 청산이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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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eloyou.com BlogIcon 멜로요우 2008.01.13 02:2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불가리아라..ㅎㅎ
    불가리아의 사진들은 처음으로 보는 것 같아요 ㅎㅎ
    생각보다는 약간 고풍스러운 느낌이 ㅋ;
    특히나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이 참으로 인상적이네요 ㅎㅎ
    성당의 모습과 주차된 차들의 모습의 대비가 참 묘하게 느껴져요 ^^

  2. Favicon of http://solut2000.tistory.com BlogIcon 우성군 2008.02.02 01:2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불가리아 갔을 때 날씨가 흐렸는데, 도시 분위기와 딱 맞아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

새벽의 라이딩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괴뢰메에서의 짧은 휴식을 끝내고 앙카라를 향해 출발한 시간은 오전 10시. 페이스를 높이지 않고 천천히 달려 첫 번째 호텔이 있는 도시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라이딩 거리도 80km 정도로 길지 않았다. 조금 고민하던 우리는 70km 정도 떨어져 있는 다음 도시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오늘은 컨디션도 좋았으니까 그 정도는 무리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 도시에 도착한 시간이 밤 11시. 이제는 라이딩 거리도 150km가 넘었고, 시간도 늦었다.

 그런데 지도 상에 표기 되어 있던 크기와 달리 도시의 규모가 작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이 곳에 있는 호텔은 단 하나. 할 수 없이 오늘은 거기서 자야만 했다. 그런데 물어 물어 찾아간 호텔의 주인 아저씨가 예상보다 비싼 가격을 불렀다. 깎아 주지도 않는다. 두 사람에 40이라고? 내가 보기엔 그것의 반만 받아도 충분한 호텔 규모인데.

 일행과 밖으로 나와 고민을 하고 있자니, 아까 길을 알려 주었던 사람들이 다가왔다.

 "호텔 찾았네. 왜 나와 있어?"
 "응. 생각보다 너무 비싼데요. 주인이 두 사람에 40(forty)을 달래요."
 "14(fourteen)라고? 그럼 정상 가격인데. 한 사람에 7(seven)씩."
 "응? 40(forty)이 아니라 14(fourteen)라고요?"

 이런, 일행과 나 모두 속에서 울컥한다. 호텔 주인은 도대체 몇 배를 더 부른 거야. 마침 뒤늦게 나와 얘기를 듣던 주인이 조금 멋쩍었던지 20으로 값을 내린다. 그 이하는 못 받겠단다.

 "제길, 웃기고 있네. 아저씨나 자."

 잔뜩 화가 난 우리는 결국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20~30km 정도 더 가면 국도변에 호텔이 하나 있단다. 시간은 이미 열 두시가 다 되었다. 별 수 없지. 저 호텔에서 잘 수는 없으니까. 근처 슈퍼에서 요기를 하고 다시 페달을 굴리기 시작했다.

 야심한 밤. 일행이 저 멀리 앞서 가고 나니, 들리는 건 내 숨소리와 멀리서 들려 오는 벌레 소리뿐이다. 앞서 가는 일행의 후미등이 가물가물해져 갔다. 차도 다니지 않는다. 완벽한 적막. 왼쪽으로는 누군가 불을 놓았는지 달빛 아래 불꽃이 너울대고 있었다. 잠시 페달을 멈추고 불꽃을 보았다. 왜지? 화전도 아니고 이런 곳에 불을 놓는 이유는. 작게 시작된 불꽃은 곧 크게 넘실대며 넓은 들판을 삼킬 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다시 페달을 굴려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다음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한 시가 넘어서였다. 국도변 휴게소에 함께 있던 작은 호텔. 라이딩 거리는 180km가 넘었다. 이제는 더 재고 할 것도 없었다. 호텔에 짐을 푼 우리는 곧 잠에 빠져 들었다.

 여담이지만 우리는 다음 날 아침 11시에 출발해서 오후 2시에 만난 첫 번째 호텔에 바로 짐을 풀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었다. 호텔을 만난 순간 서로 돌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으니까. 역시 새벽 라이딩의 여파는 컸다......

짙게 깔린 먹구름 아래의 이스탄불

이스탄불

짙게 깔린 먹구름 아래의 이스탄불

 동-서양의 가교. 한 도시 안에서 아시아와 유럽이 공존하는 곳. 성당이자 이슬람 사원인 아야 소피야와 그랜드 바자가 있는 곳. 차도르를 두른 부인과 미니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많은 수식어를 갖고 있는 곳, 이스탄불. 한국을 떠난 지 5개월 14일째, 드디어 이스탄불에 들어 왔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때는 마침 우기가 시작되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이스탄불에 머무르는 8일 동안 맑은 날보다는 흐린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아야 소피아 앞

아야 소피아 앞.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아저씨

밤 풍경

비에 젖은 이스탄불의 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이스탄불에 매혹 당해 버렸다. 비가 내리는 이 곳에서 나를 사로 잡은 건 유명한 아야 소피아도, 그랜드 바자도, 보스포러스 해협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비 내리는 이스탄불의 정경이었다.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사원의 모습들. 비에 젖어 반짝거리는 길 위의 돌들. 색색의 우산의 든 채 거리를 걸어 가는 사람들. 짙게 깔린 먹구름이 드리운 마르마라 해.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이스탄불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미 그것만으로 충분한 아름다움을 발한 채.

 4일째 되는 날은 잠시 해가 비쳐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순환하는 유람선을 탔다. 하지만 이미 흐린 날의 이스탄불에 푹 빠져 버린 내게 맑은 날의 이스탄불은 그리 와 닿질 않았다. 햇살이 비치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아름답다 해도 이미 내 마음 속엔 적당히 흐린 날의 이스탄불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루 모스크

아야 소피아에서 바라 본 블루 모스크

 물론 아야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 그랜드 바자와 보스포러스 해협 등도 이스탄불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곳이고 누군가는 단지 그곳을 보는 것만으로 이곳에 온 보람을 느낄 만큼 아름다운 곳들이다. 그저 이미 흐린 이스탄불에 사로 잡혀 버린 나에게 그만큼 와 닿지 않았을 뿐.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한국 사람들도 많이 오는 곳이기에 곳곳에서 한국인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고, 또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도 몇 군데 있다. 그런 곳을 찾아가면 여행 정보 등도 얻을 수 있고 오랜만에 우리 말로 실컷 떠들며 회포를 풀 수도 있다. 단, 한국인이라고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는 문제가 발생한 한국인 여행객으로 가장해 다른 한국인 여행객들을 등쳐 먹는 사례들이 가끔씩 보고 되고 있으니 조심하자.

수산물 시장

골든 혼 옆에 있는 수산물 시장

아가미 꽃

생선의 신선도를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인지, 마치 꽃처럼 아가미를 뒤집어 놨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 - 아야 소피아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에서 그랜드 바자와 함께 제일 유명한 곳일 것이다. 기원 후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에 의해 세워진 성 소피아 성당은 그 후 약 10C간 성당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 왔다. 그러다 15C 무렵,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이스탄불 - 당시는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후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 이 점령 당하면서 성 소피아 성당도 그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투르크 인들은 이 성당을 파괴하지 않았고 - 바로 이 투르크인들의 아량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멋진 건축물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 단지 몇 가지를 더하여 자신들의 회교 사원으로 사용했으며 근세까지도 아야 소피아는 중요한 회교 사원 중 하나였다.

아야 소피아 내부

아야 소피아 내부

 그렇게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예전의 기억들이 희미해져 가고, 이곳이 성당이었던지도 잊혀져 갈 즈음 우연히 드러난 회벽 안쪽에서 발견된 기독교 모자이크 벽화들이 이곳의 옛 역사를 현세에 되살려 주었다. 그리고 터키 정부는 이곳을 한 종교의 전유물로 두지 않고자 회교 사원도 성당도 아닌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참으로 멋진 결정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내부에서는 회벽에 뒤덮인 옛 기독교 모자이크 벽화들을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 계속 진행 중이며 이 곳을 보기 위해 일년 내내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다.

모자이크 벽화

벗겨진 회벽 사이로 드러난 모자이크 벽화는 굉장히 화려해서 당시 이 곳의 영광을 엿볼 수 있다

신성한 종교 의식 - 수피 댄스

 이스탄불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중의 또 하나는 수피 댄스이다. 이제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식당의 무대에서 저녁 공연으로 열릴 정도로 그 신성함과 가치가 격하되었지만 원래는 이슬람의 한 종파인 수피교의 수행자들이 추는 춤이다. 커다란 치마와 모자를 쓴 수행자들이 한 없이 빙글빙글 제자리를 도는 춤인데 짧게는 십분, 길게는 삼심분 가까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이때 한 손을 위로, 다른 한 손을 아래로 향하는 것은 하늘, 그리고 땅과의 교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행자들이 한 없이 돌며 춤을 출 때는 너풀거리는 옷자락이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데 그 아름다운 형태가 수피 댄스를 보고 싶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난 좀 제대로 된 수피 댄스를 감상하고자, 전통 종교 단체의 공연을 따로 예약해서 보았는데 제대로 된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만 빼면 들인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하나, 둘 씩 나오기 시작한 수행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끊임 없이 돌며 교감을 꾀하는 그 모습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수피 댄스 공연

수피 댄스 공연

 이스탄불에서는 상당히 많은 곳에서 수피 댄스 공연을 광고하고 볼 수 있는데, 주점의 무대에나 올라오는 공연보다는 조금 더 제대로 된 공연을 보기를 추천한다. 그 중 하나는 지금은 운행이 중단된 오리엔탈 특급 열차의 종착지였던 중앙 기차역에서 하는 공연이다. 이곳은 카메라 셔터 소리조차 방해가 될 만큼 경건한 분위기에서 제대로 된 수피 댄스를 느껴 볼 수 있다.

수피 댄스 공연

수행자들은 쉴 새 없이 빙글빙글 돌면서 무아지경에 빠져 들고 하늘과의 교감을 꾀한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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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jjajan.tistory.com BlogIcon 짜잔형 2007.12.22 10:5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자전거 여행을 하시나봐요... 자유로운 영혼이 부럽습니다~~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7.12.24 23:2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게 제 희망사항 중 하나예요~
      지금은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라마단의 아침 식사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터키에 들어온 지 일주일 째, 드디어 반에서 라마단의 첫 아침을 맞았다. 전날 밤부터 괜히 긴장해 바를 찾아 다니며 술을 마신 나와 일행은 - 파키스탄 북부 이후로 이란을 통과할 때까지 거의 두 달 반 동안 술을 마시지 못했었다. - 다음날 아침 아홉 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이런, 아침 먹기는 글렀구나. 전날 밤에 호텔 직원이 아침 여덟 시까지만 오면 아침을 주겠다고 했는데 늦어 버린 것이다. 어제 사다 놓은 빵을 뜯으며 창 밖을 보니 이제 음식 가게들도 슬슬 문을 닫는 분위기다.

TamaraLive Band

술에 굶주려 있던(??) 우리는 오랜만에 술집을 순회하며 즐겼다. Bar Tamara와 라이브 공연이 있던 맥주집에서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숙소 로비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일하던 젊은 직원들 몇 명이 우리를 구석의 골방으로 부른다. 갓 나온 따끈따끈한 빵에 스프, 차까지 마련된 아침 식사.

 "어라, 뭐야 너희들? 니들은 지금 뭐 먹으면 안되잖아. 라마단인데."
 "응? 괜찮아, 괜찮아. 우리는 절반만 무슬림(half-muslim)이야. 독실한 사람들도 있지만 우린 절반만, 흐흐."

 손가락을 반만 내보이며 반-무슬림이라고 외치는 녀석들. 뭐 우리 나라에서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게 규율을 지키는 건 아니지 않은가?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덕택에 라마단의 첫 아침은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차로 포식을 할 수 있었다. 녀석들, 반-무슬림이라 고맙다.

케밥

터키하면 떠오르는 건 뭐니뭐니해도 케밥. 말라타에서

넴룻 산의 거석상

 반 호수를 건너 타트반을 지나면서부터는 페이스가 떨어져 버려서 하루 평균 70~80km를 달린 후에 나오는 도시들에 숙소를 잡았다. 그렇게 라이딩 하기를 일주일, 드디어 말라타에 도착한 우리는 호텔에 짐을 맡기고 넴룻 산으로 향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자 론니 플래닛의 터키판 표지를 장식한 사진을 찍은 곳이 바로 넴룻 산이다.

아이들

넴룻 산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함께 있던 일행이 길 가던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하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정상의 양 쪽 - 동과 서- 에 세워져 있는 거석상들은 기원 전에 존재하던 고대 왕국의 왕이 세워 놓은 것이다. 신을 꿈꾸던 안티오코스 왕은 자신이 죽었을 때를 대비해 산 정상에 무덤을 만들고 그 주위에 여러 수호신상들을 세워 두었다. 원래는 몸체와 함께 있던 거대한 좌상이지만 지진이 나면서 몸체에서 머리 부분이 떨어져 지금은 커다란 두상들만 바닥에 서 있는 조금은 기괴한 모습이다. 밤이 되면 혼자 있기는 조금 무서울 정도로.

석양

석양을 받고 있는 두상들. 뒤쪽은 폐허에 가깝다

아침해

아침 해가 떠오르면 두상들도 간밤의 잠에서 깨어난다. 뒤쪽으로 원래의 몸통이 보인다

 석양을 받은 채 어둠 속으로 침잠해 가는 거석상들을 감상한 후, 정상 밑에 있는 숙소에 여장을 풀고 넴룻 산에서 하루를 묵었다. 다음 날은 새벽 4시 기상이었다. 이번엔 어제 본 석양의 반대편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받으며 대기 속으로 떠오르는 상을 감상하는 것이다. - 산의 정상은 걸어서 10분 정도면 한 바퀴를 돌 수 있으니, 산의 양 쪽에서 일출과 일몰을 바라보는 꼴이다.

밤

거대한 석상을 배경으로 어두워진 하늘에 달이 떴다

 말라타에서는 훈자에서 함께 지냈던 한국인 큰 누님을 우연히 다시 만나 반가운 재회를 하고 함께 넴룻 산으로 왔다. 아마 지금쯤이면 이곳에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지만 말라타에 오기 전에 연락을 하지 못한 터라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겠지 하고 있던 터였다. 오랫만에 보니 우리가 더 마르고 탔다며 그래도 건강해 보여 잘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안심하는 누님을 보니 고맙다.

 문득 훈자에서 처음 만났을 때, 누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당시 원래 네 명이던 일행이 두 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는데 여정에서 빠지게 된 두 명은 덩치도 좋고 한눈에 보기에도 튼튼해 보이는 체형이었다. 그런데 - 누님의 표현에 따르자면 - 어디 집에서 컴퓨터 오락이나 하고 앉아 있을 것 같은 나머지 둘이서 여정을 계속한다니 걱정이 됐던 모양이었다. 그 말을 처음에 듣고는 어찌나 웃겼던지. 아무튼 그 오락맨 둘이 이렇게 건강히 살아 남아서 머나먼 터키 땅에서 다시 만났으니 이 또한 여행 중에 만나는 작은 연의 기쁨이었다.

 넴룻 산 일정은 보통 하룻밤을 자는 코스로 이루어지는데 말라타에서 차를 타고 정상 밑의 호텔에 여정을 푼 후 해 지는 풍경을 감상하고 다음 날 아침 다시 해 뜨는 모습을 본 후에 말라타로 돌아 오는 일정이다. 말라타 시내의 여행 안내소에서 차와 숙소를 예약할 수 있고, 원한다면 산 정상을 넘어 남쪽 카호타로 내려가는 일정을 택할 수도 있다.

넴룻사람들

새벽부터 넴룻 산에서의 일출을 감상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스타워즈의 촬영지, 카파도키아

 터키 중남부 괴뢰메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카파도키아는 오랜 세월 비와 바람 등의 풍화 작용에 의해 형성된 거대한 기암 괴석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그 독특한 풍경 때문에 영화 <스타워즈>의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버섯 머리를 하고 있는 거대한 돌기둥들부터 구멍이 숭숭 뚫린 땅과 곳곳에 숨어 있는 동굴들까지. 이란의 칸도반이 동화 속 난쟁이들의 집처럼 아기자기한 느낌이었다면 카파도키아는 거대함에 압도 당하는 곳이었다.

카파도키아 전경

카파도키아 전경

 이곳은 워낙 세계적인 관광지이기 때문에 투어 코스도 다양하게 많이 있는데 하루 종일 전세 버스를 타고 돌아 다니며 근교의 지하 도시까지 중요 포인트들을 볼 수 있으므로 본인의 취향에 따라 잘 선택해서 관광을 하면 된다. 또 걷기를 좋아하는 여행객들을 위한 하이킹 투어도 있지만 기본적인 체력이 밑받침 되지 않는다면 상당히 힘이 든다. 그리고 괴뢰메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가 많이 있는데 대부분의 숙소들이 도미토리나 더블룸 형태의 동굴방을 갖추고 있으므로 특이한 경험을 원하는 여행객들은 동굴방에서의 하룻밤을 추천한다.

 카파도키아에 머물던 동안 난 하루를 근처의 재래 시장과 ATV 투어로 보낸 후에 다음 날은 여덟 시간 동안 혼자서 산책을 했다. 어느 곳이라도 걸어 가다 보면 기괴한 풍경들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방향도 목적지도 없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다음 마을 근처에 도착하기도 했는데 그럼 다시 방향을 틀어서 걸었다. 다행히 어제 했던 ATV 투어가 지리를 익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기에 딱히 길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체력이 좋고 걷는 것을 좋아하는 여행객이라면 카파도키아는 하이킹 여행을 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굳이 포인트를 찍어 주는 가이드가 있을 필요도 없다. 그냥 걷다 보면 길이 나오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하면서 방향을 잡아 가는 것이었으니까.

버섯 돌기둥

독특한 버섯 모양의 돌기둥들

괴뢰메

카파도키아의 중심 도시인 괴뢰메

 저 멀리 보이는 버섯 바위에 가기 위해 방향을 잡고 걷다 보니 야외 박물관을 지나 커다란 UFO 박물관의 표지판이 나타났다. 'UFO 박물관?' 한 눈에 보기에도 싸구려 같아 보이는 간판에는 유명한 로즈웰 외계인의 사진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 <스타워즈>도 찍고 했으니 싸구려 상술로 기획한 박물관이거나 혹은 정말 외계인의 정체를 믿는 집단이 목 좋은 곳(우주와 감응하기 좋은 곳??)이라고 세워 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머나 먼 이국의 보름달

 내가 카파도키아에 도착한 때는 마침 한국의 추석이었다. 이제 집을 떠나온 지도 어느덧 5개월을 넘어 가고 있으니 군대에 다녀온 거 빼고는 제일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는 거였다. 괜히 기분이 묘해진 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몇 통의 전화를 걸고 마을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밤이 되고 나선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보기 위해 숙소 뒤편의 고지대로 올라갔다. 매년 정월과 추석이 되면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건 내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몇 년 전부터는 비는 소원이 늘 똑같아졌는데 이제는 그 소원을 계속 비는 게 왠지 부질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냥 계속 빌고 있다. 스스로 초심을 잃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보름달

먼 이국에서 마주한 보름달. 소원의 효과는 똑같으려나?

 먼 이국 땅에서 바라보는 달도 한국에서 마주하던 달과 차이가 없었다. 밝고, 둥글고, 커다란 보름달.

 "제 소원은 말 안 해도 알죠? 늘 말하던 그거요. 그럼 전 이제 내려가서 잘게요. 다음에 또 봐요."

카파도키아의 명물 - 열기구 투어

 카파도키아의 명물인 열기구 투어는 매일 동틀 녘과 해질 녘에 한 시간 정도씩 운행하는 투어인데,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 중에는 열기구 투어만을 위한 돈을 따로 모아 온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타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돈만 있으면 다시 타고 싶다고 입을 모으는데, 멀리 상공에서 카파도키아 전경을 바라보며 일출과 일몰을 바라보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 그 모든 것이 다 잊혀질 듯 아름답다 한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가격인데 한 번 탑승을 위한 2006년 9월 당시의 가격이 우리 돈으로 한 사람에 18만원 정도였다.

열기구 투어

카파도키아의 명물 - 열기구

열기구 투어

이른 아침, 열기구가 하나, 둘씩 떠오르고 있다

 열기구 투어를 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안은 열기구가 하늘을 가득 메우는 풍경을 보러 가는 것이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저 멀리 뜨고 지는 열기구들을 바라볼 수 있는데 많을 때는 스무 개 가까이 되는 열기구들이 풍경을 가득 채우니 그 풍경 또한 놓치기 아까운 모습이다.

 또 새로운 인기를 얻고 있는 투어 중 하나는 점점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ATV 투어이다. 한 명의 현지인 가이드가 동행하여 몇몇 중요한 포인트들을 도는 투어인데 편하게 포인트들을 다닐 수 있고, 몇몇 곳은 비교적 익스트림한 라이딩도 할 수 있다. 단, 도로에서 달릴 때에는 생각보다 꽤 빠른 속도를 내게 되므로 무엇보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ATV

재미있는 여행객들과 ATV 투어를 함께 했다. 우리는 지구를 지킬까?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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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divershigh.com BlogIcon SUPERCOOL. 2007.12.08 02:1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자전거 여행..참.. 즐거워보이네요

  2. Favicon of http://pjjk.tistory.com BlogIcon skyfish 2007.12.18 04:3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열기구 관광은 처음 봤습니다. 너무 멋져요~ 정말 한번 타 봤음 좋겠내요^^

  3. journey 2012.10.20 09:4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카파도키아...꼭한본가보고싶네여 열기구 사진 담아갑니다^^

터키에 들어 오다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터키 입국

터키 입국 기념. 저 멀리 트럭이 보이는 곳이 국경이다

 오루미예를 출발해 터키와 이란의 국경인 세로 검문소를 지나 터키에 들어 왔다. 사실 이란에서 라마단 - 이슬람력으로 아홉째 달은 아침 해가 뜬 후부터 저녁 해가 지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이슬람의 금식/금욕 기간 - 이 시작하기 전에 터키에 들어 오려고 며칠간 조금 더 피치를 올려 달려 왔다. 터키도 이슬람 국가이지만 정교 분리가 정식 정책인 국가이니 라마단 기간이라도 이란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란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시골 지역들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라마단이라도 여행자들은 예외가 되긴 하지만 실제적으로 문을 열고 음식을 파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터키 입국 후 첫날의 목적지는 국경에서 40km 정도 떨어진 유세코바였다. 그런데 국경을 넘으면서 생각보다 오르막길이 많아 체력이 많이 떨어졌고 이후에도 포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길들이라 계속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오후 세 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볼 일도 보고 싶고 슈퍼에 들러서 먹을 것도 좀 살 요량으로 길 옆에 있던 마을 안쪽으로 무작정 들어 갔다. 그런데 안쪽으로 들어가도 가게 같은 건 보이질 않고 그냥 집들뿐이다. 호텔이라고는 당연히 없는 곳이고.

 어찌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마침 마을 안쪽으로 승용차 한 대가 들어 간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시선을 교환한 우리는 운전자에게 하룻밤만 재워 줄 수 있냐고 손짓, 발짓을 해 가며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운전자가 오케이를 했다.

바키 할아버지네 집

바키 할아버지네 집.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자, 손녀까지 모두 한 집에 살고 있다

 알고 보니 그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이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손녀, 손자들까지 온 가족이 한 집에 함께 살고 있었다. 집 안의 어른인 바키 할아버지는 말도 제대로 안 통하고 행색도 이상하게 생긴 외국인들 두 녀석이 와서 재워 달라고 하는데도 선뜻 반겼다. 따로 방을 내주고 식사도 챙겨 주고, 또 차까지 주면서 극진한 손님 대접이다. 밤에는 쌀쌀할지 모르니 두꺼운 이불을 덮으라며 챙겨 주기까지 했다. 비록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조금 서먹서먹하긴 했지만 잘 대해 주려는 마음만은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바키 할아버지의 가족 사진

아침 식사

할아버지와 함께 한 아침 식사. 요거트, 난, 차이

 다음 날 아침, 이것 저것 대접 받은 것들이 고마워서 떠나기 전에 가족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러자 온 가족들이 들떠서 사진 찍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통에 서먹할 틈도 없다. 아이들은 어른들 손에 이끌려 열심히 꽃 단장을 하고 딸들도 예쁜 옷을 챙겨 입느라 바빴다. 러닝 차림으로 아침을 함께 했던 바키 할아버지도 어느새 말끔히 차려 입었다. 게다가 가족들뿐만이 아니었다. 밖에 나가니 할아버지의 동네 친구들 몇 분까지 사진을 찍기 위해 와 있었다.

가족 사진

할아버지네 가족과 동네 아저씨들까지 다 같이 모였다

가족 사진

할아버지와 친구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함께

 모든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사진을 찍으려 하니 프레임 안에 꽉 차는 것이 정말 대가족이다. 그것도 아들들은 다 나온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가족들끼리 한 컷, 할아버지와 동네 아저씨들과 또 한 컷, 또 아이들과 할아버지들만 한 컷. 가족들 독사진도 찍어 주었다. 모두들 너무 즐거워하면서 사진을 찍으니 받은 만큼은 못해도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딸

인자한 표정의 할머니와 딸

할머니

조금 닮은 것 같다

손녀 딸

부끄러워 하면서도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귀여운 손녀딸

쿠르드족 양치기 청년 케난

 바키 할아버지네 집을 떠나 또 열심히 달렸지만 오늘도 목적지는 멀어만 보인다. 오후 5시가 다 되었는데 아직까지 목적지까지는 20km 정도가 남은 상황이었다. 어제의 성공에 고무되어 있던 우리는 또 민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주변을 둘러 보니 저 멀리 들판에 양떼를 몰고 가는 청년이 보인다. 좋아. '헤이~. 여기~. 우리 하루만 재워줄 수 있겠니?'

케난

케난. 내 자전거 헬멧을 쓰고 기념 사진을 찍고 싶어해서 사진을 찍어 줬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친구가 바로 양치기 청년인 케난이었다. 재워 달라는 우리의 말에 별 고민도 없이 선뜻 승낙한다. 케난이 사는 곳은 터키 동남부의 작은 마을 '오메로와'라는 곳이었다. 딱 보기에도 도시 문명과는 거리가 먼 시골 국도변의 작은 마을이었다. 우리가 케난을 따라 자전거를 끌고 그의 집으로 가는 동안 동네 꼬마 녀석들이 신기한 구경 거리가 생겼다는 듯 우리를 졸졸 따라 왔다. 녀석들 눈에는 커다란 자전거와 짐 꾸러미를 끌고 들어오는 외국인 녀석들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케난과 마을 어른들의 호통 몇 번에 쫓겨 나긴 했지만 그 동안에도 우리로부터 호기심 어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오는 외국인이 아닐까 싶었다.

동네 청년들

우리를 보기 위해 모인 동네 청년들과 함께. 마침 정전이 되어 가스등을 켜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궁금했던 건 동네 꼬마 녀석들만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케난의 집에는 온 동네 청년들이 우리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 들었다. 완전히 동네 사랑방이 된 것이다. 다 같이 모여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들이 쿠르드족임을 알았다. 알고 보니 이 마을은 쿠르드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케난네 집은 케난과 누나, 남동생 그리고 어머니가 한 집에 살고 있었다. 케난의 어머니와 누나는 낯선 이방인들이 불쑥 찾아 갔는데도 거리끼지 않고 우리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케난네 집은 한눈에 보기에도 어려운 살림이었는데 우리 때문에 모여든 동네 청년들에게까지 식사 대접을 하느라 오히려 우리가 미안해졌다. 하지만 또 힘들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우리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려는 케난과 식구들의 마음은 정말 너무 고마웠다.

오메로와 마을의 동네 사진사

 다음 날 아침에도 우리는 여전히 마을의 최대 관심거리였는데, 난 아침 일찍부터 마을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준다는 명목하에 끌려 다니며 온 동네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 집에 들어 가서 가족 사진을 찍어 주고, 또 저 집으로 옮겨서 가족 사진을 찍어 주었다. 집 공사를 하고 있던 마을 이맘 부부의 사진도 찍어 주고, 포경 수술을 하고 침대에 누워 있던 꼬맹이 녀석들의 기념 사진까지 난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그날 아침 난 완전히 오메로와 마을의 동네 사진사였다.

동네의 이맘 부부

마을의 이맘 부부

그네

그네를 타던 아버지와 딸

엄마와 딸

엄마와 딸. 정말 많이 닮았다

포경 수술

포경 수술을 하고 침대에 누워 있던 두꼬마 녀석. 녀석들은 꼼짝도 않고 가만히 누워 앞에 있는 TV만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곳을 여행해 봤지만 이 곳 사람들처럼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처음이었다. 동부의 쿠르드족들뿐만 아니라 터키 전역에서 그랬다. 길 옆에서 땅을 파고 있던 공사장 인부도 사진을 찍어 달라 조르고, 가게에서 옷을 팔고 있던 점원도 갑자기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터키 사람들의 특성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사람들이 렌즈를 의식하지 않아 수월한 면도 있었고, 또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담을 수 있어 좋았다.

트럭 만물상

마을에는 만물상 트럭이 가끔씩 들어 왔다

아이들

트럭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동네 아이들

쿠르드족과 PKK

 얼마 전 터키 정부가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을 토벌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쿠르드족 문제가 또 한동안 이슈로 떠올랐었다. 흔히 쿠르드족 문제 하면 제일 먼저 사람들의 뇌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PKK(쿠르드 노동자당)이다.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는 단체로서 특히 터키 동부 지역에서  터키군에 대항해 오랜 투쟁을 벌여 오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난 바키 할아버지와 케난네 가족은 언론에서 보여 주는 쿠르드족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만난 것은 그저 우리와 똑같이 정 많고, 친절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방송에서 보여 주는 총을 들고 투쟁을 외치는 쿠르드족의 모습은 이들의 일부일 뿐 결코 전부가 될 순 없는 것이다.

 물론 바키 할아버지와 케난 모두 스스로 터키 사람이라 말하면서도 또 쿠르드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단지 그들은 피를 보는 투쟁보다는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들에게서, 또 그들이 모여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언론에 나오는 쿠르드족의 모습을 찾는 건 친절한 쿠르드족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바키 할아버지, 그리고 케난. 비록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서 많은 얘기 나누지 못했지만 잘 해주고 싶어하는 두 사람의 마음만은 정말 잘 받았어요. 오랜 여행에 지쳐 있던 내게 두 사람의 호의는 정말 큰 힘이 되었답니다. 내가 언젠가 꼭 다시 찾아 갈께요. 그때까지 두 사람 모두 건강해요.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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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강도였던 거야?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이란에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신용 카드나 현금 카드 등을 사용할 수가 없고 오직 현금만을 환전해 쓸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란 입국 전에 미리 한 사람에 몇 백 달러씩을 준비했다. 예상대로라면 넉넉히 이란을 빠져 나갈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체류 기간이 계획보다 길어지고, 지방 숙소들의 물가가 생각보다 비싸면서 문제가 생겼다.

 당장 하루치의 숙소비를 쓰고 나니 물 한 통 사 마실 돈마저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하루하고 반나절은 더 걸려야 테헤란에 들어 가는데 이대로는 잠자리는커녕 밥조차 굶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테헤란까지만 들어 가면 알고 지내는 교민분이 계셔서 그 분을 통해 한국에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내일 아침 도시를 빠져 나간 후에 테헤란까지 히치를 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아침 40km 정도를 달려 도시의 외곽으로 빠져 나와 히치를 시도했다. 몇 대의 차가 그냥 지나간 후에 화물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우리는 잽싸게 기사에게 달려가 테헤란, 테헤란을 외치며 자전거와 짐을 가리켰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는 우리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 저 앞에 가면 경찰서가 있다고만 계속 이야기했다. 아마 우릴 태워 주는 게 문제가 되진 않을지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우린 여권에 있는 이란 비자를 확인 시켜 주면서 "아저씨, 폴리스 노 프라블럼. 비자, 비자."라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계속 고민하던 아저씨는 마침내 우리 보고 짐을 싣고 차에 올라 타란다. 아저씨 맘이 변하기 전에 빨리 타야지 하고 잽싸게 짐을 실은 후 조수석에 앉았다. 차가 출발한 후, 기사 아저씨가 조수석 앞에 있던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자신의 목에 들이 대는 시늉을 하면서 뭐라, 뭐라 얘기하더니 칼을 자기 쪽으로 치운다.

 "와, 참 친절한 아저씨네. 아무 차나 얻어 탔다간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얘기구나."

 신경 써 주는 아저씨가 고마웠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달렸을까, 차가 도로 옆에 있는 경찰서 앞에 멈춰 섰다. 우리는 비자도 여권도 문제가 없었기에 별 문제가 없겠지 생각하고 마음 편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가 경찰과 얘기를 좀 나누더니 우리 보고 내리란다. 경찰들은 이미 화물칸에서 우리 짐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뭐야, 무슨 문제지?" 라고 생각하며 경찰과 얘기를 나눠 보려고 해도 도대체 말이 통하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짐을 다 내린 채 경찰들에게 붙들려 있고 트럭은 다시 출발했다. 하지만 경찰들하고 계속 얘기해도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아, 테헤란의 교민 분께 전화를 해 통역을 부탁했다. 그 내막을 알고 보니 사실은 경찰들이 우리를 붙든 게 아니었다. 우릴 태워 줬던 트럭 운전수가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불안해서 계속 태워줄 수 없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아까 운전수 아저씨가 목에 칼을 들이 대면서 했던 얘기는 결국 본인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이었다. 우리가 강도 짓을 할 지도 모른다고. 거 참, 고마운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보고 강도라고 한 것이었다니.  참 씁쓸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기분이 묘했다. 내 평생 어디 가서 또 강도 취급을 당해 보겠나......

테헤란의 사히드 형

 곡절 끝에 테헤란에 도착했다. 테헤란에는 나와 같이 다니는 일행이 한국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이란인 친구 사히드 형이 있었다. 사히드 형이 한국에 일을 하러 왔을 때 알게 된 친구였는데 우린 형의 초대로 그 집에 가서 하루를 머무르게 되었다. 테헤란에서도 유명한 부촌에 위치한 형의 집은 3층짜리 건물에 수영장까지 딸려 있는 집이었다. 형의 말에 따르면 동네에서는 제일 작은 집이었는데, 그 동네에는 대문부터 으리으리한 궁궐 같이 생긴 유명한 이란 축구 선수의 집도 있었다.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는 선수였다.

사히드 형.

사히드 형네 집에서. 사히드 형과 나와 군 입대를 기다리고 있는 사촌 동생

  우리 나라처럼 이란도 대가족 문화가 익숙한지 사히드 형 집은 형과 큰 형 내외가 함께 살고 있었고, 사촌이니 조카니 외삼촌이니 하는 사람들이 늘 들락날락 해서 집안이 북적북적했다. 우리가 머무를 때만이 아니라 항상 가족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는 것 같았다. 이쪽은 조카, 이쪽은 사촌, 또 저쪽은 마도로스인 외삼촌 등등. 여기 저기 인사하면서 조금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또 함께 둘러 앉아 게임도 하고 차도 마시면서 조금씩 친해졌다.

사히드

사히드 형의 큰 형인 알리 형의 딸. 정말 너무 귀여웠다

  마침 우리가 사히드 형 집에 머무를 때 마침 한국과 이란의 축구 국가 대표 경기 시합이 있었다. 다들 즐겁게 보자는 생각으로 TV 앞에 모여 앉았는데 왠지 모를 그 긴장감이란 어쩔 수 없었다. 서로 자기편 플레이에 크게 내색하지 못하고, 어색한 분위기. 다행히도 경기는 막판에 한국이 골을 넣으면서 무승부로 끝났다. 경기가 무사히 끝나고 나자 모두 괜스레 멋쩍어진 우리는 서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칸도반, 이란의 카파도키아

 타브리즈에서의 출발을 하루 미루고, 칸도반에 다녀 왔다. 이란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칸도반은 그 독특한 지형으로 이란의 카파도키아 - 터키 중부 지역. 각종 기암 괴석들이 자리한 독특한 지형으로, 특히 스타워즈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 라고 불리는 곳이다.

칸도반

칸도반 전경

칸도반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생겼다

  동화 속에서 나올 법한 동굴 집들. 멀리서 보면 마치 개미굴 같아 보이기도 한다는 이 곳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직도 동굴 집에서 실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높다란 돌 벽에 문과 창을 내고, 집 밖으로는 각종 전기줄과 전선이 널려 있다. 관광객들을 모아 집 안내를 하던 한 주민은 이 곳의 집들은 천연 냉난방이 잘 되어 여름에는 더 시원하고, 겨울에는 포근하다고 했다.

칸도반 풍경칸도반 풍경
칸도반 풍경

칸도반 골목골목

칸도반 풍경

빨래가 널려 있는 풍경

  외국인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이란 내국인들에게도 명소인 이 곳은 비수기임에도 제법 많은 여행객들이 보였다. 몇몇 주민들은 관광객들에게 집 내부를 구경 시켜 주고 돈을 받고 또 차나 숙소를 제공하면서 생계를 벌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주민들은 이 관광객 무리가 여간 귀찮은 모양이었다. 특히나 외국인 관광객들은 아무데나 와서 카메라를 들이대려 하고, 자꾸 기웃기웃하고 다니니까 신경이 쓰이는 건가 보다.

동굴 집 내부

동굴 집 내부

동굴 집 내부

카페트가 깔려 있는 건 다른 집들과 똑같다

소쿠리

소쿠리가 걸린 풍경은 우리네 시골과 비슷하다

당나귀

경사가 심한 칸도반에서 나귀는 중요한 운송 수단이다

  이 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른 또 하나는 바로 여인들의 차도르 복장이었다. 이란의 다른 지역에서는 검은 색의 차도르를 제외하고는 다른 색을 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칸도반에서는 노인이건 젊은 여인이건 할 것 없이 모두 다양한 무늬가 있는 비교적 화려한 차도르를 둘렀다.

차도르

여인의 화사한 차도르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칸도반은 타브리즈에서 하루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내면서 그 곳의 정취를 느껴 보고 싶은 사람들은 방을 빌릴 수 있는 곳이 몇 곳 있으니 원한다면 며칠을 묵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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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에 당하다

 케르만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가 다 되어서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를 더 머물며 근처를 둘러 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호텔 로비에서 지역 정보를 뒤지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이란인이 혹시 관광할 생각이면 자신이 일일 가이드를 해주겠다며 다가 왔다. 알고 보니 외국인들의 일일 가이드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곳, 저곳을 추천하며 정보를 주는 그 가이드에게 난 중요한 걸 물었다.

 "아저씨 차에 에어컨 있어요?"
 "에어컨? 내 차 벤츠야, 메르세데스-벤츠. 밖에 저 차 보이지?"

 어두워서 명확하진 않지만 차 앞에 희미하게 벤츠의 표식이 보인다.

 "오케이, 그럼 좋아요. 내일 몇 시에 볼까요?

 가이드 비용을 정하고, 내일 둘러볼 곳들에 대해서 더 얘기를 나눈 후에 방으로 돌아 갔다.
 
 다음 날 아침. 가이드 아저씨는 일찍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카메라와 간단한 짐을 챙겨 들고 아저씨를 따라 나섰다. 드디어 가이드 아저씨의 차. 참 낡았지만 벤츠는 벤츠다. 아저씨 말로는 70년대 산이란다.

 그런데...차에 에어컨이 없다.

 "아저씨, 왜 에어컨이 없어요?"
 "응? 내가 어제 내 차 벤츠라 그랬잖아. 트렁크의 아이스 박스에 시원한 물 준비해 왔어. 여기 물도 두 통 얼려 왔고."

 그렇다. 어제 가이드 아저씨는 분명히 에어컨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벤츠라 했을 뿐...... 당했다. 설마 에어컨이 없는 벤츠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사막의 지하 수로

 아저씨한테 당했다는게 조금은 억울했지만 별 수 없었다. 사실 아저씨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니까. - 쳇, 그래도 대체 에어컨 없는 벤츠는 뭐냐구.;; - 기왕 가이드를 받기로 한 거 구경이나 잘 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이드 아저씨가 추천했던 케르만의 조로아스터교 돔과 마한의 정원 등은 이런 작은 도시들에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던 아름다운 곳들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감동했던 건 바로 사막의 지하 수로였다. 샤흐다드 사막의 기암 괴석을 보러 가기 위해 사막 입구의 검문소에서 신고를 하고 난 후였다. - 아무래도 사막 지대를 통과하는 길이다 보니 실종 되면 자료로 쓰기 위한 것 같았다. - 검문소를 통과해 한참을 달리던 아저씨가 갑자기 폐허 몇 채 밖에 보이지 않는 벌판에 차를 세웠다.

 "아저씨, 여기는 갑자기 왜 서요?"
 "일단 따라와 봐. 좋은 것 보여 줄께."

 가이드 아저씨를 따라 가니 아무 것도 없는 맨 땅에 갑자기 지하로 들어 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 정체는 바로 사막의 지하 수로로 통하는 길이었다. 가이드 아저씨 말에 따르면 자기 같이 나이 든 사람들 말고는 잘 알지 못하는 장소라고 했다. 300년 이상이 되었다는 지하 수로는 저 멀리의 도시까지 흘러 들어 갔다. 설명을 들으면서 수로를 바라 보고 있자니 내가 지금 위대한 것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막에 생명을 태동하게 한 힘이 바로 이 수로였다. 우리가 보고 있는 도시의 삶과 생명이 사막의 작은 지하 수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샤흐다드 근교에는 아직까지도 이 수로를 중심으로 물을 얻고 살아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몇 백년을 흘러 온 수로는 앞으로도 또 몇 백년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생명을 잉태하며 살아갈 터였다.

 우연히 보게 된 지하 수로는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제일 보고 싶어했던 사막의 기암 괴석보다도 더.

 좋아, 아저씨. 이걸로 에어콘 건은 잊어 준다. 멋진 가이드였어~

입구.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 멀리서 보면 그냥 평평한 땅처럼 보였다.

수로

이 수로를 따라 도시까지 물이 흘러 간다

수로

몇 백년을 흘러 왔다는 이 물줄기는 앞으로 또 얼마의 시간을 흐르게 될까

구멍

땅 위에 난 구멍에서 새어 들어 오는 빛이 지하의 물길을 밝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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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7.11.03 11:1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와... 멋지네요... 이야기도 재미있고.. 좋은 블로거님을 한분 또 발견한 듯 합니다.. ^^
    자주 들리겠습니다... ^^

  2. Favicon of http://gletter.net BlogIcon Gletter 2007.11.26 09:2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사진들이 예술입니다. 여행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다 보진 못했지만, 글도 너무 좋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이란 여행 TIP : ITTIC - Iran Touring & Tourism Inns Corporation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전 날 밤 늦게까지 계속된 결혼식의 여파로 결국 우리는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야즈드를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세는 다음 날까지 이어져 다음 목적지였던 나인엔 예상보다 하루가 더 걸려서 도착했다. 나인에서의 숙소는 또 ITTIC INN(http://www.ittic.com : 홈페이지의 Distribution map 메뉴에서 ITTIC가 위치한 도시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란의 지방 여행 중에 우리에게 유일하게 힘이 되어 주는 곳이 바로 이 ITTIC였다. 다른 숙소가 하나도 없는 중소 규모의 도시라도 ITTIC 호텔만은 있는 경우가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균 미화 30 달러에 달하는 숙박비가 아깝지 않게 어느 도시의 지점을 가더라도 늘 일정 수준 이상의 숙소 시설은 보장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나인의 ITTIC는 특급에 가까웠다. 방 한채가 2층의 침실과 1층의 거실로 따로 나누어진 구조여서 넓기도 했고, 마당에는 작은 분수대를 주변으로 물담배를 피며 쉴 수 있는 평상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가격도 다른 도시의 지점들과 비교해 1~2 달러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ITTIC

2층의 침실

ITTIC

침실에서 바라 본 거실

  물론 이란에서 하룻밤에 미화 30달러의 숙박비라면 꽤 비싼 축에 속한다. 하지만 테헤란, 이스파한, 야즈드 등의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여행객을 위한 숙박 시설이 미비하기 때문에 ITTIC는 이란의 지방 도시들을 여행하는 경우에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나인의 ITTIC가 더 좋았던 이유는 바로 야즈드에서 함께 있던 파울로 아저씨와 레자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주일 간 야즈드에 머물면서 알게 된 파울로 아저씨는 아마추어 사진가이자 이란 여행만 이미 네 번째라는 지이파였다. 거기에 이탈리아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는 이란인 축구광 레자가 가이드로 동행해서 함께 다니고 있었다. 함께 결혼식도 가고 호텔에서 얘기도 많이 하고 지냈던 터라 헤어질 때 조금 섭섭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반가웠다.

파울로 아저씨

파울로 아저씨, 레자와 다시 만났다. "아저씨,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렸어요?" "응? 우린 택시 타고 두 시간." "...전 이틀 걸렸어요."

고대 페르시아의 유적, 이스파한 - 이맘 호메이니 광장

광장 전경

알리 카푸 궁전에서 바라 본 이맘 호메이니 광장의 전경

  페르시아는 아직까지도 그 이름에서 영광과 번영이 느껴지는 고대 제국이다. 이란의 중심부에 있는 이스파한은 고대 페르시아의 옛 수도로서 "이스파한을 보는 것이 세상의 절반을 보는 것이다"라는 고대의 속담을 탄생시킨 바로 그 도시이다. 그리고 이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유적들과 건축물들은 이스파한을 이란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맘 모스크

햇살을 받고 있는 이맘 모스크의 돔

  그 중에서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이맘 호메이니 광장은 이스파한을 대표하는 명소 중 한 곳이다. 현재의 광장은 옛 궁전과 모스크가 에워싸고 있고 그 뒤쪽으로는 이스파한에서 가장 큰 시장인 카이셰리에 바자가 있다. 광장의 남쪽에 맣닺아 있는 이맘 모스크는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는 모스크의 돔과 타일 장식으로 보는 이들을 매혹 시키기에 충분하다. - 내가 갔을 때는 아쉽게도 내부 곳곳에서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모스크 전체를 한 눈에 감상할 수는 없었다. - 광장 왼편의 알리 카푸 궁전은 내부의 목조 자재들이 많이 낡아 명목만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목조 벽에 남아 있는 옛 여인의 그림과 여러 기하학적 문양들은 이곳의 옛 아름다움을 짐작케 한다. 알리 카푸 궁전의 테라스에서는 광장의 전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는 이곳이 규모만으로 유명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알리 카푸

알리 카푸 궁전의 기하학적 문양들

알리 카푸

오랜 세월로 인해 색이 바랬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여인의 그림

  이맘 모스크의 맞은 편, 광장 뒤쪽으로 길게 늘어선 카이셰리에 바자에는 늦은 시간까지도 물건을 사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다양한 물건들로 가득한 시장에서도 특히 눈에 제일 많이 띄는 것은 바로 물담배 기구와 낙타뼈 장식품들이었다. 차이와 물 담배는 이란 사람들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인데 이곳에서 제일 성업 중인 곳도 바로 물담배를 파는 가게였다. 이란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야외로 놀러갈 때도 꼭 물담배 기구와 담배를 태울 불씨를 챙기는 것은 잊지 않는다. 정밀한 수공예 장식품인 낙타뼈 장식품들은 낙타뼈로 작은 상자를 만든 후에 그 위에 정교하게 그림들을 채색했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 작은 상자에 저런 그림을 그려 넣었을까 궁금해지는데, 그림의 정밀한 정도와 크기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라 비싼 건 우리 돈으로 십 만원이 넘기도 한다.

카이세리예

카이세리예 바자.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로 북적댄다

낙타뼈

이란의 특산품

낙타뼈

낙타뼈 상자들

  이맘 광장이 이곳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장소라는 것은 이곳이 늘 사람들로 북적댄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일반적인 활동 시간인 낮부터 밤뿐만 아니라 하루가 시작하는 새벽부터 사람들로 차기 시작하는데 새벽에는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광장을 메웠다. 그러니 광장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면 새벽과 낮, 그리고 밤 모두 광장에 가 볼 것을 권한다.

물담배 가게

시장 한 켠의 물담배 가게. 차이와 물담배는 이란 사람들에게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시오세 폴과 카쥬 브리지

 이스파한에서 이맘 광장과 함께 가 보아야 할 곳은 시오세 폴과 카쥬 브리지이다. 생명을 주는 강이라는 의미의 자옌데 강을 가로 지르는 두 다리는 모두 페르시아 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자태뿐만 아니라 이 곳 사람들의 휴식처로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33을 의미하는 시오세의 말 뜻처럼 33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시오세 폴 다리는 복층 구조로 2층은 사람들의 통행로로 쓰이고 1층은 수로로 쓰였다. 이 다리 밑에는 이 곳 사람들의 명소인 물담배 가게가 있는데 늘 사람들로 북적거려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고 앉으면 시원하게 흘러가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사과 향 물담배를 태우고, 설탕을 듬뿍 넣은 차이를 마시는 그 기분은 일품이다.

시오세 폴

시오세 폴의 야경. 다리 밑의 가게는 늘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시오세 폴에서 강변을 따라 걸어 내려가다 보면 카쥬 브리지를 만날 수 있다. 카쥬 브리지는 화려한 시오세 폴에 비한다면 조금은 투박한 느낌이 들지만 또 그 남성적인 투박함이 매력적인 다리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단지 강의 수량 조절을 위한 댐 기능을 위해 건설된 다리이지만 지금은 댐의 기능은 수행하지 않고 단지 보행자들의 다리 역할만 하고 있다. 시오세 폴과 카쥬 브리지는 모두 사람만 건널 수 있는 다리이기 때문에 차한테 방해 받지 않고 조용히 강을 감상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자옌데 강

카쥬 브리지에 바라 본 자옌데 강. 하늘엔 초승달이 떠 있다

이스파한 Tip : 시오세 폴의 불량배들을 조심하라

 시오세 폴은 동네 불량배들이 몰려 드는 장소이기도 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상대방이 단순한 호의나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비를 걸려는 목적인지는 자연스레 파악이 된다. 그런데 시오세 폴에 몰려 드는 불량배들은 태반이 후자의 목적을 띈 녀석들이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신체적인 해꼬지를 한다던가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런 녀석들과 사소한 시비가 붙었다는 여행객들을 만나는 건 이스파한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아시아 계통 여행객들이 그런 경우를 많이 당했는데 구별이 더 쉬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만났던 한 여행객은 시오세 폴 밑을 거닐다가 다리 위에 있던 녀석들이 던진 침 뭍은 담배 꽁초를 몸에 맞기도 했었다. 녀석들은 아주 공공연히 여행객들, 그 중에서도 눈에 잘 띄는 사람들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시오세 폴의 불량배 녀석들 얘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이란의 외국인에 대한 배타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번은 테헤란의 관광지에 갔을 때였다.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우리 일행에게 갑자기 작은 돌 하나가 날아 왔다. 범인은 멀찌감치 서 있던 한 무리의 학생들. 누가 던졌다는 걸 우리도 뻔히 알지만 상대방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잡아 떼는데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등을 돌리면 곧 다시 작은 돌들이 날아 왔다. 물론 가장 잘(??) 대처하는 방법은 그냥 무시하고 자리를 피하는 것 뿐이었다. 당시 같이 계셨던 교민분은 예전엔 이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 분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불량배들이 많이 돌아 다니는 까닭은 이란의 높은 실업률과도 무관치 않았다. 사람들이 할 일이 없다 보니 빈둥 거리면서 돌아 다니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경제 제재 이후 이란 경제는 거의 무너져 버렸다. 게다가 산유국이라지만 정제 시설이 부족해 국내에서 필요한 휘발유의 40% 이상을 수입해다 쓰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얼마 전에는 이란 정부에서 한 사람의 석유 배당량을 정하고 값을 올리겠다고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악순환은 국제 사회의 제재가 풀리지 않는 이상 해결 되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란 대통령은 핵 문제로 국제 사회에서 계속 마찰을 빚고 있고, 그래서 갈등의 실마리는 현재로선 요원한 실정이다.

 때로 나이 든 이란 사람들 중에는 예전에 자신들이 혁명을 지지했던 것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단다. 종교 혁명을 통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호메이니의 종교 혁명 이전엔 비록 정신적으로 조금 부족했을지 몰라도 경제,사회적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자메 모스크

자메 모스크 앞에서 만난 아저씨. 무슨 좋은 말을 해 주는 것인지 부인들이 몰려 들어 질문을 해댔다

기도

이슬람의 기도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아무 곳에나 자리를 펴고 기도를 시작한다. 때로는 이렇게 차도르를 뒤집어 쓴 부인이 기도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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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혜연 2011.06.05 15:1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란은 여자들이 검정색차도르나 히잡을 두르는것 말고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예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수단 챠드 니제르 말리등의 이슬람권여성들과 비교하면 그래도 외출이 자유로운 나라니 대단한거죠!

이란에 들어 오다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넉 달 만에 드디어 이란에 들어 왔다. 사실 처음에 이란에 들어 오기 전에는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었다. 내가 언론에서 보아온 건 강경 반미 시위대가 늘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뿐이었으니까 이란이라는 나라는 그저 '과격한 반미주의자 무슬림'들의 나라 정도로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독실한 이슬람 국가이니 어디 함부로 카메라를 놀렸다가는 손목이라도 잘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걱정은 이란에 들어온 후 친절한 사람들과 잘 정돈된 깨끗한 거리를 마주하면서 차츰 사라져 갔다. 또 개혁과 보수가 공존하는 이란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이곳 역시 그저 우리랑 똑같은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여권이 강력한 곳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듯이 거리 곳곳에 차도르를 쓴 여성들이 활보하고 있었고 운전을 하고 있는 여성들까지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옆의 파키스탄만 해도 운전을 하는 여성은 매우 드문드문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니까 비교가 되는 모습이었다.

 사실 내가 이란에 들어 와서 무엇보다도 제일 놀랐던 건 바로 코카 콜라와 펩시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란에서 미국 제품을, 그것도 미국 문화의 상징적 아이콘이랄 수 있는 콜라를 본다는 건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아주 버젓이, 곳곳에서 팔리고 있었다.

석양

이슬람의 상징과도 같은 모스크 저 멀리 뒤편으로 해가 지고 있다.

이란에서의 라이딩

낙타 조심

제주도에서는 노루 조심, 중국에서는 야크 조심, 그리고 이란에서는 낙타를 조심해야 한다.

 이란에 들어온 지 열흘 정도가 지나 야즈드에 도착했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야즈드에서 30km 정도 전인 메리즈에서 하루를 묵고 올 예정이었으나, 숙소가 없어서 결국은 야즈드까지 들어 왔다. 이란은 길이 잘 닦여 있는 건 좋았지만 웬만한 규모의 도시가 아니면 숙소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 하루 이동 구간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몇 십 km를 달려야 물이라도 사 마실 수 있는 가게가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실정이어서 라이딩 하면서 쉴 곳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파키스탄에서는 가까운 거리에 하나씩 주유소가 있었고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는 건 기본이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이란은 주유소가 별 장사가 안 되는 품목이라 그런지 아주 띄엄띄엄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오직 주유소만 있는 경우가 많아서 뭘 사 먹을 곳도 없었다. 하기는 기름 1리터에 우리 돈 80원 정도 밖에 안 하니 그다지 남는 장사는 아니겠다.

올드 시티를 거닐다

카펫

이란산 카펫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야즈드의 실크로드 호텔 벽에 걸려 있던 카펫. 무희? 여신? 왠지 모를 처연함이 느껴지던 그림.

 질 좋은 비단의 생산지로도 알려져 있는 야즈드에서 내가 제일 끌렸던 것은 오래된 흙벽으로 미로처럼 이루어진 야즈드의 구시가(올드 시티)였다. 한 낮의 강렬한 태양을 피해 미로 같은 그 길을 거닐다 보면 어느새 탁 트인 정원이 나오기도 하고 다시 미로를 헤매이다가 보면 이름 모를 모스크 앞에 이르기도 했다. 양 옆으로 높이 쌓인 흙벽을 따라 좁은 골목길을 혼자 거닐다 보면 때론 이 곳에 나만 홀로 존재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문득 이러다가 이곳에서 영영 헤매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 때쯤이면 넓은 곳을 찾아 나갔다. 그런 후에 자메 모스크의 첨탑을 찾으면 됐는데 어디서나 보이는 높은 미나렛이 이 구시가 방랑자들의 등대 역할을 해 주었다.

올드 시티올드 시티

고요함 속에서 골목의 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태양이 남긴 자국을 따라 구시가를 걷는 일은 야즈드에서 할 수 있는 제일 매력적인 일 중 하나임에 틀림 없다.

올드 시티
전경

해 질 무렵의 야즈드 전경.

 야즈드는 구시가 말고도 많은 역사 유적들과 문화재가 남아 있는데 12C에 지어진 자메 모스크와 함께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본산으로서 5C부터 계속 불꽃을 지켜 오고 있다는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사원과 시 외곽의 침묵의 탑이 유명하다. 그리고 한 여름의 태양이 강렬한 야즈드의 기후적 특성에 맞춰 예전부터 바람탑이라는 독특한 건축 양식이 발달했는데 이는 더운 날에 건물 내부를 시원하고 해주고 자연 통풍이 이루어지게 한 구조물로서 구시가를 걷다 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야경

자메 모스크의 야경.

이란의 결혼식 풍경

 야즈드에 머물던 마지막 날 밤, 내가 머물고 있던 실크로드 호텔의 외국인 손님들 모두가 한 동네 사람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다. 원래 신랑이 호텔 직원들과 친분이 있었는데 호텔 직원들을 초대하면서 손님들도 함께 초대한 것이다. 기쁜 일이니 함께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외국인 손님들을 결혼식에 초대함으로써 은근히 자신의 세를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뭐, 아무려면 어떠랴. 결혼식 초대를 받은 것에 조금 들뜬 우리들은 카메라를 챙기고, 나름 옷을 챙겨 입고 하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밤 9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호텔 직원들과 우리를 데려갈 미니 버스 한 대가 왔고 족히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일행들은 앉을 자리가 부족해 통로까지 가득 메운 후에야 식장으로 출발했다. 버스 안은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크로아티아, 캐나다, 네덜란드, 그리고 대한민국까지 국적은 다양했지만 모두 즐거운 파티에 간다는 마음으로 들떠 시끌벅적했다.

결혼식장

남자 하객들의 결혼식장. 모두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드디어 밤 10시 식장에 도착.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를 약간 기운 빠지게 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남자 손님들과 여자 손님들이 서로 다른 식장으로 안내된 것이었다. 우린 결혼식장에 가면 이란의 아가씨들도 만나볼 수 있겠구나 했었는데 너무 기쁜(??) 마음에 이곳이 특별한 남녀 유별 국가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손님들과 분리된 남자 손님들의 식장으로 안내된 우리들은 한 줄로 서서 신랑과 볼 키스 인사를 주고 받고 식장으로 들어섰다.

우리들

그 넓은 식장에서 샌달에 면바지, 티셔츠를 걸친 사람들은 우리들뿐이었다.;;;

  사실 식장이라기보다는 넓은 식당 같은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그 후 새벽부터 다시 파티를 벌인다고 했다. 하객들이 모두 신랑과 일일이 인사를 마치고 첫 식사가 나온 시각은 밤 열 한시. 결혼식에 온다고 저녁을 안 먹은 일행들이 태반이었던 우리는 허겁지겁 식사를 시작했다. 이미 이때는 기다리는데 모두 지쳐 있어서 기운들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 신부 얼굴도 보지 못했다. 도대체 신부는 언제 볼 수 있는 거냐고......

파티장 이동

파티장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시끌벅적.

 식사를 마치고 식장을 나온 시간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 있던 우리는 이제 곧 가든 파티장으로 이동한다는 말에 모두들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가든 파티에서는 남녀 하객들이 함께 어울려 논다고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좀 이란의 젊은 아가씨들을 볼 수 있겠구나 했던 것이다. 다시 미니 버스를 타고 파티장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한시. 우리가 도착한 때는 곧 신랑, 신부 입장이 시작할 찰나였다.

 왠 향을 피운 할머니가 들어 오시자 신랑과 신부가 그 가루를 조금씩 집어서 서로의 머리 위에 조금씩 뿌려주는 것으로 입장이 시작 되었다.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라는 그 향 의식은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되는 것이었는데 할머니는 무대 중앙의 신랑, 신부 옆 쪽에 쭈그리고 앉아 계속 향을 피우고 있었다.

신랑, 신부

신랑, 신부의 모습

향 할머니

계속 향을 피우던 할머니. 무섭게 생겼다.

 난 가든 파티라기에 넓은 정원에 삼삼오오 모여 잔을 부딪히면서 이야기를 하는 풍경을 상상했는데 실은 잘 정렬된 의자에 하객들이 앉고 중앙의 무대에서 사람들이 밴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며 즐기는 것이었다. 신랑과 신랑 친구들이 함께 춤을 추고 또 결혼식이라고 한껏 차려 입은 꼬마 손님들도 무대 한 구석을 차지하고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젊은 여자 손님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 건 볼 수 없었는데 딱 한 명 아가씨가 나와서 춤을 추다가 무슨 제지가 있었던 것인지 곧 자리로 돌아갔다.

 이러한 춤사위는 새벽 세시가 넘어서도록 계속 되었고 다음 날 체크 아웃을 해야 할 일행들이 대부분이었던 우리는 다시 호텔로 돌아 왔다. 파티는 우리가 식장을 떠날 때까지도 계속되었는데 호텔 직원의 말에 따르면 보통은 밤새 파티가 계속된다고 했다. 조금 피곤해서 마지막까지 파티를 즐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란의 결혼식 문화와 풍경을 접할 수 있었던 건 좋은 경험이었다. (다음에는 아가씨들이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다는 그 여자 식장 안을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호텔의 여자 손님들 말에 의하면 차도르 안에는 입은 옷들은 다른 나라의 젊은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데 우리가 이란에서 그런 걸 볼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모르겠다.)

결혼식장 풍경.

신랑과 친구들이 춤을 추고 있다.

결혼식장 풍경.

한껏 차려 입은 아이들도 신났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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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혜연 2009.06.23 22:1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사우디나 예멘, 오만, 아프간등같은 보수적인나라에서는 아얘 여자들의 모습을 아얘 찍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그런나라에서도 결혼식이나 파티때만큼은 한껏 멋을내며 짙은화장에 화려한드레스를 입고 한답니다! 저기 이란아이들이 춤추는 모습 제가봐도 귀여워요~ *^^*

파괴 되어 가는 유적지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하라파 유적지

파괴 되어 가는 하라파 유적지

 하루를 지내고 출발하기로 했던 사히왈에서 일행의 몸 상태가 좋질 않아 하루를 더 쉬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은 우리가 머물던 인더스 호텔 주인 아저씨와 그 친구와 함께 인더스 문명의 주요 유적지 중 한 곳이라는 인근의 하라파 유적지에 다녀 왔다. 하지만 인더스 문명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유적지는 그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는데 유물을 전시해 놓은 유적지 내의 작은 박물관은 거의 시장판 수준의 전시 상태를 보여 주었고, 유적지 내 한 쪽에는 집이 없는 빈민들이 살면서 그 안에서 구걸을 하고 돌아 다니고 있어서 과연 이 곳이 제대로 보존될 수 있을런지 심히 의심스러운 지경이었다. 또 이미 영국 식민지 시절에 당시 사람들이 집을 짓는 데 사용하기 위해 유적지의 벽돌이나 흙 등을 가져 가면서 많이 파괴가 되었단다. 세계 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꼽히는 인더스 문명을 알기 위한 중요한 자료인데 이런 식으로 파괴가 되고 있다니 안타까웠다. 얼마 전에는 파키스탄 북쪽 탈레반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 무장 세력들이 오래된 석불을 폭파 시키려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기사도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파키스탄의 국력이 문화 유적의 보존과 관련한 문제들을 신경 쓰기에는 많이 부족한가 보다.

도요타

호텔 주인 아저씨의 75년산 도요타 짚차를 타고 유적지에 다녀 왔다. 돌아 오는 길에는 짚차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하는데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총알 목걸이

미안 찬누에 들어 오던 날 길에서 만난 경찰 아저씨. 가지고 있던 진짜 총알로 만든 목걸이를 내가 마음에 들어 하자 선물로 주었다.


미안 찬누의 라시드 아저씨

 사히왈에서 휴식을 취한 후 출발한 오후엔 미안 찬누에 도착했다. 미안 찬누에서는 경찰서의 소개로 샬리마르 호텔에 갔는데, 호텔 겸 식당의 주인인 라시드 아저씨는 자전거 여행을 하는 우리를 무척이나 반겨 주었다. 자기가 랜스 암스트롱과 뚜르 드 프랑스의 열렬한 팬이라면서 자신의 호텔에 오는 자전거 여행자들은 머물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무료로 머물 수 있다고 하셨다. 주인 아저씨는 방뿐만 아니라 식사까지도 무료로 주려 하셨는데 우리가 그것까지는 차마 미안해서 받지를 못했다. 그래도 작은 지방 도시에서 이런 행운을 만나다니 암스트롱한테 조금은 빚을 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주인 아저씨의 환대를 받고 편한 마음으로 쉬고 있던 것도 잠시뿐, 나는 밤새 계속된 설사로 화장실을 들락 날락 거리면서 온 몸의 진이 다 빠져 버렸다. 페샤와르에서부터 계속 되던 설사를 그냥 단순한 물갈이이겠거니 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미안 찬누에서는 물 한 잔만 마셔도 바로 탈이 날 정도로 상태가 악화 되어서 뭐든 먹을 수조차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 지방 도시의 병원이란 것이 너무 열악해서 병원 건물에 들어 서는 순간 내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다시 숙소로 가서 쉬고 싶다는 것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은 커녕 천장에 붙어 있는 몇 대의 선풍기조차 전기가 나가서 작동하질 않았고, 병실이라고 하는 것도 그냥 텅 빈 방에 딱딱한 침대 몇 개 가져다 놓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따로 진찰실이랄 것도 없어서 의사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내게 와서 대강 증상 설명을 듣고 링겔을 처방해 주었는데, 링겔을 맞고 잠이 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라시드 아저씨

미안 찬누 샬리마르 호텔의 라시드 아저씨(왼쪽)와 그 친구분. 내가 아플 때 그토록 많이 챙겨 주었던 아저씨의 친절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몸이 아프면서 주인 아저씨가 더 고마웠던 건 내가 많이 아프니까 친구를 소개해 주어 병원까지 데려다 주고, 또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아저씨는 따로 문병을 와서 상태를 보고 가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이다. 게다가 링겔을 다 맞고 숙소로 돌아 갔을 때 아저씨는 집의 부인에게 부탁해 내가 따로 먹을 닭고기 죽을 만들어서 가져다 주었다. 외딴 타지에서 몸이 아파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지쳐 있던 나에게 아저씨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니 너무나 고마웠다.

삼부 토건의 고선홍 소장님

고선홍 소장님

파키스탄 카네왈 삼부 토건 사무소의 고선홍 소장님.

 두 번째로 만난 고마운 인연은 미안 찬누 근처의 카네왈에서였다. 우리는 내 몸의 상태가 많이 좋질 않아서 미안 찬누에서 물탄으로 가는 차량을 수배하기로 결정을 했다. 처음에는 경찰서에 도움을 청하러 갔으나 그쪽에서는 딱히 시큰둥한 반응 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라시드 아저씨가 근처 카네왈에 한국 건설 회사의 사무소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한국인 직원들도 있고 말이 통하니까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일행을 카네왈의 사무소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렇게 일행이 막 사무소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일을 보기 위해 사무소를 빠져 나가고 있던 고선홍 소장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아마 그때 서로 지나쳤더라면 만나지 못했을테니 그것도 인연인지도 몰랐다. 일행에게 우리의 사정을 들으신 소장님은 흔쾌히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겠다 하시고, 아픈 나를 위해 미안 찬누에서 카네왈의 사무소까지 차로 데려가 주시고 에어컨이 딸린 숙소에 전속 요리사가 만든 한국 음식과 김치까지 대접해 주셨다.

 파키스탄의 사무소에서만 십 년이 훌쩍 넘게 근무 중이신 소장님은 이제 이곳에 완전히 자리를 잡으신 파키스탄 통이었는데 얼마 전에는 한국에 있던 가족들까지 전부 불러 들여 가족들이 모두 같이 살고 있었다. 요리사가 해 준 맛난 한국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신선한 과일까지 얻어 먹어 기운을 차린 우리는 소장님, 사모님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소장님이 네팔에서 근무할 때 만나신 인도인 사모님은 한국에서 오래 사셔서 그런지 말씀하시는 것이 완전 한국 아줌마였는데 소장님의 자녀들 얘기부터 시작해서 살아 오셨던 이야기도 듣고, 또 우리들 여행까지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서로 반가워 많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족

소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아이들. 사무소 마당 한 켠 그네에서.


 나중에 알고 보니 카네왈의 삼부 토건 사무소는 파키스탄을 여행하는 한국 여행자들에게 제법 알려진 모양이었는데 근처를 지나 가던 여행자들이 도움을 받으면서 입 소문이 퍼졌고, 한번은 선교를 왔던 단체 손님들까지 찾아 와서 묵어 가기도 했던 적이 있었단다.

9.11 이후의 부동산 폭등과 파키스탄의 기독교 차별에 관해

 소장님에게 들은 얘기 중에 파키스탄과 관련해 흥미 있던 것은 9.11 이후 파키스탄의 부동산 시장 폭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9.11 이후 미국으로 들어가기 힘들어진 아랍권의 자본이 같은 이슬람권인 파키스탄 등지로 몰려 들면서 테러 이전 한국의 집 한 채 가격이면 너끈히 구할 수 있던 집 값이 폭등해 이제는 서울의 집 한 채로는 라호르의 괜찮은 집은 구경도 못 할 정도로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는데 테러 직전에 파키스탄에 근무하던 한 한국 업체의 파견 직원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당시 서울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라호르에 집을 한 채 구했단다. 집 값의 차익을 노린 것이라기보다는 파키스탄에 아예 터를 잡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9.11이 터지면서 오른 집 값으로 또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었고 덕택에 그는 이제 몇 채의 집을 가진 부호가 되었단다. 그런 것이 사람 운이라는 것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참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소장님이 데리고 계신 파키스탄인 요리사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라호르의 한국 식당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해서 제법 한국 음식 솜씨가 좋은 그는 이슬람권에서는 만나기 힘든 기독교인이었다. 물론 파키스탄에서 공식적으로 종교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진 않지만 기독교인은 아무래도 사회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하는 등의 기본적인 사회 생활에 있어서 차별과 제약이 많이 따른다고 한다. 이 곳 사무소의 요리사도 음식 솜씨도 좋고 사람도 성실했지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직장을 구하지도 못하고 하고 있는 것을 소장님이 사람을 보고 데려와 숙소도 제공하면서 데리고 있는 것이었다.

 혹 이런 사례를 보고 기독교를 홀대하는 이슬람이라고 흥분할 사람들이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례가 비단 이슬람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많은 종교들에서 참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런 점이다.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과 이해의 부족.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의식에서 드러난 문제도 바로 이런 점이었다. 다른 종교를 믿진 않더라도, 배척하지는 않는 정도의 관용만 가져도 지금 여러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적 갈등은 훨씬 줄어 들텐데 지금의 종교인들에겐 그게 너무 없지 않나 싶다.

발루치스탄을 지나다

 카네왈에서 푹 휴식을 취한 후에 사무소의 트럭을 타고 소장님의 소개로 미리 예약해 둔 물탄의 숙소로 왔다. 이제 우리가 지나가야 할 곳은 발루치스탄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제일 걱정이 되던 지역이고 이곳 파키스탄에 들어와서도 제일 많이 조언을 들은 곳이었다. 발루치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이란과 바로 국경을 접하고 있고 정부에 대항하는 종족 갈등으로 많은 폭동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여 치안이 굉장히 불안한 곳이었다. 혹자는 그곳 근처를 지나가는 기차를 타게 되면 잠깐씩 서는 역이라도 절대 내릴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고, 또 퀘타에서 십년 넘게 근무했다던 경찰은 자신도 경찰이지만 그곳만큼 무법 천지인 곳은 처음 봤다며 겁을 잔뜩 주니 우리는 그 근처인 물탄에만 와서도 이미 잔뜩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우리는 물탄에서 퀘타까지 기차를 이용한 후에 퀘타에서 이란 국경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물탄 마우솔레움

물탄에서 휴식을 취하던 저녁, 시내의 마우솔레움에 다녀왔다.


 물탄에서는 다시 한 번 소장님의 도움으로 기차표를 예매하고 하루의 휴식을 취했다. 그 후 퀘타로 이동한 우리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버스를 타고 무사히 국경에 도착해 이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퀘타에서는 버스표를 구하기 위해 삼륜 택시를 타고 시내를 돌아 다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따다닥 하는 소리가 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작은 폭죽 소리였던 것 같은데 그 때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순간적으로 몸을 숙이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만큼 극도로 긴장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차 저차 하면서 무사히 발루치스탄을 통과한 지 삼 주 후에 퀘타에서 정부군과 반란군 간의 교전으로 몇 명이 사망하고 도시 전체에 계엄령이 내려져 아무도 들고 날고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난 우리가 정말 위험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짐꾼

물탄 기차역에서. 우리의 짐을 날라 주던 짐꾼.


 한국을 떠나기 전에 어떤 분이 발루치스탄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 길을 가는데 제일 큰 장애물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구나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자연 환경과의 싸움은 사람의 의지로 헤쳐 나갈 수도 있겠지만, 종교, 민족 갈등 등으로 분쟁을 겪고 있는 위험 지역의 장애물은 다름 아닌 바로 사람이었다. 발루치스탄을 지나 오면서 나는 그 말씀이 새삼 맞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 발루치스탄에서 더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총을 든 사람이었으니까...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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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gertip.com BlogIcon Zet 2007.10.04 16:3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멋진 글과 사진들 잘보았습니다. :)

  2. Favicon of http://pustith.tistory.com BlogIcon 맨큐 2007.10.04 23:4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우와~
    멋져요! ^^
    전 몽골여행 이후로는 휴식 컨셉의 여행만 다니고 있습니다. ㅎㅎ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7.10.05 09:4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흐. 저도 이 여행 이후로는 당분간 익스트림한 여행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몽골 좋네요. 언젠가 가 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