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감독 허진호 (1998 / 한국)
출연 심은하, 한석규, 이민수, 류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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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DVD를 사면서 영화를 다시 봤다. 몇 번째로 보는 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또 보는 건 꽤 오랜만이다. 앳된 시절 심은하의 모습과 연기, 그리고 - 요즘은 많이 사그라 들었지만 - 한석규의 연기 또한 일품이다. 오랜만에 듣는 주제가도 좋다. 역시 한석규가 목소리 하나만은 어디 가서 빠지질 않는다니까.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고3을 눈 앞에 둔 시절이었다. 원래 혼자 극장 가던 걸 즐기는 편이라 그때도 혼자 시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당시 한석규, 심은하는 내노라 하는 톱스타들이었고,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지라 영화를 선택하는데 큰 고민은 없었다.

 길지 않은 한 시간 반 정도의 상영 시간.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극장을 나온 후, 잠시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영화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이후로 허진호 감독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가 네 편의 영화를 만들어 오는 동안 지속적인 그의 팬이 되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중에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역시 <봄날은 간다>이겠지만, 그의 데뷰작이자 잔잔한 명작으로 추억 되는 이 작품 또한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바로 이 데뷰작부터 계속된 일이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최근 작 <행복>에서는 직접적으로 주인공들이 죽었고, <봄날은 간다>에서는 상우(유지태)의 할머니, <외출>에서는 손예진의 남편이 죽었다. 하지만 허 감독의 특징이라고 생각 되는 것은 결코 죽음에 근접해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직접 죽음을 보여 주어도 보여 주는 것 이상으로 다가서지는 않는다. 죽음도 우리가 늘 살고 있는 일상의 하나일 뿐이다. - <행복>과 <8월의 크리스마스>를 비교하면 죽음에 대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가는 쪽으로 바뀌기는 했다. 그건 첫 작품 이후, 조금씩 조금씩 더 현실적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변해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주 무대는 정원(한석규)이 운영하는 작은 사진관이다. 이 동네 구멍가게 사진관에 어느 날 사진을 뽑아 달라며 찾아 온 주차 단속원 아가씨 다림(심은하). 둘의 첫 만남은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인상 좋은 넉살의 한석규가 특유의 "허허." 웃음을 지으며 아이스크림을 건네니 다림도 화가 풀릴 수 밖에.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스르르 알듯, 모를듯 서로에게 조금씩 빠져 들어 갔다.

 <8월의 크리스마스> 하면 몇몇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손 꼽는 것들은 한석규가 유리창 너머로 심은하를 보듬는 장면, 사진관에 찾아 온 심은하가 유리창 밖에서 입을 오무려 가며 이야기하는 장면, 사진관의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 오던 밤 거리에서 심은하가 갑자기 한석규의 팔짱을 끼는 장면이다. 이 영화는 다른 영화에 비해 긴 호흡의 장면들이 많은데 그래서 그런지 배우들의 연기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좋은 장면, 좋은 연기를 보면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감동을 받는데 이 작품에선 그런 기분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영화의 주된 공간이 사진관이다 보니 이 영화에서 사진은 중요한 소재 중 하나가 된다. 영정 사진을 찍으러 온 할머니, 본인의 영정 사진을 찍는 한석규, 아버지를 위해 여러가지 사용법들을 만들 때 사용하는 즉석 사진들, 그리고 사진관에 찾아 온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 또 영화 속의 소재로서뿐만 아니라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모티브도 바로 사진이었다. 감독은 영화의 아이디어를 가수 김광석의 영정 사진을 보고 얻었다고 했다. 영정 사진에서 어떻게 그렇게 밝게 웃을 수 있을까 하면서 밝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상을 이야기 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단다.

 그리고 영화는 충분히 그의 의도를 반영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영화에서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냥 옆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때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좋다. 이야기를 얻어 가는 건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연기가 아닌 일상의 모습을 그리고, 죽음조차도 하나의 일상으로 표현한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석규, 심은하의 일상의 연기, 영화를 마치고 갑자기 돌아 가신 유영길 촬영 감독의 화면 포착, 그리고 신인 감독이었던 허진호 감독이 모여 만들어 낸 명작이다. 언젠가는 이만한 콤비들이 다시 모여 만들어 낸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될까?

덧. 영화에서 한석규가 아버지인 신구 옆에 가서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배경 음악으로 흘러 나오는 곡이 아들을 먼저 잃은 남미의 기타리스트가 아들을 생각하며 연주한 곡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 내부 장치들의 디테일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싶다. 어떻게 그 장면에 그런 곡을 찾아서 넣을 생각을 했을지.


Posted by 바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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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goldsoul.tistory.com BlogIcon GoldSoul 2007.12.20 11:4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DVD 있어요. 가끔 생각나면 꺼내서 보고 싶은 장면까지 보고 끄기도 해요.
    언제봐도 좋아요. 8월의 크리스마스는요. :)

  2. kradmeser 2008.08.01 01:22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잘 지내냐? 무심코 검색창에 scsc를 쳤다가 여길 찾았다.

    한석규 아저씨는 원래 성우 출신이라 목소리가 멋질 수 밖에 없지. ㅎㅎ

    8월의 크리스마스는 장면장면이 다 좋지.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한석규가 버스를 타고 가고 있을 때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가 깔리는 그 장면..

    • Favicon of https://downeve.tistory.com BlogIcon 바위풀 2008.08.01 16:0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와, 형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어떻게 지내십니까? 얼굴 까 먹겠어요.

      한석규가 버스 타고 가는 장면 생각나네요.
      솔직히 영화 전체적으로 다 좋았어요.
      크게 뭐 뺄 것이 없었죠.

      이 영화, 어느 새 10년도 더 되어 버렸죠?
      어느 새 제 나이도 그만큼......