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 되어 가는 유적지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하라파 유적지

파괴 되어 가는 하라파 유적지

 하루를 지내고 출발하기로 했던 사히왈에서 일행의 몸 상태가 좋질 않아 하루를 더 쉬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은 우리가 머물던 인더스 호텔 주인 아저씨와 그 친구와 함께 인더스 문명의 주요 유적지 중 한 곳이라는 인근의 하라파 유적지에 다녀 왔다. 하지만 인더스 문명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유적지는 그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는데 유물을 전시해 놓은 유적지 내의 작은 박물관은 거의 시장판 수준의 전시 상태를 보여 주었고, 유적지 내 한 쪽에는 집이 없는 빈민들이 살면서 그 안에서 구걸을 하고 돌아 다니고 있어서 과연 이 곳이 제대로 보존될 수 있을런지 심히 의심스러운 지경이었다. 또 이미 영국 식민지 시절에 당시 사람들이 집을 짓는 데 사용하기 위해 유적지의 벽돌이나 흙 등을 가져 가면서 많이 파괴가 되었단다. 세계 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꼽히는 인더스 문명을 알기 위한 중요한 자료인데 이런 식으로 파괴가 되고 있다니 안타까웠다. 얼마 전에는 파키스탄 북쪽 탈레반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 무장 세력들이 오래된 석불을 폭파 시키려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기사도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파키스탄의 국력이 문화 유적의 보존과 관련한 문제들을 신경 쓰기에는 많이 부족한가 보다.

도요타

호텔 주인 아저씨의 75년산 도요타 짚차를 타고 유적지에 다녀 왔다. 돌아 오는 길에는 짚차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하는데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총알 목걸이

미안 찬누에 들어 오던 날 길에서 만난 경찰 아저씨. 가지고 있던 진짜 총알로 만든 목걸이를 내가 마음에 들어 하자 선물로 주었다.


미안 찬누의 라시드 아저씨

 사히왈에서 휴식을 취한 후 출발한 오후엔 미안 찬누에 도착했다. 미안 찬누에서는 경찰서의 소개로 샬리마르 호텔에 갔는데, 호텔 겸 식당의 주인인 라시드 아저씨는 자전거 여행을 하는 우리를 무척이나 반겨 주었다. 자기가 랜스 암스트롱과 뚜르 드 프랑스의 열렬한 팬이라면서 자신의 호텔에 오는 자전거 여행자들은 머물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무료로 머물 수 있다고 하셨다. 주인 아저씨는 방뿐만 아니라 식사까지도 무료로 주려 하셨는데 우리가 그것까지는 차마 미안해서 받지를 못했다. 그래도 작은 지방 도시에서 이런 행운을 만나다니 암스트롱한테 조금은 빚을 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주인 아저씨의 환대를 받고 편한 마음으로 쉬고 있던 것도 잠시뿐, 나는 밤새 계속된 설사로 화장실을 들락 날락 거리면서 온 몸의 진이 다 빠져 버렸다. 페샤와르에서부터 계속 되던 설사를 그냥 단순한 물갈이이겠거니 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미안 찬누에서는 물 한 잔만 마셔도 바로 탈이 날 정도로 상태가 악화 되어서 뭐든 먹을 수조차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 지방 도시의 병원이란 것이 너무 열악해서 병원 건물에 들어 서는 순간 내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다시 숙소로 가서 쉬고 싶다는 것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은 커녕 천장에 붙어 있는 몇 대의 선풍기조차 전기가 나가서 작동하질 않았고, 병실이라고 하는 것도 그냥 텅 빈 방에 딱딱한 침대 몇 개 가져다 놓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따로 진찰실이랄 것도 없어서 의사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내게 와서 대강 증상 설명을 듣고 링겔을 처방해 주었는데, 링겔을 맞고 잠이 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라시드 아저씨

미안 찬누 샬리마르 호텔의 라시드 아저씨(왼쪽)와 그 친구분. 내가 아플 때 그토록 많이 챙겨 주었던 아저씨의 친절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몸이 아프면서 주인 아저씨가 더 고마웠던 건 내가 많이 아프니까 친구를 소개해 주어 병원까지 데려다 주고, 또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아저씨는 따로 문병을 와서 상태를 보고 가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이다. 게다가 링겔을 다 맞고 숙소로 돌아 갔을 때 아저씨는 집의 부인에게 부탁해 내가 따로 먹을 닭고기 죽을 만들어서 가져다 주었다. 외딴 타지에서 몸이 아파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지쳐 있던 나에게 아저씨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니 너무나 고마웠다.

삼부 토건의 고선홍 소장님

고선홍 소장님

파키스탄 카네왈 삼부 토건 사무소의 고선홍 소장님.

 두 번째로 만난 고마운 인연은 미안 찬누 근처의 카네왈에서였다. 우리는 내 몸의 상태가 많이 좋질 않아서 미안 찬누에서 물탄으로 가는 차량을 수배하기로 결정을 했다. 처음에는 경찰서에 도움을 청하러 갔으나 그쪽에서는 딱히 시큰둥한 반응 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라시드 아저씨가 근처 카네왈에 한국 건설 회사의 사무소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한국인 직원들도 있고 말이 통하니까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일행을 카네왈의 사무소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렇게 일행이 막 사무소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일을 보기 위해 사무소를 빠져 나가고 있던 고선홍 소장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아마 그때 서로 지나쳤더라면 만나지 못했을테니 그것도 인연인지도 몰랐다. 일행에게 우리의 사정을 들으신 소장님은 흔쾌히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겠다 하시고, 아픈 나를 위해 미안 찬누에서 카네왈의 사무소까지 차로 데려가 주시고 에어컨이 딸린 숙소에 전속 요리사가 만든 한국 음식과 김치까지 대접해 주셨다.

 파키스탄의 사무소에서만 십 년이 훌쩍 넘게 근무 중이신 소장님은 이제 이곳에 완전히 자리를 잡으신 파키스탄 통이었는데 얼마 전에는 한국에 있던 가족들까지 전부 불러 들여 가족들이 모두 같이 살고 있었다. 요리사가 해 준 맛난 한국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신선한 과일까지 얻어 먹어 기운을 차린 우리는 소장님, 사모님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소장님이 네팔에서 근무할 때 만나신 인도인 사모님은 한국에서 오래 사셔서 그런지 말씀하시는 것이 완전 한국 아줌마였는데 소장님의 자녀들 얘기부터 시작해서 살아 오셨던 이야기도 듣고, 또 우리들 여행까지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서로 반가워 많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족

소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아이들. 사무소 마당 한 켠 그네에서.


 나중에 알고 보니 카네왈의 삼부 토건 사무소는 파키스탄을 여행하는 한국 여행자들에게 제법 알려진 모양이었는데 근처를 지나 가던 여행자들이 도움을 받으면서 입 소문이 퍼졌고, 한번은 선교를 왔던 단체 손님들까지 찾아 와서 묵어 가기도 했던 적이 있었단다.

9.11 이후의 부동산 폭등과 파키스탄의 기독교 차별에 관해

 소장님에게 들은 얘기 중에 파키스탄과 관련해 흥미 있던 것은 9.11 이후 파키스탄의 부동산 시장 폭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9.11 이후 미국으로 들어가기 힘들어진 아랍권의 자본이 같은 이슬람권인 파키스탄 등지로 몰려 들면서 테러 이전 한국의 집 한 채 가격이면 너끈히 구할 수 있던 집 값이 폭등해 이제는 서울의 집 한 채로는 라호르의 괜찮은 집은 구경도 못 할 정도로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는데 테러 직전에 파키스탄에 근무하던 한 한국 업체의 파견 직원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당시 서울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라호르에 집을 한 채 구했단다. 집 값의 차익을 노린 것이라기보다는 파키스탄에 아예 터를 잡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9.11이 터지면서 오른 집 값으로 또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었고 덕택에 그는 이제 몇 채의 집을 가진 부호가 되었단다. 그런 것이 사람 운이라는 것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참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소장님이 데리고 계신 파키스탄인 요리사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라호르의 한국 식당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해서 제법 한국 음식 솜씨가 좋은 그는 이슬람권에서는 만나기 힘든 기독교인이었다. 물론 파키스탄에서 공식적으로 종교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진 않지만 기독교인은 아무래도 사회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하는 등의 기본적인 사회 생활에 있어서 차별과 제약이 많이 따른다고 한다. 이 곳 사무소의 요리사도 음식 솜씨도 좋고 사람도 성실했지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직장을 구하지도 못하고 하고 있는 것을 소장님이 사람을 보고 데려와 숙소도 제공하면서 데리고 있는 것이었다.

 혹 이런 사례를 보고 기독교를 홀대하는 이슬람이라고 흥분할 사람들이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례가 비단 이슬람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많은 종교들에서 참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런 점이다.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과 이해의 부족.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의식에서 드러난 문제도 바로 이런 점이었다. 다른 종교를 믿진 않더라도, 배척하지는 않는 정도의 관용만 가져도 지금 여러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적 갈등은 훨씬 줄어 들텐데 지금의 종교인들에겐 그게 너무 없지 않나 싶다.

발루치스탄을 지나다

 카네왈에서 푹 휴식을 취한 후에 사무소의 트럭을 타고 소장님의 소개로 미리 예약해 둔 물탄의 숙소로 왔다. 이제 우리가 지나가야 할 곳은 발루치스탄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제일 걱정이 되던 지역이고 이곳 파키스탄에 들어와서도 제일 많이 조언을 들은 곳이었다. 발루치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이란과 바로 국경을 접하고 있고 정부에 대항하는 종족 갈등으로 많은 폭동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여 치안이 굉장히 불안한 곳이었다. 혹자는 그곳 근처를 지나가는 기차를 타게 되면 잠깐씩 서는 역이라도 절대 내릴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고, 또 퀘타에서 십년 넘게 근무했다던 경찰은 자신도 경찰이지만 그곳만큼 무법 천지인 곳은 처음 봤다며 겁을 잔뜩 주니 우리는 그 근처인 물탄에만 와서도 이미 잔뜩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우리는 물탄에서 퀘타까지 기차를 이용한 후에 퀘타에서 이란 국경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물탄 마우솔레움

물탄에서 휴식을 취하던 저녁, 시내의 마우솔레움에 다녀왔다.


 물탄에서는 다시 한 번 소장님의 도움으로 기차표를 예매하고 하루의 휴식을 취했다. 그 후 퀘타로 이동한 우리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버스를 타고 무사히 국경에 도착해 이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퀘타에서는 버스표를 구하기 위해 삼륜 택시를 타고 시내를 돌아 다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따다닥 하는 소리가 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작은 폭죽 소리였던 것 같은데 그 때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순간적으로 몸을 숙이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만큼 극도로 긴장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차 저차 하면서 무사히 발루치스탄을 통과한 지 삼 주 후에 퀘타에서 정부군과 반란군 간의 교전으로 몇 명이 사망하고 도시 전체에 계엄령이 내려져 아무도 들고 날고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난 우리가 정말 위험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짐꾼

물탄 기차역에서. 우리의 짐을 날라 주던 짐꾼.


 한국을 떠나기 전에 어떤 분이 발루치스탄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 길을 가는데 제일 큰 장애물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구나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자연 환경과의 싸움은 사람의 의지로 헤쳐 나갈 수도 있겠지만, 종교, 민족 갈등 등으로 분쟁을 겪고 있는 위험 지역의 장애물은 다름 아닌 바로 사람이었다. 발루치스탄을 지나 오면서 나는 그 말씀이 새삼 맞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 발루치스탄에서 더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총을 든 사람이었으니까...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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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gertip.com BlogIcon Zet 2007.10.04 16:3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멋진 글과 사진들 잘보았습니다. :)

  2. Favicon of http://pustith.tistory.com BlogIcon 맨큐 2007.10.04 23:4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우와~
    멋져요! ^^
    전 몽골여행 이후로는 휴식 컨셉의 여행만 다니고 있습니다. ㅎㅎ

    • Favicon of http://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7.10.05 09:4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흐. 저도 이 여행 이후로는 당분간 익스트림한 여행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몽골 좋네요. 언젠가 가 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예요.

여기가 수도라고?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
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훈자를 떠나 일주일만에 도착한 이슬라마바드에 대한 첫 인상은 솔직히 여기가 과연 한 나라의 수도가 맞나 하는 것이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비교적 번화한 상업 지역 중 하나라는 Blue Area는 우리 나라 용산의 낡은 상가 건물들이나 종로의 오래된 낙원 상가 건물 같은 것들이 몇 채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 사이에 있는 외국 은행의 지점이나 패스트푸드 체인이 이 곳이 그나마 중심가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들이었다. 이런 곳이 번화가라니 그럼 다른 곳은 도대체 뭐가 있다는 것인가.

 사실 이슬라마바드는 지금까지 보아온 파키스탄의 다른 도시들, - 북쪽의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따라 늘어선 길기트, 베샴, 다수, 하리푸르 등등 - 또 그밖에 파키스탄의 여러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도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정돈되고 깨끗한 도시였다. 단지 그간 지나온 도시들에 내가 워낙 실망하고 있었기에 - 특히 길기트 같은 도시는 정말 단 하루도 더 머물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 처음 가 본 Blue Area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 것이다.

 현재의 이슬라마바드는 규모면에서 보자면 남쪽의 카라치와 라호르에 이은 파키스탄의 세 번째 도시이다. 원래는 지방의 작은 도시였으나 1960년대, 대통령인 Ayub Khan이 국토의 남쪽 카라치에만 치중되어 있는 개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균형적인 발전을 꾀하기 위한 이유 말고도 이슬라마바드는 여러모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우선 해안선을 접하고 있어 인도 등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취약한 카라치와 달리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했다. 또 기후 조건에 있어서도 카라치보다는 훨씬 생활하기 나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이슬라마바드는 파키스탄의 새로운 수도가 될 수 있었다.
 
이란 비자 받기 Tip

 육로를 통해 여행을 하면 이란으로 들어가는 경로가 터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의 몇가지 경우가 있는데 보통 이란 국경에서 일주일짜리 트랜짓 비자를 바로 발급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길게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따로 한달짜리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하는데 파키스탄에서는 이슬라마바드의 이란 대사관과 페샤와르에 있는 이란 관공서에서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다.

 이때 꼭 페샤와르로 가서 비자를 발급 받기를 추천하는데 이슬라마바드의 대사관에서는 보통 2주, 더 늦으면 아예 기한 없이 걸리기도 하지만 페샤와르에서는 빠르면 2~3일, 중간에 휴일이 껴 있어도 최대 5일 정도면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란에 들어간 이후에는 별 무리 없이 비자 연장을 받을 수 있으므로 처음에는 한달짜리 관광 비자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란 비자를 발급 받을 수는 있는데 초청장 대행 업체 등을 통해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고, 또 비용도 적지 않게 들어가므로 육로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나중에 인접국에서 비자를 발급 받거나 국경에서 트랜짓 비자를 발급 받을 계획을 짜는 것이 편할 것이다.

이란 비자.

페샤와르에서 발급 받은 이란 비자. 여기에는 분명히(??) 내 이름도 적혀 있다.


파키스탄의 심장, 라호르

 백제의 고도인 공주와 부여, 그리고 신라 천년의 수도인 경주는 내가 우리 나라에서 특히 좋아하는 도시들이다. 모두 한 때는 한 나라의 영광과 번영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현재까지도 그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도시 곳곳에 간직하고 있는 곳들이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의 심장'이라고도 불리는 라호르는 파키스탄에서 바로 그런 위치를 점하고 있는 도시이다. 라호르는 고대 무굴 제국의 지배 하에 번영을 구가했는데, 지금도 라호르 곳곳에는 그 시절 번영의 흔적이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도시의 중앙에 자리한 라호르 포트와 바드샤히 모스크 등이 그 당시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역사의 유산이며 또 무굴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정원들도 여러 곳에 남아 있어 당시의 번영과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바자

라호르 올드 바자의 밤 풍경.


 무굴 제국이 쇠퇴한 이후 19C말에서 20C 초, 파키스탄은 영국의 식민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당시 영국은 무굴 제국의 양식과 고딕, 빅토리아 양식 등을 혼합한 건축을 선보이면서 라호르에 아름다움을 더했고 이 시기에 라호르 박물관과 GPO, 대학 등이 지어졌다.

 라호르에 들어온 첫 날에는 이 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제일 기대하고 있던 라호르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민 지배 시대에 지어진 박물관의 외관은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고 있었는데 전시된 유물들은 우리 교과서에도 나오는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굴된 신석시 시대의 유물부터 시작해서 무굴 제국 시대, 시크 지배 시대, 그리고 식민 시대까지의 여러 유물들과 파키스탄 독립 역사를 알려 주는 전시실, '굶고 있는 붓다의 상'으로 유명한 간다라 미술품들, 또 파키스탄의 현대 미술 작품들까지 다양한 시대, 장르, 역사를 망라하고 있었고 이는 외국인의 입장료가 내국인의 열배에 달하는데 대한 내 불만을 모두 사라지게 할 만큼 훌륭한 소장품들이었다.

라호르 박물관

1894년에 설립된 라호르 중앙 박물관은 파키스탄 제일의 박물관이자 남아시아 지역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의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소장품은 다양한 장르를 통틀어 수십 만점에 달하는데 수많은 소장품들 중에서도 특히 보리수 나무 아래의 붓다를 표현한 '굶고 있는 붓다의 상'이 유명하다.


 한가지 단점이라면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서인지 넓은 전시장 안에 조명 시설도 열악하고 더구나 무더운 한 여름에 냉방 시설마저 열악해서 천장에 달려 있는 몇 대의 대형 선풍기가 냉방 시설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잦은 정전으로 꺼지는 바람에 조금 둘러 보고 잠시 선풍기 밑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다시 기운을 차려 둘러 보고 해서야 무사히 박물관 견학을 마칠 수 있었다.

미술

박물관의 현대 미술품 중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바드샤히 모스크, 붉음에 압도당하다

근위병

모스크 앞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

 라호르 포트 옆에 있는 바드샤히 모스크를 마주한 첫 느낌은 거대한 붉음이었다. 인도의 타지마할이 모두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져 웅장한 흰색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면, 이곳 바드샤히 모스크는 입구부터 시작해서 돔을 제외한 모든 외벽이 붉은 색으로 둘러 싸여 보는 이를 압도했다. 어찌 보면 붉은 타지마할을 보는 것 같기도 했는데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의 아들이 이 바드샤히 모스크를 지었으니 그 인연일지도 모르겠다.

 바드샤히 모스크는 무굴 제국이 쇠약해진 이후, 시크 지배 시대와 영국 식민 시대를 지나면서 많은 수난을 겪고 파괴되었으나 이후 오랜 기간의 노력을 거쳐 다시 복원되게 되었으며 지금은 파키스탄에서 두 번째로 큰 모스크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곳에는 한가지 재미 있는 현상이 숨어 있는데 모스크 마당의 양쪽을 따라 둘러서 있는 회랑에 보면 정사각형의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의 한쪽 구석 기둥에 가서 기둥을 향해 작게 속삭이면 반대쪽 대각선의 기둥 쪽에 서 있는 사람이 그 말소리를 들을 수가 있는 것인데 소리가 천장의 돔을 타고 이동하기 때문이다.




모스크의 입구.

모스크의 입구.


바드샤히 모스크

한 번에 5만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모스크의 전경. 붉은 색이 인상적이다.


기도하는 곳

모스크 중앙의 기도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기도 했다.

나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 반바지를 입고 있던 내게 왠 가이드 할아버지가 다가와 누더기 사리 하나를 둘러 주었다. 그래서 기념 사진 한 컷.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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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매드에 올리는 본 편과 관계 없이 간간이 생각나는 거리들을 적어 봅니다. 제목 그대로 외전입니다.

 찌는 듯한 7월의 어느 날, 라호르의 Mall Rd.를 산책하던 도중에 출출해진 배도 채울 겸 여기저기로 눈을 돌리던 차에 "We're back @ Mall Rd."라는 조금은 도발적인 문구의 대형 입간판을 세워 놓고 있는 KFC 매장을 만나게 되었다.

 "흠, 우리가 돌아왔다고? 꽤나 자신 있는 광고로구만."이라고 생각하며 오랜만에 치킨 버거나 먹을까 하며 매장으로 들어선 나는 주문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런데 카운터의 메뉴가 조금 특이하다.
 
 "음, 손가락을 이렇게 하면 1번 메뉴, 요렇게 하면 2번 메뉴라고...?"

 친절한 그림과 함께 손가락의 모양을 자세히 보여 주고 있는 그림 메뉴판. 알고 보니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있는 두 명의 직원들이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수화 메뉴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중에 보니 카운터의 직원 두 명뿐만 아니라 홀을 담당하고 있는 직원 한 명, 안에서 음식 만드는 직원 한 명까지 모두 네 명이 말하고 듣지 못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매니저는 이 직원들과 수화로 대화를 하면서 지시를 내리거나 이야기를 나눴다.

 홀의 벽 한 쪽에 크게 걸려 있던 액자 안에는 "We speak all languages at KFC."라는 문구와 알파벳 수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 곳만의 아주 특수한 현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파키스탄에서 이런 일을 마주하게 된 건 작은 충격이었다. 파키스탄이 아직 후진국의 대열에 있는 나라인건 사실이고, 인권이라던지 여러 측면에 있어서 아직 부족한 나라인 것도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런 일을 보게 되니 오히려 우리보다 더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KFC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있던 직원. 내가 손가락을 이리저리 꼬으며 주문을 하기 위해 노력하자 밝은 미소를 보여 준다. 조명이 특별히 어두웠던 것도, 셔터가 느렸던 것도 아닌데 사진이 왜 흔들렸는지 모르겠다. 설마, 이 친구의 미소에 긴장한건가....;;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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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돌팔매질

이 여행기는 노매드 미디어(http://nomad21.com)에 격주로 연재 되는 것을 옮겨온 글입니다. 노매드에 기사가 올라간 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노매드의 자체 편집과는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파키스탄 내의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많은 여행자들에게, 그 중에서도 특히 자전거 여행자들에게는 아이들의 돌팔매질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열악한 교육과 생활 환경 속에서 이 곳에서는 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태반이었고, 그 아이들이 지나가는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어서 자주 돌팔매질을 당했는데 단순히 아이들의 호기심이나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때로 너무 큰 돌들이 날아 오기도 하고, 내리막길에서는 위험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어서 가볍게 웃어 넘길 수가 없었다. 가끔은 자전거를 세우고 아이들을 쫓아가 혼내 보았지만 그것도 뒤돌아 서는 순간 그만이었고, 아이들 근처에 있던 마을의 어른들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그들도 두 손을 들며 미안하다고만 할 뿐 자신들도 어찌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루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와 함께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식당 밖에 세워진 자전거를 본 동네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우리가 식사를 다 마칠 즈음에는 열 댓 명의 아이들이 몰려 와 있었다. 우리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식당 주인 아저씨가 나가서 쫓아내 봐도 그뿐, 금세 다시 주변에 모여들어 호시탐탐 우리가 나오기만을 노리고 있으니 이때의 아이들은 정말 한 무리의 짐승 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는 근처의 경찰서에 전화해 에스코트를 요청했는데, 이곳의 경찰들은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아마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나니 늘 해보던 일이었나 보다. 다행히 경찰이 오니 아이들은 사라졌고, 그렇게 우리는 아이들의 소굴을 빠져 나와 무사히 다음 도시로 향할 수 있었다.

스페인 팀

카리마바드에서 헤어졌던 스페인 팀을 칠라스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왼쪽부터 아구스틴 아저씨, 펠릭스 아저씨, 아돌프, 영호형.


사고를 당하다

 카리마바드를 출발한 지 4일째, 한창 해가 쨍쨍한 한 낮의 7월 어느 날, 함께 라이딩을 하던 일행과 조금 거리가 멀어져 열심히 쫓아 가고 있을 때였다. 저 앞에서 자전거가 넘어진 채로 잔뜩 화가 난 채, 약간 피가 나는 손을 수건으로 붙들어 매고 있는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길 바로 옆에 세워져 있던 경운기 위에서 일을 하고 있던 왠 녀석이 다가오는 자전거를 향해 삽을 휘두른 모양이다. 일행은 삽은 간신히 피했지만 약간의 내리막길이었기에 어느 정도 속력이 붙어 있었던 터라 자전거가 넘어지고 부상까지 당했다.

 내 일행은 잔뜩 화가 나서 길 옆에 있던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그 녀석을 찾기 위해 돌아 다녔지만, 이미 녀석은 어디론가 숨어 버린 후였고 마을 사람들만 구경 거리가 났나 하며 몰려 들었다. 결국 우리는 경찰에 신고를 할 요량으로 지나가던 봉고 한 대를 멈춰 세우고 잠시 휴대폰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헌데 영어를 좀 할 줄 알던 봉고차 운전수가 차에서 내려 우리의 사정을 듣더니 경찰에 신고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라며 우리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사정을 듣더니 자기도 미안하지만 삽을 휘두른 범인을 찾을 수는 없을 거라며 다시 한번 우리를 말렸다.

 딱히 계속 화를 내고 있어 봐야 뾰족한 수도 없었고, 당장 이 곳에서 머물 곳도 없었기에 우리는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일행이 너무 흥분한 상태인데다 다치기까지 해서 이 앞의 도시까지만 우리를 태워다 달라고 부탁하니 그는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그는 우리가 괜찮다면 자기 집에 와서 하룻밤을 묶어 가도 좋다며 우리를 초대 했는데, 어차피 이 앞 도시의 호텔에서 하루를 묶을 예정이었던 우리는 그의 호의를 받아 들이기로 했다.

만세하라의 라시드

 우리를 초대해 준 라시드는 32살로 작은 운송 회사를 운영하고, 변호사 일도 하고 있었는데 한 달 평균 수입이 US 달러로 2~3,000 달러에 달한다고 하니 파키스탄에서는 꽤 부유한 편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저 시내 근교의 작은 집이겠거니 생각했던 그의 집도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에 따로 손님방까지 갖춘 저택이었다. 라시드는 우리에게 식사도 대접하고 같이 얘기도 나누면서 우리가 사고를 당한 것이 마치 자기의 탓인 것처럼 미안해 하고 우리가 이해해 달라고 사과를 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파키스탄에서도 특히 이쪽 북쪽 지역은 생활 환경도 열악하고 교육 수준도 낮아서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에게 적대적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외국인은 적으로 알고 있을 정도라고. 그러니 어찌 보면 우리가 그만한 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만약에 그 마을에서 계속 마을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다면 오히려 더 큰 일이 났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라시드네 집.

라시드네 집.


 밤이 되어서는 정원에 앉아서 간식거리를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갑자기 그가 우리에게 혹시 술을 마시고 싶냐고 물어 보았다.

 "응? 무슬림이 술을 마셔?"

 라시드는 웃으면서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못 마시는 것이지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안 마시는 경우가 전부 다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원한다면 안에 있는 위스키를 가져다 주겠다고 한다. 난 라시드의 이 말을 들으면서 종교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람이라는건 도대체 어떤 것일까. 사실 우리 나라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에는 교회를 가고, 성경의 모든 가르침에 신실한 것은 아니듯이 무슬림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중에 이란에서 더 생각해 본 문제지만 종교라는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한 구실이 될 수도 있지만, 있는 자들에게는 때로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종교란 건 필요할 때만 자신을 치장해 주는 도구일지도 몰랐다.

라시드네 집.

밤에는 정원에서 간단한 간식거리를 먹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초를 켜 놓은 이유는 정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라시드의 집에서 하루를 묶고 만세하라를 떠나는 날 아침에는 라시드의 가족 사진을 찍어 주겠다는 핑계(??)로 우리는 그의 부인도 만나볼 수 있었다. 무슬림들이 외부인에게 자신을 부인을 보여 주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는데, 이러한 관습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지역적 가르침에 의한 것이 크다고 한다. 여튼 가족 사진을 찍어 주면서 만난 그의 부인은 우리가 한다는 여행에 흥미를 갖고 나중에 우리의 여행 사진을 더 볼 수 있는지를 궁금해 했다. 그런 것을 보니 관습에 따라 베일 속에 가린 채 생활이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지만 알고 보면 그저 바깥 세상이 궁금한,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지 싶었다.

라시드네 가족 사진.

라시드네 가족 사진. 라시드, 부인, 하산, 후세인. 큰 딸 마하는 학교에 가서 보이질 않았다.

마하, 하산.

마하와 하산.


 라시드는 하인 가족도 따로 두고 있었는데 - 라시드는 그들을 서번트(servant)라고 지칭했다. -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젊은이 2명, 그리고 어린 여자 아이 한 명까지 모두 여섯 명으로 라시드는 그들에게 한 달에 50달러를 준다고 했다. 라시드의 여덟 살 난 큰 딸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던 하인 가족의 막내딸인 화드만은 라시드네 아이들과 잘 뛰어 다니면서 놀다가도 주인이나 다른 어른들이 부르면 즉시 달려가서 심부름을 했다. 또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에 라시드의 딸 마하는 학교에 가서 보이질 않았는데, 화드만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좋질 않았다. 하지만 그뿐 나로선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냥 내게는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여섯 가족이 한 달에 50달러를 받으면서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생활해야 하다니.

 아직까지 파키스탄은 빈부 격차와 교육 수준 등의 차이가 너무 심해서 이런 계급의 차이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슬람의 율법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평등하지만, 이슬람 사회 내에도 힌두교처럼 계급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이슬람국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도 그러한 계급 차별이 존재한다고 한다.) 파키스탄에서는 이름의 성으로도 그 사람의 신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는데 때로 도시의 고급 식당이나 매장 같은 경우에는 고객의 신분을 보고 입장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파키스탄은 아직 신분적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인 것이다.

화드만

라시드네 집에서 일을 하던 화드만. 라시드의 큰 딸 마하가 학교에 갔을 때, 화드만은 여전히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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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 2006.12.18 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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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라호르


  이번 여행 중에 찍었던 쵸콜렛 광고 사진들. 이런 사진을 모으는 것도 재미있을거란 생각이 문득 들어서 파키스탄에서부터 시작한건데 막상 그 뒤에 간 나라들에서부터는 광고를 찾기가 힘들어서 많이 찍지를 못했다. 좀 더 거리의 분위기가 느껴지게 찍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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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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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여행과 사진 2006.12.14 07:08 |
라호르, 파키스탄

라호르, 파키스탄



  카라치에 이어 파키스탄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의 도시인 라호르. 수도인 이슬라마바드보다도 규모가 크다. 붉은 색이 인상적인 바드샤히 모스크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며, 관리나 전시 상태는 엉망이지만 보유하고 있는 유물들만은 수준급인 라호르 박물관도 있다. 또 신식 상점들이 자리한 시내를 벗어나면 오래된 향기가 느껴지는 도시이기도 하다. 라호르의 한 시장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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